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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주점에 관한 기록은 고려시대에 비로소 나타난다. 고려 성종2년(983년)에 송도에 처음으로 주점의 설치를 허가한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숙종 7년(1102)부터는 서민의 주점이 처음으로 곳곳에 생기기 시작했다. 그 당시 개경에 좌우 주점을 두고 각 주와 현에
주점을 내었는데 이러한 관설주점은 당시 해동통보, 동국통보 등과 화폐를 주조하여 유통시키기 위한 유인책이었다고 한다. 결국 화폐통용의 이익을
교육하려는 목적으로 관설주점을 개설한 것이다. 이러한 관설주점이 나라로부터 허락받은 주점이라면 그외에도 민간에서 운영하는 주점도 있었다. 문헌에
나타나는 구체적인 기록은 없으나 고려가요 쌍과점에 "술 파는 집에 술 사러 갔더니 그 집 주인이 내 손목을 쥐더라"는 것을 보아 민간에도 술을
소매하는 집이 이미 정착하였던 것 같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고려시대에 국가적 종교로서 각종 특혜를 누리던 불교사원들이 가장 규모가 큰
주점이었다는 사실이다. 불교사원들은 세금과 역을 면제받고 술, 국수, 마늘, 소금 등을 판매하면서 숙박업까지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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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이후 조선시대 효종 대에 이르러 화폐가 점차 유통됨에 따라 숙박을 해결할 수 있는 주막이 생겨나게 되었다. 주막은 조선후기에
장시(場市)가 번성하고 역참제도라는 교통제도가 발달함에 따라 더불어 번창하였는데, 장시에 모여든 사람들이 화폐를 지불하고 음식을 먹고 잠을 잘
수도 있었으며, 곳에 따라서는 접대부를 두는 곳까지도 있었다. 주막(酒幕)의 막(幕)은 집을 의미하는 것으로 대부분 주(酒)자를 적은 깃발을
내걸어 주막임을 표시했다. 주막은 19세기 후반부터 여행자가 불편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전국의 교통요지 곳곳에 생겼다.그러던 것이
조선시대 말기에 이르러서는 상업이 활발해짐에 따라 헌주가, 소주가, 병주가, 주막, 목로주점, 내외술집, 모주가, 색주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주점이 등장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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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주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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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 헌주가는 비교적 규모가 큰 양조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주로 약주를 만들어 도매를 하며 소매도 하였다. 또 부업으로 탁주와 백주를
약간 만들기도 하는데 6~7칸의 공간에 2석들이 큰독 50~60개를 갖추고 있었다. 헌주가의 술값은 선금이나 현금으로 지불하고 일정기간에 한번씩
계산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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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주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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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집, 바침술집이라고 해서 술을 소매하는 집으로 문간에 술병을 그려 붙이고 중간에 손님이 술생각이 나면 중노비에게 돈을 주어 근처
병주가에서 사다가 마시는 것이다. 병주가에서는 소주, 약주, 백주주등은 헌주가 소주가에서 사다 팔지만 탁주는 직접 빚어 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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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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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가는 소주의 제조, 판매를 주로 하고, 서울이남에서도 탁주가를 겸하는 일이 많으나 서울이북이 그 규모가 커서 큰독 70~80개에서
100개까지 갖춘 곳이 적지 않았다. 유명한 서울 공덕리에 50∼60호와 합해서 줄잡아 100호 정도가 연간 2,500석을 만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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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로술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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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초만 하더라도 서울에는 고급 요정 같은 것은 없었고, 일반 대중이 많이 이용하는 목로 주점이 술집의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목로 술집은 '선술집'이라고도 했는데, 서울 장안에는 당주동, 청진동, 모전다리(무교동), 이문안(종로2가), 동관 대궐 앞(종로4가),
구리개(을지로2가) 등에 많이 모여 있었다.뒷골목이나 으슥한 곳에 좁은 목판을 벌여놓고 술한잔에 너비아니나 술국 등을 곁들여 파는데 술값만
받는다. 술잔을 놓는 긴 나무를 '목로'라고 하고, 이것을 놓아 술자리를 마련한 목로 술집은 사방이 터진 온돌에 큰솥을 걸어 놓고, 주인이
손님에게 술을 떠서 끓는 물에 중탕을 해서 손님 잔에 부어 주는 것이다. 동대문 시장 동문 밖의 '흥코집', 동관 동문 안에 '동양루'라는 목로
술집, 신설동의 '형제집' 등이 꽤 유명한 편에 속했다. 목로주점은 조선시대 말기에 등장하여 6.25전쟁 전까지 성행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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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외주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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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몰락양반의 위상을 가늠하는 사회현상으로 내외(內外)주점을 들 수 있다. 술집해서 호구할 생각은 엄두도 못 냈을 양반도 술집을 내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에 들어서부터였다. 물론 내외술집에는 술집표시가 없다. 알음알음으로 찾아가 문전에서 판자문을 약간 밀고 "이리 오너라"
하며 손님이 왔음을 알린다. 그럼 안방에서 "들어오셔 청마루에 자리를 깔고 앉으시라 여쭈어라" 하는 마님소리가 들린다. 내외술집은 일하는 사람이
전혀 없는 경우에는 중문 안에서 개다리소반만을 내민다고 '팔뚝집' 이라고도 하였다. 하지만 이런 내외술집도 나중에 색주가로 전락하여 그 풍습은
없어졌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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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술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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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풍물로 광주리 소주방 또는 공덕리 소주방이라는 이동 술방이 있었다. 주종은 소주로, 오지병에 담아 머리에 이고 다니며 장터나
성안에 드는 길목에 펴놓고 술을 판다. 향학열이 남달랐던 황해도 신계, 곡산, 안악 등지에서 자녀나 남편을 출세시키고자 어머니와 아내가 길거리로
나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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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속도로 발전한 민속주는 조선시대에 전성기를 이루었고, 일제 시대를 거쳐 서양 술들의 유입으로 더욱 다양화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각
가정에서 자가 양조였고 세금을 부과하지 않았으나 1909년 주세법이 발효되어 생산량에 따라 과세하는 간접세가 생긴 후 5차에 걸친 주세령의
개정으로 1934년에는 자가용 술 면허자가 완전히 없어졌다. 천업으로 여겨왔던 주조업에 양반 계급이 다투어 종사하게 됨에 따라 주조업자가
비대해지고 술의 품질이 주세를 위하여 규격화 되어감에 따라 명주가 사라지고 심한 주세에 백성들의 원성 높아졌으며, 밀주의 성행과 일제의 단속의
악순환이 되풀이되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전통주는 차츰 그 자취를 감추게 되고 풍류가 깃든 조상의 술 빚기도 없어졌다. 개화기를 거치고,
이른바 시장경제가 발달하면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음식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무슨 무슨 음식점'이란 상호가 없었다고
한다. 그저, 술손님이나 밥손님을 맞아 들이다가 찾아오는 손님측에서 자연히 그 집의 모양이나 위치, 혹은 음식점 주인의 별명을 붙여서 부르게
되고, 그러다가 음식점은 자연스럽게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회나무집, 오동나무집, 이문안 설렁탕집, 잠바위 설렁탕집, 백목다리 장국밥집,
황포추탕집, 형제추탕집 등 이런 식으로 음식점 이름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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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당들을 몸살나게 한 나라베 술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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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말에 성행했던 술집이다. 그 당시 뭐니뭐니 해도 서러운 것은 굶주림이었다. 일제 말기에 한창 식량기근에 허덕인 적이 있었다. 그러니
술의 기근 사정에 이르러는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곡물로 빚던 술을 금해서 밀주(密酒)가 철저한 통제를 받았음은 물론이다. 그래도 천행으로
주당(酒黨)의 숨통까지 막기는 무엇했는지 일제는 조그만 선심을 하나 베푼 적이 있다. 즉 '나라베(줄서기)' 술집의 출현이다.
오후 5시만 되면 문을 열던 나라베 술집은 천하의 음주당들을 몸살나게 만든다. 그나마 어물쩍대다가는 한잔술도 차례가 가지 않는 비극적
종말이 두려워 오후 서너 시부터 술집 앞에는 때이른 장사진을 치는 진풍경이 연출되곤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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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쟁이들이 출입하던 카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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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고 파란 등불 밝지 못한 샹들리에 아래 담배연기 술 냄새를 재즈에 맞춰 춤추는 젊은 남녀의 옷깃이 소용돌이 친다. 그 틈에
흘러나오는 여급의 목소리는 누님처럼 차분히 가라앉고 오히려 사나이들의 언행이 초조하고 격앙돼있다.' 김동환의 30년대 카페 풍경의 묘사다.
지금도 다양한 형태로 영업을 하고 있는 카페는 일제시대때부터 이미 성행했다. 당시 서울에는 '낙원' '왕관' '엔젤' '태평양' 등의
카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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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실정치의 대명사 요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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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더욱 번창하다가 70년대말까지 인기를 얻었던 요정은 일제시대때부터 비롯됐다. 한말 사양의 궁중에서
퇴출당한 것은 궁녀만이 아니다. 팔도에서 음식솜씨 좋다하여 선상된 숙수(음식을 잘 만드는 사람)들도 퇴출대상이었다. 그 가운데에는 고종황제가
흡족해하는 간을 가장 잘 맞춘다는 안순환이라는 숙수가 있었다. 일제의 강제병탐 후 궁에서 퇴출당한 안순환은 황로마루(지금의 광화문 네거리 남동쪽
모서리)에 조선 요리집을 차렸다. 당시 풍토로서 조선 요리집이란 벤처산업 가운데 하나였다. 이것이 한국 현대사에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명월관이다. 명월관 본점은 1200평의 땅에 건평 600평이 넘는 큰 집이요 종업원수가 120명이나 되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규모
큰 기업형 요정이었다. 이밖에 식도원, 국일관, 송죽원, 태서관 등의 요정이 당시에 성행했다. 70년대 요정의 산실은 단연 삼청각이다.
이곳은 1972년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 6,000여 평 대지에 건축되어 1970년대 여야 고위정치인의 회동과 남북 비밀협상, 한일회담의 막후
협상장소로 이용하였던 곳으로, 제4공화국 유신시절 요정정치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는 손님이 줄어들어 1990년대 중반 이름을
예향으로 바꾸고 일반음식점으로 전환하였으나 경영난으로 1999년 12월에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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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미군의 주둔과 6.25를 통하여 서양술이 선보였고, 이로 인하여 부유층들은 고급 양주를 선호하게 되었다. 서민들은 집에서 술을
담그기 시작했는데 조선시대의 명주들은 사라지고 획일적인 개량식 막걸리가 주종을 이루었다. 6.25 이후에도 서민들은 정치적 불안과 가난에
시달렸다. 그리하여 이때의 술은 현실을 잊게 해주는 역할을 했다. 해방과 6.25를 거치는 동안 8도에서 서울로 사람들이 모여들어 전주식당이니,
부산횟집, 평양식당, 함흥냉면집 등 지방 고유의 전통 음식을 파는 식당이 늘어나게 됐다. 평양냉면집, '우래옥', 곰탕집 '하동관', 돼지갈비를
전문으로 하는 '최대포집', '남포면옥', '부민옥', 오장동의 '함흥냉면', 청진동 해장국집 '청진옥' 등이 비교적 오래된 음식점으로
꼽히는데, 이 밖에도 전통을 자랑하는 음식점은 많았다.일제 해방과 한국동란은 상당수 업종전환 및 메뉴 변경을 실시하게 한 큰 사건이었다. 곰탕,
설렁탕, 해장국, 도가니탕, 보신탕 등 '탕'의 전성시대를 알리는 계기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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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는 포장마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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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후부터 생겨나 지금까지도 계속적인 인기와 명맥을 이어온 장수업종의 하나로서 주머니 돈이 부족한 서민층의 애환을 달래주는 주점의
형태이다.50~60년대 청계천 등지에서 광목으로 윗도리만 겨우 가린 채 참새구이에 잔 소주를 팔던 포장마차는 70년대에 접어들며 요즘의 모습과
비슷해졌다. 8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포장마차는 대표적인 서민 주점이었다. 지금도 30~40대 샐러리맨들은 그 옛날 잠원동 '한신
포차'같은 정통 포장마차에 대한 향수를 되새기곤 한다. 그러나 얼마 뒤 개발 바람과 함께 상당수의 포장마차 촌이 사라졌고, 현재는 종로,
인사동, 사당동 등에서 근근히 명맥을 잇는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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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훈한 정이 오가던 대폿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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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폿집이란 말은 해방전만 해도 없었다. 그때 술집은 목로집, 목로술집, 선술집이라고 했다. 그러다 해방이후 대폿집이라는 말이 쓰였고
60~70년대까지 대폿집은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던 곳이었다. 붉은 페인트로 왕대포라고 씌어진 창문이 달린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서면 커다란
드럼통에 화덕을 만들고 연탄불을 피워 실내는 매캐한 냄새와 사람들의 훈기로 가득 차 있다. 연탄불 위에는 안주거리가 끓고 담배연기와 음식물의
훈기, 무엇보다 정겨운 친구의 체온이 느껴지는 그리운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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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부인이 드나들던 카바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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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부인의 춤바람을 다룬 영화 '자유부인'(1955)의 인기가 말해주듯, 50년대 도시에서는 춤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그 당시 서울에는
카바레, 댄스홀이 급증했다. 61년 통계에 따르면 전국의 카바레 67개소 중 17개소, 바 328개소 중 144개소, 다방 2,083개소 중
1,086개소가 서울에 위치해 있었다. 이러한 카바레는 5.16이후 그때까지 유행했던 댄스홀이 폐쇄되면서 성행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카바레는 주로 중, 장년층들을 위해 공간이었으며 주로 소주와 막걸리를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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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개발로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던 시절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부분이 송두리째 변혁을 겪었다. 사람들은 도시로
이동하였으며 의식주 생활 방식이 달라졌다. 농경 문화에서 도시 산업사회 문화로 바뀌면서 사람들은 바빠지고 평가 기준은 능률이나 돈이 되었다.
외국과의 무역을 통하여 걷잡을 수 없이 들어온 미국식 문화도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 방식을 흔들어 놓았다. 이런 와중에 음주 문화도 대변혁이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우선 술의 공급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면 단위마다 막걸리 양조장이 들어서고 생산량이 해마다 늘었다.
1965년부터는 정부의 양곡 정책으로 쌀이나 보리 등의 곡물을 술의 원료로 쓸 수 없게 되어 희석식 소주가 대량 공급되었다. 서민들은 소주를
주로 마시게 되었으며 점차 경제 수준이 높아지면서 각종 행사에 술을 넘치도록 내놓는 것이 관례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때 주로 마시던 술을
막걸리, 소주였다. 70년대 말에는 맥주 소비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전통 주막과 소주집에서 서구화된 맥주집이 늘어났고 가정 소비도 꾸준히
늘었다. 70년대는 요정정치의 시작으로 살롱, 스탠드바, 나이트클럽 회관 등의 고급 서비스업종이 기승을 부렸다. 또한 음식점 문화는 삼겹살,
돼지갈비, 등심, 갈비 등 고기문화로 전환되었다. 술과 고기는 실과 바늘의 관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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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인들의 주요활동 무대 극장식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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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유행했던 극장식당은 당시 연예인들의 주요활동무대였다. 당시 인기 있었던 곳은 아마존, 초원의 집, 무랑루즈, 월드컵
등으로 손님들은 무대에서 펼쳐지는 쇼를 보며 술도 즐기는 즐거움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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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가 연주하는 나이트클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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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클럽은 70년대 들어와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당시 무교동엔 장안 최고의 나이트 클럽으로 이름을 날리던 스타 다스트가 있었고
코파카바나가 그와 경쟁을 했다. 하지만 당시 나이트클럽은 지금과 같이 DJ가 있어 다양한 음악을 틀어주는 것이 아니라 밴드가 직접 라이브 음악을
연주했다. 40~50대들이면 지금도 기억하는 '사랑과 평화' 같은 대중음악 밴드들이 당시 나이트클럽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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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폿집의 후신 - 학사주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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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대학가를 중심으로 생겨난 학사주점은 60년대의 칙칙한 대폿집 분위기에서 발전된 보다 더 세련된 모습의 주점이었다. 막걸리,
동동주에 파전과 두부김치로 김치찌개, 참치찌개 등이 가장 사랑 받았던 메뉴이고 현재도 대학가의 먹자골목의 한 귀퉁이에 몇몇 곳이 명맥을
유지하면서 꾸준한 매출을 올리고 있다 종로의 피맛골은 서울의 대표적인 학사주점 골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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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저 호황의 최대 수혜자 - 맥주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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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가 우리나라에 처음 선보인 것은 일제 식민지 초기에 일본에서 수입되면서부터였다. 맥주 소비량은 76년까지만도 막걸리의 10분의
1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맥주시장이 불붙은 것은 70년대 후반부터 대학가를 중심으로 맥주집이 생겨나면서부터다. 그러던 것이 80년대에
들어와 3저 호황에 힘입은 소비주의 시대로 들어서면서부터 맥주의 소비량 증가와 함께 맥주집도 성행을 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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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도 보고 대화도 하고 - 스탠드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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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바가 들어온 것은 1930년대 무렵이다. 카운터가 있고 양주를 파는 술집을 바라고 했다. 스탠드바는 70년대에 유행했던 바의
형식이다. 주로 음악을 연주하고 쇼를 보여주는 무대가 앞에 있고 몇몇의 독립된 마담들을 중심으로 둥그렇게 앉아서 술을 마실 수 있다. 손님들은
자신의 마음에 드는 마담 테이블에 앉아 대화도 하고 쇼도 보면서 시간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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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때부터 이어진 - 룸살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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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 술집은 삼국시대로부터 서민들과는 상관없이 면면 이어져 내려왔다. 이곳에서 권세가들이 정치적 담론을 해왔고 그들만의 여흥을 즐겼다.
그러나 70년대 말부터 이런 식의 술집이 폭발적으로 늘어났으니 바로 룸살롱이다. 특수 계층만 드나들던 고급 술집에 대중이 드나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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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는 60, 70년대 고도성장의 결실이 맺어지는 시점이기도 하지만, 2저 호황이라는 국제적인 환경도 뒷받침 된
시기이다. 한국 술집의 역사에서 80년대 이후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경향은 술집과 음향기계와의 결합, 술집과 노래의 결합, 성인쇼 술집의
확산, 여종원 술집의 대중화, 술집의 주택가 침투, 젊은 세대 전용 술집의 등장, 술집 인테리어의 고급화, 술집 공간구조의 변화 등이다. 물론
이러한 현상이 예전부터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현저하게 대중화되는 것은 80년대부터이다. 또한 80년대에는 성의 상품화 현상이
현저해졌다. 각종 퇴폐적인 성인 쇼의 범람, 여종업원이 술시중을 드는 카페의 주택가 침투, 술집 여종업원의 출신 성분의 다양화 등의 현상이
나타난다. 이와 같이 성의 상품화가 현재해진 것은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된 결과였다. 야간 통행금지의 해제로 심야영업을 하는 술집이 확산될
수 있었다는 이유도 있지만 경제적인 소비능력의 향상, 2, 3차로 이어지는 음주관행, 기업의 접대문화, 부동산 투기로 인한 불로소득의 증가,
여가향유 능력의 미성숙, 성규범의 완화, 쾌락을 추구하는 가치관의 확산 등등의 요인이 복합된 것이었다. 80년대에 들어 대중주인 막걸리의
소비량은 해가 갈수록 줄어들고 맥주의 소비량은 지속적으로 늘어났다. 또한 진, 보드카 및 위스키의 소비량이 급격히 늘었다. 특히 이때의 특징은
주류 소비의 고급화가 진행되었고 접대주의 비중이 커진
점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