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외국작가 畵壇

[스크랩] Albrecht Durer 그림

鶴山 徐 仁 2005. 8. 19. 23:06

Albrecht Durer

1471∼1528

 

  독일 화가·판화가·조각가·미술이론가. 뉘른베르크 출생. 독일 르네상스 회화의 완성자이다.  헝가리에서 이주한 금세공사인 아버지와 금세공업 집안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 둔 18명의 자녀 중 셋째로 출생. 1528년 뉘른베르크에서 운명 아버지의 조수로 일하다. 90∼94년 콜마르·바젤 등지를 편력, 목판제작에 정진했다. 95년 귀국하여 공방을 차리고 동판화를 시도했다. 작풍(作風)은 처음에 M.숑가우어의 자극을 받고, 이어서 베네치아파 화가 벨리니 일파의 영향을 받았다. 1490∼94년 바젤·스트라스부르 등 각지를 편력, 판화기술을 연마하고 수채화(水彩畵)의 새 분야를 개척했다. 목판화로 시작한 뒤러의 미술은 금세공가인 아버지로부터 받은 훈련과 선배 화가 마르틴 숀가우어의 영향을 받아 이내 동판화의 대가가 되었다.

 

 뒤러의 고향도시 뉘른베르크는 그 당시 독일 전역에서 활판인쇄와  목판화제작에서 가장 선구적인 기술을 자랑했다. 뒤러의 아버지와 친구이며 뒤러가 세례받을 때 대부를 서주었던 분은 가장 잘 나가는 인쇄소를 경영하고 있었고 인쇄기계 25대 기술자를 100명이 넘게 고용하고 있었다. 인쇄술 덕택에 뉘른베르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용되어 빈곤과 기아가 완전해결되었고, 하류에서 상류귀족에 이르기까지 모두 에게 일감이 돌아갔다. 덕분에 누구나 제집을 소유하고 종교적 내용을 담은 책, 성자 전, 성서 등의 책은 아무리 찍어내도 금새 동이나고 말았다.

 

 미카엘 볼게무트에게 사사. 1498년 목판화 ‘요한계시록’ 초판 발행. 1512년 새로운 기법인 에칭실험. 3대 동판화로 꼽히는 ‘기사의 죽음과 악마’ ‘서재에 있는 성인 히에로니므스' ‘멜랑꼬리아 I’ 발행.  조각에도 관심을 보였으며, 94년 최초의 이탈리아 여행에 나서 A.만테냐의 영향을 받고 귀국, 이미 대표적 화가로서의 활발한 활동을 시작했다. 목판화의 대작시리즈 《요한 계시록(1498)》, 그림 《3왕의 예배(禮拜)》는 이 시절의 대표작이다. 1505∼1506년 2번째 이탈리아 여행에서는 베네치아 회화에 깊은 감명을 받아 그의 전작품 중 가장 풍부하고 화려한 작풍을 보인 시기가 되었다.

 

   미술도 교양과목에 속한다는 이탈리아사람들의 견해를 받아들인 뒤러는 , 신사인 동시에 인문주의자적인 교양인을 미술가의 이상으로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지적관심을 꾸준히 도야함으로써 다양한 기법과 주제들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회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독일적인 품격을 가미한 독자적인 화풍을 구축해 나갔다. 종교·초상·풍경·동물·식물 등 다방면에 걸쳐 그 주제를 다루었고 회화뿐만 아니라 판화(목·동판)·소묘(素描)에도 재능을 발휘하여 렘브란트와 함께 서양 회화사상 최대의 화가로 꼽힌다.  98년 목판의 연작 《묵시록》 《대수난》에 착수, 1501년경부터 동식물의 형태학적 연구 시작, 1504년 최초의 인체비례의 수작 《아담과 이브》를 제작했다. 1505년 다시 이탈리아를 여행, 《장미관의 성모》 《젊은 베네치아의 여인》 등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전자는 군상처리(群像處理)에, 후자는 자화상을 포함한 초상화의 전개라는 데 의미가 있다. 이탈리아 여행을 통하여 뒤러는 명석한 퍼스펙티브와 인체표현을 터득하여 점차 독일의 전통으로 옮겨갔다. 그것은 후기 고딕의 엄한 구성과 원근법의 결합인데, 뒤러는 독일 전통에 충실하였다. 기술적으로 뛰어난 에칭은 그 후의 렘브란트의 판화를 예견하게 한다. 15년 막시밀리안 1세로부터 연금을 받고, 20년 네덜란드를 여행하며 견문을 넓혔다. 유화 중의 수작은 《4성도》(26) 《만성절》(1511) 《자화상》(1498) 외에 몇 폭의 성모자상 및 《요프스트 플랑크펠트》(1521)를 비롯한 초상화들로, 초상화에서는 빛과 그늘의 분열, 종교개혁·농민전쟁 시대의 복잡다기한 인격을 반영했다. 유채화 약 100점, 목판 350점, 동판 100점, 소묘 900점은 독일 르네상스의 증언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문필에도 능하여 《원근법(遠近法)》 《인체균형론(人體均衡論)》 등의 이론적 연구서와 여행기를 발표했다. 작품은 종교화 《금시작(金翅雀)의 마돈나》 《아담과 이브》 《4인의 사도(使徒)》 등이 있고, 이 밖에 초상화 《자화상(自畵像)》 《성히에로니무스의 상(像)》, 판화 《요한 계시록》 《마리아의 생애》 《수난(受難)》 등의 연작(連作)을 비롯하여 《기사(騎士)·사신(死神)·악마》 《실종된 아들》 등의 작품이 널리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 여행 중에 그린 수채풍경화는 독일예술이 처음으로 도달한 순수풍경화라고 할 만하다. 귀국 후 A.D.라는 사인을 쓰기 시작했다. 98년 목판의 연작 《묵시록》 《대수난》에 착수, 1501년경부터 동식물의 형태학적 연구 시작, 1504년 최초의 인체비례의 수작 《아담과 이브》를 제작했다. 1505년 다시 이탈리아를 여행, 《장미관의 성모》 《젊은 베네치아의 여인》 등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전자는 군상처리에, 후자는 자화상을 포함한 초상화의 전개라는 데 의미가 있다. 이탈리아 여행을 통하여 뒤러는 명석한 퍼스펙티브와 인체표현을 터득하여 점차 독일의 전통으로 옮겨갔다. 그것은 후기 고딕의 엄한 구성과 원근법의 결합인데, 뒤러는 독일 전통에 충실하였다. 그의 인체와 의상과의 관계를 보면 명백한데, 다소 생경한 인상은 지울 수 없다. 귀국 후 11년경까지는 빈미술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만성도》 등 종교화의 대작을 몇 점 제작했다. 마침내 이탈리아의 형식적 요소를 완전히 소화하고독이적인 감정을 온전히 표현하고 있다. 13∼14년 동판화의 3대 걸작 《기사·죽음·악마》 《서재의 성 히에로니무스》 《멜랑콜리아》를 발표, 인식·윤리·신앙을 상징화한 것을 보아도 그의 독일적 본질을 알 수 있다. 기술적으로 뛰어난 에칭은 그 후의 렘브란트의 판화를 예견하게 한다. 
 

 15년 막시밀리안 1세로부터 연금을 받고, 20년 네덜란드를 여행하며 견문을 넓혔다. 유화 중의 수작은 《4성도》(26) 《만성절》(1511) 《자화상》(1498) 외에 몇 폭의 성모자상 및 《요프스트 플랑크펠트》(1521)를 비롯한 초상화들로, 초상화에서는 빛과 그늘의 분열, 종교개혁·농민전쟁 시대의 복잡다기한 인격을 반영했다. 유채화 약 100점, 목판 350점, 동판 100점, 소묘 900점은 독일 르네상스의 증언이라 할 수 있다. 그림에서 그는 엄걱한 정면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는 당대 회화의 관습에 비추어볼 때  조금 이례적인 일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완벽한 정면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릴 때나 채택했고, 보통 사람의 초상은 3/4 프로필로 하는 게 관례였다. 그 얼굴에서 풍기는 도도한 자존심이 예사롭지 않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 했던 것은 아니다. 예술가의 창조력은 신의 창조력에서 유래한다는 자신의 신념을 밝히고자 했을 따름이다. 이탈리아 여행 뒤에 그려진 이 자화상엔 뉘른베르크의 금 세공사의 아들로 태어난 뒤러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뇌했던 흔적이 투영되어 있다. 독일에선 15세기가 끝날 무렵까지도 화가의 지위는 미천한 것이었다. 손으로 일하는 직업을 천하게 여기던 중세의 관습을 벗어나지 못한 고향을 떠나 그는 베네치아로 갔다. 거기에서 완전히  딴 세계에 접한 그는 길드에 소속된 장인과 지식인 예술가 사이에서, 중세와 르네상스 사이에서 분열된 자신을 이렇게 한탄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나는 신사이지만, 고향에서 나는 기생충이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뒤러의 판화작품수는 300점이 넘는 방대한 양이었고 그것도 여러 기법에 의한 다양한 것이며, 그의 숙련된 표현기법은 독자적인 그의 예술세계를 표현가능케 하였다. 뒤러의 판화예술 세계는 크게 두가지로 구별되는데, 그 하나는 목판화이고 또 다른 하나는 동판화이다. 후자는 금속 조각용의 끌을 사용하여 동판에 직접 작가의 생각을 오목선으로 형상화하는 수법으로, 눈 위의 발자국, 모래 위의 흔적 등을 생각케 하는가 하면 한편 오래된 시각적인 표현기법으로서 선사시대의 암각화까지 회상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동판화가 판화 예술에서 가장 고귀하고 소중하다는 이유는 중세의 금은세공사로부터 그 기법과 도구를 계승 한 것이며, 장인적인 기술영역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장인과 같은 직업적인 손놀림이 없다면 감흥이나 정신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을 생각조차 하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판화가는 특출한 정확성과 동작의 우아함을 결합시키고, 정신을 이에 투입함으로써 기술을 가장 고귀하게 승화시킨다는 것이다.

 

  이렇듯 뒤러를 통해 동판화는 중세적인 장인의 직업적인 상태에서 격상되어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추구한 과학성이 담긴 예술작품으로 본격적인 그 영역을 확보하게 된다. 사실, 동판화는 뒤러 이전에 15세기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금은세공사의 장인적인 성격의 작품으로 제작되어 동판화의 창시적 역사를 이루기도 하였다. 예컨대 앞에서 언급한 독일의 콜 마르의 숀가우어, 이탈리아의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 그리고 만테냐 등의 동판화 등이 그 예가 될 것이다.


  하지만 뒤러미술의 획기적인 성격은 그의 이탈리아 여행에서 얻은 인문주의 사상과 학문적인 과학성에 의한 것이었다. 사실 르네상스의 이탈리아 예술가들은 공간의 측정과 구조를 지배하는 수학적 원리와 인체의 완전한 비례법을 과학적으로 확립하고자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뒤러는 그들에게서 결정적인 영향을 입었다. 뒤러가 받은 영향은 최상급의 대표적인 동판화 작품 <아담과 이브>(1504)에서 드러난다. 그 옛날 고대미술에 있었다고 믿었던 이상적인 남녀의 형상이 이 작품에서 새롭게 창출되었다. 신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아담과 이브는 절대미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원죄에 의한 파멸이 물질적인 육체에 다가서고 있음을 시사하고도 있다. 
  

 뒤러가 두 번째로 이탈리아를 여행하기 한달 전에 제작한 이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특징으로 조물주에 의해 창조된 최초의 인간이 지닌 우아하고 아름다운 비례를 위한 고전에 대한 탐구이다. 뒤러가 예술가적 직관과 영감에 의존하여 인체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과학적인 탐구정신과 관찰을 통해 그 비례와 형태를 표현하고자 했던 태도는 그의 말년에 제작한 것으로 알려진 <누워있는 누드를 그리는 화공>(1527년경)이란 목판화률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누워있는 누드모델 앞에 일정한 길이로 나뉜 모눈의 틀을 놓고 그 모눈의 비례를 정확하게 옮겨놓은 종이 위에 모델을 거의 기계적으로 정확하게 옮겨 그리고 있는 화공의 눈 앞에 놓여진 자를 볼 때, 그의 치밀한 관찰과 정확한 재산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어쨌든 이미 첫 번째 이탈리아 여행에서 인체의 이상적인 미에 대한 이론을 작품으로 구현하고자 했던 만태냐나 폴라이우올로와 같은 예술가들의 작업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들을 통해 이탈리아의 양식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뒤러는 비단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들에 의해 정립된 인체비례의 이상적 아름다움 뿐 만 아니라 고대로마의 비트루비우스(Vitruvius)가 저술한 고전적 비례의 원칙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으므로 자신의 인체비례의 원리를 고전에서 찾고자 했다. 그 결과 이상적 전형으로서 아담과 이브의 모델을 <벨베데레의 아폴로)와 <메디치의 비너스>에서 선택했던 것이다. 특히 아담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자세와 풍부한 양감은 아폴로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특징임과 아울러 인체를 우주질서의 축도로 본 이탈리아 르네상스적 시각의 승리를 확인케 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벨베데래의 아폴로>상으로부터 예수의 형상을 찾고 <비너스>로부터 성모의 모티브를 구하는 것은 르네상스 회화에 빈번하게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새삼스러운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뒤러 자신도 "우리는 가장 아름다움 남성인 예수 그리스 도를 위해 그(아폴로)의 형상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성모 마리아의 이미지 속에 동일한 모습을 순결하게 그리기 위해 가장 아름다운 여성인 비너스를 재현했던 것이다"라고 말 한 바 있다. 말하자면 고전작품은 미의 이상의 실현을 위해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들에게 빈번하게 재인식되었으며, 특히 뒤러는 이탈리아 미술로부터 받은 영향을 북구적 전통과 결합 시킴은 물론 멀리 고전작품과도 연결하였던 것이다. 인본주의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영향이 뒤러에게 어느 정도 심각하였는가를 뒤러의 다음 과 같은 글이 알려준다. 1525년 뉘른베르크에서 출판한 뒤러의 저서 『측정을 위한 지침』 (Underweysung der Messung)의 서문을 보자면 "오늘날까지 독일의 젊은 화가들은 예술의 학문적인 교육열이 일상적인 경험에 의해 형성되었다. 그들은 정원사의 손을 거치지 않은 야생초처럼 마구 성장하였다. 그들은 작업경험에 의해서만 제작하였으나, 얼마나 이러한 일이 무모한 것인가를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독일작가들은 측정에 관한 과학을 모르고 있다"고 지적하바 있다. 물론 뒤러의 이러한 지적은 독일지역에 여전히 남아있던 중세의 후기고딕적 전통, 이를테면 그뤼네발트(Mattias Grunewsld)와 같은 작가에게서 보이는 분방한 상상력을 보다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기준으로 다듬을 필요가 있다는 것에 기초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뒤러가 미술도 교양과목에 속하며, 예술가 역시 인문학자의 위치로 격상되어야 한다는 이탈리아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였음을 입증한다.

 

  뒤러의 학문적인 예술, 과학을 통한 예술에의 믿음과 열성은 1527년에 쓴 『도시와 성의 요 새화론』과 그 이듬해에 낸 『인체비례론』으로 확인된다. 수차례에 걸친 뒤러의 이탈리아 체류는 과학적인 지식을 통한 예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인식케 하였고, 특히 비례법과 원근법은 현실에 대한 객관적 인식에 있어 절대적인 것임을 자각케 했다. 그가 공간을 측정하는 원근법에 있어서 르네상스의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동의한 바는, 그것이 현실공간을 나타내는 방법이었다는 사실뿐만이 아니라, 질서의 이상적인 규범이고 조화스러운 구도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뒤러는 자신의 예술적인 미학의 핵심을 「인체비례론」이라는 책을 통해 모두 담아 놓았다. 이렇듯이 학문적인 지식과 과학적인 정확성, 그리고 중세의 장인적인 직업의식과의 완벽한 결합을 보여주는 것이 뒤러의 예술이다. 더 나아가서 뒤러미술의 예술성은 뒤러의 미학과 그의 판화미술과의 관련성을 알아봄으로써 더 확실히 알 수 있게 된다. 뒤러의 예술적인 미관을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동판화 작품 <아담과 이브>는 신비스러운 고전풍의 미의 이상이 담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그 아름다움을 거론하는 것은 오로지 측정과 비례로만 아름다움이 산출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심오한 차원에서의 탐색이 중요한 바, 자연의 신비가 이에 그 대상이 된다는 뒤러의 신념이 덧붙여졌기 때문이다.

 

  애컨대, 균형과 조화, 또는 기하학적 원리 등은 자연에서 우리가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알려주지 못하고 예술가의 내적인 힘만이 오로지 그것을 명확히 밝혀 준다. 다시 말하자면 과학적인 성격의 예술과 정신적인 내적 힘이 합쳐 순수한 창작이라는 예술관이 성립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뒤러의 명상적이고 신비적인 온갖 상징과 알레고리들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는데, 이를테면 <아담과 이브>에서 그 인체비례의 고전적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인류의 조상이 최초에 살았던 낙원 에덴동산을 묘사한 부분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우선 조형적인 맥락에서 볼 때 이 판화는 이른바 '여백공포'(horror vacuum)라는 중세적 전통을 환기시키기라 도 하듯 거의 빈틈없이 꽉 찬 공간상태를 보여준다. 두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은 물론 자연대상에 대한 뒤러의 치밀하고 집요한 관찰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각 대상마다 심오한 상징성을 부여하고자 한 결과이다. 예컨대 우리의 시선을 화면의 아래로부터 위로 서서히 옮겨 갈 때, 아담의 발아래 조용하게 엎드리고 있는 생쥐와 고양이를 발견할 수 있다. 그 옆에는 역시 토끼와 암소 그리고 사슴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들은 사람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고 제각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울창한 숲속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는 각각 생명, 지식, 호기심을 상징하는 나무가 있으며, 생명을 상징하는 나뭇가지 위에 역시 지혜의 상징인 앵무새가 앉아 있다. 또한 화면의 우측 상단부에는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드러나는 작은 부분의 공간인 하늘이 있고 그 아래에 펼쳐진 절벽 위에 한 마리의 양이 위태롭게 서있다. 양은 물론 기독교적 상징으로 볼 때 성서를 상징한다. 나아가 두 인물을 둘러싸고 있는 배경의 신비적 깊이감을 고조시키는 부드럽고 섬세한 표현은 이 작품을 지배하고 있는 명상적인 분위기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조화와 균제라는 고전적 아름다움의 성취를 위해 그 자신이 터득한 기술적 숙련에 대한 자신감과 깊은 신앙심으로 구현해 놓은 작품에 대한 자존심으로 그는 앵무새가 앉아있는 나뭇가지에 걸린 자신의 유명한 명판(名板)에 라틴어로 다음과 같이 서명했다. '뉘른베르크의 알베르투스 두레르가 1504년에 그림"(ALBERTUS DURER NORICUS FACIEBAT 1504). 특히 뉘른베르크의 라틴어식 표기가 '노리쿠스'란 점을 주목할 때, 이 그림 속의 울창한 숲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배경이 되는 지중해 연안에 자생하는 식물이 아니라 독일적 풍경을 반영하는 것과 함께 뒤러가 자신의 고향인 북유럽에 대해 얼마나 많은 애정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를 형성해준 모태인 북유럽적 전통을 소중하게 생각했던가를 알려준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과 뒤러 예술이 다른 점은 바로 이 점에 있는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뒤러 작품에서는 신비주의적인 기풍이 감돌고 있고 그의 강한 윤리관을 엿볼 수 있는데 그것은 뒤러의 중세적인 신앙이 밑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1529년 그가 쓴 글을 보자면 "어느날 신이 나를 마르틴 루터 박사를 만나도록 허용하신다면, 나로 하여금 크나큰 영적인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준 그의 모습을 영원토록 기념할 수 있게 동판에 정성껏 새길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 글은 우리에게 뒤러가 경건한 신앙심의 소유자이며 또한 그러한 의미에서 루터를 존경해 마지않았다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동판화를 얼마나 중요시 여겼나 하는 것을 확인시켜주기도 한다. 1518년 뉘른베르크는 개혁사상으로 물들어 있었고 뒤러와 루터는 서신왕래를 통해 서로의 입장을 개진하었다. 뒤러의 종교심은 진지하고 심오하여, 개혁에 동참한 나머지 예술에서의 첫번째 사도가 된 것이다. 이상과 같은 관점에서 뒤러의 회화와 판화의 관계를 볼 수 있고 또한 그의 판화예술의 진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뒤러의 작품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도상학이다. 특히 종교적인 주제의 그림은 새로운 시각과 해석을 갖게 하고 철학적이며, 신화적인 우의, 풍속, 풍자, 초상 등의 작품은 고대와 중세의 박식한 학문을 요구한다. 특히 종교적인 도상의 공통된 극적인 현장감은 극도로 고조된 충격적인 분위기, 그리고 인간 감성의 개방적인 노출 등의 그 특성을 보인다. 화면은 격동·격분의 교차된 열기로 충만하고, 이에 세부적이고 구체 적인 형상의 면면이 이러한 상황을 더욱 부각시킨다. 결국 뒤러의 종교화는 신성과 세속성의 상반된 양자의 거리를 거침없이 공개하고 있는 것이다.

 

  중세를 거쳐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인본주의에 이르기까지 종교화는 신의 절대성에 대한 숭배, 인간가치를 창출한 신에 대한 존경이라는 관념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뒤러의 종교적인 도상은 이 범주에서 벗어나고 있다. 표현양식으로 볼 때, 17세기를 지배한 바로크 양식을 연상케하는 뒤러의 독창성이라고 생각 해 볼 수도 있지만, 이와같은 독특한 뒤러의 표현은 그 도상학적인 근거를 탐구하게 한다. 16세기초 독일의 종교개혁은 "신의 뜻이 복음 안에 제시되어 있다. "는 루터의 믿음으로 교회 보다 성서제일주의를 내세웠다. 이러한 루터의 신앙쇄신운동은 뒤러가 새로운 해석의 성서도상을 산출하게 한 것으로 생각된다. 뒤러의 판화작품 중에 이와같은 상황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1497년에 시작하여 1511년까지 제작한 <그리스도의 대수난기>란 12개의 목판화로 구성돼있는 작품을 들 수 있다. 예컨대 작품 <그리스도의 체포>는 삼각형 구도의 삼단계 공간전개와 다양한 표정적 형태 그리고 명암법 등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참혹한 상태를 극화하고 있다. 이 작품은 유다의 배신에 의해 정신적인 고통이 육체적인 괴로움을 능가하고 있는 상태의 그리스도의 처절한 자태가 극적이다. 뒤러는 이 극적인 장면을 표현하는데 있어 가장된 그리스도의 자비스러움을 배신과 비열로 대립시켜 양자의 거리를 절망적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그리스도의 체포라는 주제가 도상학 내지는 도상해석학으로 이렇듯 해석되어 표현된다는 사실이 뒤러의 작품을 새삼 고찰 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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