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하제를 위한 모색
책임기획_최익진
2005_0622 ▶ 2005_0628
강석문_목단_한지에 수간채색_97×132cm_2005
초대일시_2005_0622_수요일_05:00pm
일상(日常)의 눈_고찬규_이길우_이도선_노청래_천병민_이창훈이상(異常)의 눈_이동환_이구용_문희돈_최익진
상상(想像)의 눈_강석문_조성원_임종두_박수인_정경식
공평아트센터
서울 종로구 공평동 5-1번지
Tel.
02_733_9512
고찬규_봄비 그치다_한지에 채색_130×97cm_2005
「나로부터"이젠 너희들에게..."」 기획은 우리 사회에서 미술이 소비될 수 있도록 작품의 매개자인 동시에 수용자인 독자를 새롭게 정의하려는 것이다. 전시에서 작품을 '읽는' 사회적 행위를 통하여 의미를 재창출하고, 또 다른 전시주역으로서의 가능성을 주목하고자 하는 것이다. 작품에 대한 다양한 해석 가능성은 열어 둔다. 즉, 여러 층의 참조 물을 제시하여 독자의 해석에 개입하는, 지속적인 '말 걸기'의 전시 형태를 취하고자 함이다. 고전적 의미에서 전시 생산자의 범위는 작가만을 상정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 범위를 넓혀 실재 작품을 해석하고 소비하는 '독자'를 주목하려는 것이다. 이 기획은 현대 미술이 지나치게 작가주의로 치우쳐 독해되지 않고, 스스로 소외되는 자기소외적 한계를 극복하는 차원에서 마련하였다. 독자의 범위를 전문독자(전공자)와 소외독자(교양인) 그리고 잠재독자(다수 대중)로 보고, 소외 독자를 설득하는데 1차 목표를 두고자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잠재독자까지를 참여케 하여, 그들과 보다 더 직접적인 관계 맺기 차원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그래서 그룹 내 회원을 소그룹으로 다시 분류하였으며, 각 개인 작업과 하제전의 생각이 읽혀 질 수 있도록 다층적인 참조 물을- 작품과 작품 사이의 전후 맥락과 작품과 텍스트 사이에서 자유롭게 상호 비교 할 수 있도록 준비하였다. 20세기 중반 이후 버거운 '물질'의 무게에서 벗어난 작품은 이제 새로운 맥락 속에서 읽히고 있다. 이러한 소통과정을 통해서만 작품은 온전히 사회적 의미를 획득하리하고 본다. 그렇게 하여 동시대의 사회, 문화적 위상에 대한 우리 작업의 좌표를 가늠해 보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뉴욕이나 런던 스타일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며, 그렇다고 국수주의적 시각에 매몰 되어 추상적인 민족담론을 강조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한국성에 대한 섣부른 대안제시보다 우리는 다만 우리가 디디고 있는 현실 속 다양한 삶 자체를 받아 들여 '자기화'하고자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창작자뿐만 아니라 작품의 수용자인 독자에게도 동일하게 열려 있다고 본다. 우리는 이번 전시에서 소통에 필요한 몇 가지 방법을 시도하고자 한다. 많은 조언과 격려를 부탁하고 싶다. ■ 최익진
이길우_소멸과 생성_장지위에 향, 꼴라쥬, 배접_116.7×90.9cm_2005
'현대 한국화'가 당면한 미래지향적 커뮤니케이션 - 창작그릅 ‘오늘과 하제를 위한 모색전’을 중심으로 ● (부분 발췌) I.들어가는 말 ● 이 글은 중앙대 한국화과 동문들로 구성된 창작 그룹 ‘오늘과 하제를 위한 모색전’이 작년에 가졌던 창립 20주년 기념전 이후, 새로이 그룹의 변화와 발전을 다각도로 모색하는 지점에서 준비하는 세미나의 기조 발제를 위한 용도로 일차적으로 작성되었다. 후에 이 글은 상기한 단체의 21주년 기념 전시에 대한 카탈로그의 서문의 용도로 재수정되었음을 밝힌다. 따라서 이글은 관객, 혹은 대중이라는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을 도모하는 한국화의 향방에 관한 나름의 분석과 제안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지만 세미나 당시 또 다른 발제자 정준모 선생의 한국화 그룹의 현실에서의 역할과 전망을 다루게 될 글과 주제적 측면이 일정부분 불가피하게 겹치게 되기도 했다. 게다가 상기 주제에 부합하는 글을 만들기 위해 기존 글을 수정하고 IV장은 새로 쓰는 작업을 거쳤던 까닭으로 좀 더 방만해지고 산만해진 감이 없지 않다. 요청과 주문에 의해 시도된 글쓰기가 드러내는 당연한 결과일 터이지만 필자의 입장으로서는 ‘현대한국화가 당면한 미래지향적 커뮤니케이션’이라는 큰 주제가 세미나 때보다 더 이번 글에서 선명히 드러나길 바라는 마음이다. ...
이도선_Solitude_한지에 채색_162×260cm_2005
II.동양화, 한국화, 현대한국화 그리고 현대미술 ●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한, 동양화, 한국화 그리고 현대미술이라는 소제목 구분이 오늘날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먹과 종이라는 매체의 특성을 끌어안고 시작한 우리 한국화의 정체성을 지금에서 다시 한번 명징하게 파악하는 것이고 오늘날 미술현장에서 현대미술이라 불리는 것을 기꺼워하면서도 한국화라는 이름을 끝내 버릴 수 없는, 장르의 특성상 가지게 되는 한계를 처절하게 인식하기 위한 출발점이 된다. 매체의 특성상 지니는 장르의 한계는 커뮤니케이션과 관련한 논의와 그 실제에 있어서도 디테일한 한계치의 영역을 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한국화라는 장르의 특성이나 정체성을 저버리지 않는 상태에서 소통을 시도해야 하는 버겁지만 필수불가결한 노력들이 필요한 것이다. ...
노청래_파주-용미리 마애불_장지에 수간채색_182×90.9cm_2002
III.현대한국화의 창작자와 수용자간 커뮤니케이션- 일반 매체 소통론 ● 현대한국화의 매체적 한계는 그 깊이의 골이 깊은 만큼, 기대되는 수용자와의 커뮤니케이션에서 잔인하게 소외당한다. 그 소외란 관객, 전문가, 대중들로 치환되는 수용자라는 커뮤니케이션 대상의 범위가 극히 한정적이 되는 것과 더불어 커뮤니케이션의 방편 역시 매우 제한적이라는 데서 파생된다. 이 장에서 우리는 현대한국화가 감당해야 하는 커뮤니케이션에서의 이러한 소외를 언급하면서 구체적인 현상 분석을 꼼꼼히 따져보기로 하자. 매체적 한계가 유발시키는 커뮤니케이션의 대상과 방편이 제한적이라는 것이 무슨 말인가? 우선 ‘매체적 특징’에서 연유하는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그 ‘방편’의 규모 축소를 먼저 알아본다. 한국화는 극소수의 예외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것이 전통의 것이든, 현대의 것이든지 간에 2차원 평면으로 시작해서 그로 귀결된다. ● ...서구에서도 오랫동안 모색되었던 회화의 끝없는 자기 변신은 2차원 평면을 탈피하여 3차원화 되든가 그것이 아니라면 잠재적, 실제적 운동을 부여하면서 비로소 변모될 수 있었던 것처럼, 한국화도 그 동안 회화가 끌어안았던 문제들을 고스란히 물려받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미술이 그것의 표현 언어로 가지고 있는 여러 특징 중에서 유독 비주얼이라는 ‘시각 이미지’에만 집착한 채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해 왔던 오래된 관습을 (현대)한국화는 매체의 특성상 그대로 물려받고 있는 것이다. 이미지를 파악하는 시각의 방법론으로 소통하기 전에 청각, 후각, 촉각 등의 방법론이 움직일 여타의 공간이 현대한국화의 커뮤니케이션에는 배제되어 있는 까닭이다. 게다가 현대한국화는 매체적 한계로 인해 3차원 공간의 문턱조차 쉽사리 넘어설 자신이 없어 보인다. 두 번째 논의꺼리다. 현대한국화에서는, 커뮤니케이션에서 수용자가 되는 대상의 범위들이 매우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는 소외의 양상에 직면한다는 부분을 생각해보자. ...
천병민_기억속으로의 삶_장지에 수간채색_190×99cm_2005
‘이미지만으로 시도하는 커뮤니케이션’이 한계라면 어찌 해야 될 것인가? 어떠한 당면과제를 현대한국화는 지고 있을까? 그런데 한국화가 아닌 회화 역시 그렇지 않던가? 그럴 수 있지만 그것은 한국화의 경우보다 자유롭다. 한국화는 여타의 2차원 회화처럼 이미지만으로 미술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데에 구속되어 있으면서도 또 다른 틀거리를 존속시켜야 한다는 이중의 딜레마를 안고 있다. 최소한의 한국화 (전통)의 틀을 존속시켜야 한다는 의무적 행위가 그것이다. 더욱이 문제는 현대한국화가 아예 현대미술로 불리기를 원하는 상태에서 변모될 창작에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지만 현대한국화가 전통의 현대화라는 업보 같은 화두를 내팽개쳐 버린다면 그것은 끝내 한국화가 아닌 이상야릇한 보이지 않는 경계에서 서성이는 정체불명의 존재가 되어 버린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아무리 실험적인 태도라 하더라도 원판에서 찍혀지는 행위를 통해 구현되는 것이 아닐 경우 우리는 그것을 판화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면서 비교해 볼 만하다. ... ● 결론적으로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한, 현대한국화가 당면한 일반 소통론은 이미지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고 위험할 수 있지만 탈 평면에 대한 실험적 모색에 관심을 가져보는 일이다. 이것은 창작자와 전문가 그룹으로 설정된 커뮤니케이션 구조의 폭을 일반 관객으로 보다 넓히는 일에도 기여할 것이다. 그러나 현대한국화가 최소한으로 존속시켜야 할 매체적 특성은 저버리지 않아야 한다는 의무론도 신경 써야만 할 것이다. 현대미술을 하는 한국화 전공의 작가로 자리매김 받기를 원하는 작가들이라면 나는 차라리 그들에게 현대미술에의 자유를 찾아 떠나시라고 권하고 싶다. 현대미술은 근본적으로 실험과 새로움을 반기고 남들과 다른 독자적 조형어법에 후한 점수를 주는 아방가르드 정신에 아직도 경도되어 있는 장이기 때문에 전통에 한쪽 발을 담그고 찾아 나서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한국화가로 존속하기를 작가들이 원한다면 한국화의 최소한 매체를 존중하고 이를 지키면서 좀 더 파격적이고 실험적인 모색을 감행해야만 할 것이다. 물론 화면안의 이미지 탐구로 현대한국화는 지속될 수 있지만 ‘그렇고 그런 식의 변화와 모색’을 진행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작가들은 인정을 해야만 할 것이다.
이창훈_야-취마(夜-醉馬)_장지위에 분채_227×181cm_2005
IV. 현대한국화의 소통 확장을 위한 메타매체 소통론, 거시적, 미시적 접근 ● 일반소통체계와 연관해서 살펴본 현대한국화의 매체적 특성의 딜레마 논의는 필자가 거창하게 이름 붙인 ‘메타매체 소통론’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이것은 역사, 제도를 둘러보는 예술사회사의 관점이라는 거시적 접근은 물론이고 개별적인 작가의 흐름들을 면밀하게 분석해 보는 미시적 접근을 다 포함하는 광범위한 주제이다. 그런 까닭으로 여기서 필자는 두 관점을 함께 수용하되, 논의의 주 대상인 그룹 ‘오늘과 하제를 위한 모색전’을 중심으로 현대한국화의 소통확장을 위한 모색들을 살펴보는 것으로 글의 내용을 한정하고자 한다. 우선 필자의 작명 ‘메타매체 소통’은 우리들에게 익숙한 ‘메타커뮤니케이션’에서 따온 것으로 meta라는 용어가 상기하는 ‘사이에, 뒤에, 넘어서’라는 뜻과 같이 ‘매체로부터 출발하지만 매체의 한계 너머의 범주를 포함하는 소통’을 의미한다. 현대한국화를 대상으로 하는 우리들의 메타매체 커뮤니케이션은 따라서 ‘거시=구조, 제도적/ 미시=행위, 상호작용’이라는 기존의 절대구분을 지양하고 통합하는 차원에서 논의될 것이다. 다음의 도표는 ‘구조와 행위’를 이분화해 온 기존의 사회학 체제를 부정하고 이를 교차연계(cross-link)하려는 사회학자 무젤리스(Mouzelis)의 도식을 차용하고 현대한국화의 커뮤니케이션을 이해하기 위해 괄호 안의 내용만 필자가 삽입한 것이다. ● 이 도식은 구조와 행위자가 다양한 수준들 사이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 점은 사실 ‘구조/행위’라는 하나의 이분법 속에서는 체계적으로 사고하기 어려운 것이었듯이 현대한국화의 매체적 딜레마를 언급하는 필자의 편협할 수 있는 ‘일반 소통론’ 논의의 전개와 확장을 위해서 매우 유효한 모델이 된다. 따라서 여기서부터의 논의는 매체적 딜레마를 넘어서서 현대한국화 커뮤니케이션 이해를 위한 구조와 행위 나아가 거시적, 미시적 관점들을 통합해 보려는 차원을 상정한다. 특히 창립 21주년을 맞는 미술 창작단체를 연구하는 차원의 이 글은 당연스레 거시적 행위자(그룹 ‘오늘과 하제를 위한 모색전) 분석과 미시적 행위자(그룹의 구성인인 개별창작자들) 분석은 물론이고 역사를 포함하여 사회문화의 상황을 최소한 점검해야 할 거시적인 제도적 구조 차원과 현대 한국화의 상업적 유통과 미학적 소통이라는 미시적 제도적 구조 차원을 두루 살펴야 할 의무를 지닌다. 하지만 할당된 지면과 본 논의 성격의 한계상 구조에 관한 한 그룹의 창립 당시의 사회문화사와 더불어 그룹이 갖는 의미를 매우 축소적인 입장에서 살펴보고 필자가 실제적으로 추가로 요청받은 그룹내 구성인들인 개별창작자들의 작품분석에 치중하고자 한다.
이동환_그가 지나간 자리를 더듬어 본다._장지에 수간채색_130×162cm_2005
IV-1 ‘오늘과 하제를 위한 모색전' 창립 당시의 사회문화적 상황과 그룹의 의미 ● 오늘과 하제를 위한 모색전의 창립전 서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현재 한국화가 당면한 문제는 기존적 전통 문화에 새로운 문화가 유입됨으로써 야기되는 문화적 혼란과 갈등에 있다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기존적인 것의 고답적인 수용이나 반발의 흑백 논리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들을 원초인으로 보고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여러 상황들에 대한 주의 깊은 관심을 반영하고자 했다. 그럼으로써 한국화가 빠지기 쉬운 관념에서 벗어나 우리의 현실을 피상적으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체험을 통해 얻어진 삶의 느낌과 감동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 그룹의 창립전이 1985년임을 상기할 때 서문에서 언급되는 ‘전통 문화에 유입된 새로운 문화’는 결국 60년대 말-70년대부터 도입되어 80년대 전반기에 팽배해 있던 모더니즘의 논리와 비록 전면에 가시화되지 않았지만 80년대 말부터 봇물을 터뜨린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이종생성 문화의 초기적 형태를 상징한다. ...
이구용_산-공명_장지에 채색_115×210cm_2002
IV-2 현대한국화그룹의 메타매체 소통론 ● 매체적 특징이 유발하는 현대한국화의 기본 혹은 최소한의 필수 조건은 무엇인가? ... 필자의 견해로는 최소한의 매체적 조건과 한계를 준수하면서 벌여야 하는 현대한국화의 미래지향적 커뮤니케이션 모델은 일차적으로 이미지만으로 소비하는 한국화의 관성을 벗는 일이다. 미술을 이미지로만 소통하려는 시도는 여타의 새로운 시도에의 의지를 좌절케 하기 십상이다. 현대한국화가 감당하는(혹은 감당할) 메타매체 소통이란 매체의 최소 한계를 안고 끊임없는 탈주를 벌이는 모색인 것이다. 그런데 한국화 전공자가 일탈하는 매체 사용으로 현대한국화의 장에 논의거리를 제공하고 나아가 변화의 지평을 넓힌다고 한다면 한국화의 공식적 수련기를 전혀 거치지 않은 작가가 도모하는 창작에의 한국화적 지향성을 우리는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 관습상 이러한 작가를 현대한국화가로 정초시키는데 있어 우리는 못내 주저한다. ... 소통에 관한 한, 앞서의 두 틀(형식적인 2차원의 틀과 정신성이라는 무형의 틀)을 항상 부여잡고 끝없이 탈주하려는 노력을 시도하는 것이 우리들의 메타매체 소통이 지향하는 바이다. 이것을 현대한국화 그룹으로 정초화 하려는 ‘오늘과 하제를 위한 모색전’에 국한시켜 언급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이 글 말미에 부록의 형식으로 제공하는 그룹 내의 개별 작가들의 끊임없는 자기모색에서 비롯될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들이 형식적, 정신적 틀 밖을 지향하든 그 틀 안을 지향하든 관습화되고 익숙한 형식으로 머물러 있는 자아의 정체적 위상으로부터 끊임없이 탈주하는 한 현대한국화의 미래적 커뮤니케이션은 희망이 있을 것이다.
문희돈_별 다섯개_종이에 혼합재료_140×140cm_2005
V.나오는 말 - 현대 한국화 그룹의 미래지향적 소통, 매개자 역할론 ● 지금까지 ‘오늘과 하제를 위한 모색전’과 관련한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우리들 논의의 모든 시도는 수용자를 설정(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하고 있는 창작의 주체 입장에서 논의되어 왔다. 이제 마지막 논의는 수용자로 돌아온다. 커뮤니케이션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언제나 수용자인 까닭이다. 미술의 일반 소통은 창작자가 일정한 전시공간을 찾아 나선 수용자를 대상으로 벌이는 행위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영화관 의자에 몸을 묻고 연속되는 이미지에 마음을 맡기거나 컴퓨터 앞에서 게임에 열중하는 것이 전시장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것 보다 더 나은 대다수의 불특정 다수를 전시의 공간으로 불러 모아 우리 커뮤니케이션 놀이를 해 보자고 보채기에는 역부족인 것이 사실이다. 미술의 이종형태가 현대인들에게는 더 수용하기 수월할 뿐 아니라 기호에 맞기 때문이기도 하다. 순수를 지향하는 미술작품의 소통이 창작자와 다른 창작자 그리고 기자나 평론가, 미술매개자들 이라는 전문가들 사이에서 집안 잔치로 끝나는 상태의 악순환을 지양하고 효율화를 도모하기 위한 커뮤니케이션의 실제에는 매개체의 역할론이 강하게 부각된다. 이것이 개인이 아닌 그룹의 활동으로 확장되어 있는 경우에는 더 더욱 이러한 매개체의 역할이 커뮤니케이션의 효율적 가능태를 위해서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최익진_낙원도-48_석회에 채색, 나무에 염료_60×60cm_2005
현대미술의 장에서 개인의 창작자가 운위하는 영역과 비교해서 마음과 생각이 저마다 다른 이들이 서로의 필요성에 직면하여 꾸려낸 그룹 차원의 관객과의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실제는 개인과 그룹, 둘 모두 같은 목적의 성취 점을 지향한다고 하더라도 서로 그 차원을 달리 한다. 그것은 현대한국화 그룹에서도 예외는 아닐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증폭되는 차이를 생성시킨다. 늘 전통과 현대의 의미를 되뇌는 현대한국화 단체의 고민은 다른 미술창작단체에 비해 ‘전통의 현대화’라는 화두에 집착해야 하는 이중의 딜레마를 안고 있을 뿐 아니라 개인 창작자들의 전통에의 배반과 탈선을 주체적인 헤게모니로 장악해야만 하는 과제를 늘 부여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한국화 그룹은 스스로 미술매개체의 역할을 감당함으로써 늘 코앞에 있는 위기로부터 벗어나야 할 것이다. ● 그룹이 그들의 정기적 전시를 통한 소통의 방식을 고수한다면 개별 회원들의 개인전시를 다른 회원들과 함께 하는 자리에서 조망하고 비평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 지속시키는 것이 단체의 결속은 물론 보다 진전된 관객과의 소통 모색을 위해 필요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그룹 안에서 최소한의 소그룹 차원 육성도 고려해 볼만한 대상이다. 그룹 스스로 담당하는 매개체 역할은 보다 능동적인 커뮤니케이션 활동의 수립을 위한 출발점이 된다. 일반 대중을 위한 교육프로그램, 타 단체와의 연대 같은 비교적 구식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매개체 역할이 정기전 같은 형태 속에서 생색내기로 유지된다고 할지라도 여태껏 한 번도 없었다면 지속적인 계획 아래 그 출발에 대한 실천도 모색되어야 할 것 같다.
조성원_하늘_한지에 채색_130.3×346cm_2005
1985년 창립 당시, 오늘과 하제를 위한 모색전‘의 출발은 ’개별 작가들 간의 소통과 협력이 주요문제’였다. 정기전을 준비하면서 작가와 작가간 커뮤니케이션의 양태로 출발한 것이다. 당시에는 창작에의 문제의식을 ‘무모한 실험적 경향이나 현학적, 정신적 경향보다는 한국화의 기본을 견지한 다분히 소재적이고 구상적인 경향’을 통해 개진해 보고자 하는 소박한 취지에서 비롯되었지만 최근 화단의 변모 속에서 요구되는 것은 진취적인 실험그룹으로 거듭나야만 하는 당위성 같은 것이다. 회원 모두 ‘오늘과 하제를 위한 모색전’이 현대한국화 그룹인 것으로 규정하는 것에 부정적인 견해가 없다면 한국화의 전통을 끌어안고 그것의 현대화를 위해 끊임없이 모색해야 하는 당위성 속에서 ‘작가와 작가간 소통’을 넘어서서 ‘작가와 매개체간 소통’, ‘작가와 불특정다수와의 소통’ 모색이라는 과제들을 꾸준히 꾸려나가야만 할 것이다. 그룹 차원에서의 전통의 현대화란 화두가 지속적인 움직임의 차원으로 계승되지 못하고 연간마다 형식적인 정기전으로 그룹의 역사를 키워간다면 독설이지만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그룹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이 나을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원론은 명예회원 전환 장치와 신입회원 영입 같은 조직개편, 발전적 방향을 꾸준히 도모하면서 20년사에 이른 ‘오늘과 하제를 위한 모색전’에게 해당되지는 않을 것이다. ● 현대한국화 그룹의 미래 지향적 소통은 그룹 내의 개별체들을 적극 끌어안고 매개체 역할을 스스로 감당하면서 초 집단주의의 운동의 차원을 창출하는데서 발현될 것이다. 여기에 그룹 내의 개별자들 상호간의 지속적인 간섭이 전제됨은 물론이다. ■ 김성호
임종두_飛天_한지에 분채_143×210cm_2005
지금, 한국화단에서의 그룹전의 의미와 전망 시작하면서 ● 미술사를 들여다보면 많은 미술사조들이 명멸하면서 그간 인류의 미술사와 정신사를 지탱하고 이끌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때로는 처음부터 그룹차원의 결속력과 이념을 가지고 출발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그룹은 처음에는 유사한 이념을 가진, 또는 작품의 성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연대해서 작품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고 그들의 활동을 당대의 비평가나 미술사가들이 지켜보면서 어떤 이름을 붙여주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아주 강한 결속력과 이념으로 뭉친 그런 그룹운동들도 찾아볼 수 있다. 우리미술사에서도 그룹차원의 활동은 많은 예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이들 모임의 형성배경을 보면 유럽이나 기타 지역의 미술사에서 등장하는 그룹운동과는 좀 다르다는데서 우리미술사의 한계이자 미술운동의 취약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조선시대말 여항문인들의 자유분방한 작화활동을 그룹운동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고 추사와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도 이런 예에 속한다 할 것이다. 또한 진경산수를 창안하고 이를 발전시켜나간 겸재와 그의 화맥을 잇는 경우도 그룹운동으로 볼 수 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활동은 특정한 유교적 이념과 미학을 전제로 했을 뿐 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유대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그룹과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 ● 한국미술사에서 그룹운동의 실체 ● 한국화에 국한해서 살펴보면 그간 많은 미술단체와 그룹운동이 명멸해 왔다. 특히 서구미술과 한국의 전통회화가 만나면서 존폐의 기로에 까지 몰렸던 전통회화의 경우 사승관계나 화숙을 중심으로 한 그룹이 주를 이루었다. 이는 도제교육이 성행하고 무릎제자라는 말이 통용되는 전통화단의 습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전통적으로 시서화를 중시한 유교적 전통과 선비정신을 골간으로 한 전통 한국화의 세계는 스승을 중심으로 모임을 갖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런 개념에서 본다면 추사의 중국문인화 중심의 이념미를 넘어 수예론을 강조하면서 조선의 문인화 전통을 새롭게 일궈나간 1847년 조희룡이 중심이 되었던 벽오시사를 들 수도 있을 것이다. 이후 많은 작가들의 이합진산을 통해 한국화의 전통을 쇄신하고 계승하면서 한국전통화단은 진화를 거듭해 왔다. 이후 근대적인 의미에서 창설된 그룹은 다름 아닌 서화미술협회였다. ...
박수인_공간-生_한지에 먹, 채색_60×200cm_2005
글을 나오며- 소통을 위한 전제들 ● 이상과 같이 개략적으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화단의 관객과의 소통과 읽히기 위한 시도는 그룹운동의 전개를 통해 나타났다.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한국화의 진흥이나 관객들과의 소통에 중심을 두었 다기 보다는 다분히 화단정치사적인 측면에서 출신학교간의 세 과시 또는 세 불리기의 측면을 아울러 가진다. 아니 후자가 더 중시되었다는 표현이 정확할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이는 유화계의 입장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 ● 게다가 지금까지의 미술운동이나 그룹운동은 소비자로서 관객들을 대상으로 하기보다는 공급자 중심의 일방적인 공급이었다. 소비자들은 소비할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아무리 좋은 것, 귀한 것이라 해도 소비가 이루어 질 리 없다. 물론 예술이라는 것이 관객의 기호와 관점에만 봉사하다보면 정체되거나 후퇴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혼자 앞으로, 앞으로 나가면 관객과의 거리는 더욱 멀러지고 말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그룹운동은 예전처럼 앞만 보고 달리는 기관차 같은 추진력만 가지고는 역부족이기 십상이다. 21세기는 정보화 사회인 동시에 유목의 시대라고 한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은 소통과 이해를 전제로 한다. 일방적인 의사결정 구조는 쇠퇴 하고 쌍 방향의 인터렉티브한 소통의 시대인 것이다. 따라서 그룹운동이나 미술행위도 작가 자신만의 영역이란 이기심으로부터 탈피하여 서로의 것, 공유하는 것이란 인식을 전제로 하여야 할 것이다. 특히 일반적으로 언어영역처럼 공통된 기호와 약속된 부호로서 상호 의사소통이 되는 것과 달리 시각언어는 작가개인에 의해 창안된 기호라는 점에서 소통에 일정 한 한계를 지닌다. 따라서 그룹운동이건 개인의 예술적 행위이건 간에 시각적 의사소통을 위한 문화적 능력의 배양이라는 측면에서의 그룹 활동이 전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각언어의 해독능력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시각문화교육의 중요성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 이를 위해서 개인적 행위의 표현과 그 사회적 확장으로서의 의사소통의 차이에 대한 검토와 시각적 의사소통과 문자적 의사소통과의 비교를 통해 시각적 의사소통의 특성을 규명함으로서 가능 할 것이다. 물론 이런 일은 창작자이자 공급자인 시각문화의 생산자로서의 화가들의 몫이 아니라고 주장 할 수 도 있겠지만 교육적 관점에서 본 시각문화를 통한 의사소통이란 의미의 단순전달이 아니라 의미의 생산과 교환이라는 구성적 특성이 강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적 의사소통은 시각적으로 읽고 쓰는 시각적 문해력(visual literacy)을 포함하는 적극적인 개념으로, 시각문화의 산물을 매개로 이해, 소통할 수 있는 구체적 의미의 실천과정에 가장 필요한 능력이다. 따라서 창조자들은 소통과 관객의 이해부족을 그들의 탓으로만 돌릴 것이 아니라 시각적 의사소통을 중심으로 관객의 문화적 능력을 향상시키려는 노력도 아울러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정경식_想 想_한지에 채색_112×145m_2004
과거의 예술가들은 일방생상과 소수의 애호가나 패트론의 힘으로 자신만의 예술영역을 지켜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예술가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창조적인 능력과 더불어 표현 가능한 기술력 그리고 자신을 마케팅 할 수 있는 능력과 함께 관객을 이해시키고 설득시킬 줄 아는 능력이 더불어 요구되는 시대인 것이다. 또한 미디어의 발달로 종래의 시각언어인 회화나 조각은 여타의 새로운 시각언어와 기호들에 의해 그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이를 누군가는 회화의 위기라고 정의하였지만 위기는 기회라는 점에서 이 기회를 활용할 방법의 모색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유고문화권에서 자라고 아직도 농경사회의 전통이 깊이 남아있는 한국화의 지지계층들에 대한 재교육과 이해를 확대시키려는 노력도 아울러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들은 아직도 전통적인 지필묵에 의한 회화나 사군자에 아련한 추억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오늘날의 한국화란 격식과 예법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전통적인 한국화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현재 한국화가들이 갖고 있는 전통적인 기법이나 격을 파괴하는 것이 새로운 것이라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전통적인 교육과 기법의 연마도 중요할 것이다, 또한 이를 토대로 새로움을 추구하는 자세 즉 법고창신의 자세야 말로 소통과 이해를 얻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다중과의 소통을 원한다면 학연이나 지연에 의한 그룹운동보다는 조형적 이념이나 미학적 공통관심사를 토대로 치열하게 토론하고, 소통하는 자신과의 소통, 작가 들 간의 이해와 소통을 골간으로 관객과의 소통을 시도하는 것이 옳은 방향이 될 것이라 감히 생각한다. ■ 정준모
가져온 곳: [설믜 서기환]
카페
'우리나라 畵壇'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삶과 예술은 경쟁하지 않는다 (1) (0) | 2005.08.19 |
---|---|
[스크랩] 삶과 예술은 경쟁하지 않는다 (2) (0) | 2005.08.19 |
[스크랩] 함수연 회화展 -6- (0) | 2005.08.19 |
[스크랩] 오늘과 하제를 위한 모색/책임기획_최익진-16- (0) | 2005.08.19 |
[스크랩] 주제가 있는 작은 갤러리 -20- (0) | 2005.08.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