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우리나라 畵壇

[스크랩] 나혜석 & 백남순

鶴山 徐 仁 2005. 8. 19. 14:20
 

개화가 시작된 근대 유화, 그 화폭을 섬세함으로 채우며 여류화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불꽃 같은 생애를 통해 이국적이며 새로운 표현 감각을 선보인 나혜석(1896~1948), 자유분방한 필치로 독자적인 양식을 화폭에 담은 백남순(1904-1994)이 바로 그들이다.
당시 이들이 펼쳤던 예술 세계는 근대 유화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으면서 ‘신여성'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나혜석
유화 유입의 1세대로 고희동, 김관호, 김판영, 그리고 최초의 여류화가 나혜석을 손꼽는다. 나혜석의 등장은 고희동에 의해 공식적으로 서양화의 효시가 보도된 3년 뒤 1918년이다. 그리고 그 뒤 1920년대 초에 백남순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여성이라는 신분으로 사회적 활동에 제약을 많이 받았던 이들의 작품 활동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같은 제약은 1896년 기독교의 전파로 선교사들에 의해 근대 학교의 교육이 시작되면서 개화의 분위기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며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나혜석과 백남순은 동경 여자 미술대학으로 유학을 떠나기도 했고, 파리에서 미술 공부를 하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근대의 여류화가인 나혜석과 백남순은 국내 여류 화단의 문을 연 시초이자 시대를 대표하는 ‘신여성'이었던 셈이다. 특히 나혜석은 미술은 물론 문학과 사회 활동 등을 통해서 여권을 주장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는 앞서 등장한 남성 유화가들이 시대의 냉대를 참지 못하고 끝까지 작품 활동을 펼치는 의지를 보였다.
화가로서 나혜석의 절정기는 1927년 이후, 세계 일주와 프랑스 파리에서의 체류 기간 동안에 그려진 작품들을 통해서이다. 파리는 그녀의 예술적 감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곳에서 보는 풍경 모두가 그녀의 예술적 영감에 원천지가 되었다. 몰론 그녀가 단순히 이질적인 문화에만 관심을 보였던 것은 아니다. 화가로서 그녀는 당시 파리 화단에 등장한 새로운 미술 운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면서 작품 세계에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나는 인형이었네, 그네들의 노리개였네.
아아- 소녀들이여 깨어서 뒤 따라 오라, 일어나 힘을 발하여라..
-나혜석의 시 <노라> 중에서


나혜석과 백남순은 각각 새로운 것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지만, 나혜석이 비운의 삶으로 예술적인 완성을 거두지 못한 반면, 백남순은 비교적 근래인 1980년까지도 미국에서 붓을 쥐었다.
 
(깡깡) 나헤석, 1940,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나혜석과 백남순은 각각 새로운 것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지만, 나혜석이 비운의 삶으로 예술적인 완성을 거두지 못한 반면, 백남순은 비교적 근래인 1980년까지도 미국에서 붓을 쥐었다.

나혜석과 백남순이라는 여류화가들의 등장은 화단에 적지 않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특히 최초의 여류화가로 불리우는 나혜석이 등장하며 신문에 결혼 광고를 내기도 했던 그녀는 가는 곳마다 많은 화제를 몰고 다녔다. 특히 서울에서 열린 최초 개인전의 주인이 되었던 전시회장 자리에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면서 유화에 대한 인식을 재고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선죽교> 나헤석, 1933년경, 캔버스에 유채, 22.5×31.5cm, 국립현대미술관
이후 1927년부터 2년간 프랑스와 스페인 등지를 여행한 그녀는 서구의 새롭고 다양한 화풍들을 접할 수 있었다. 그녀는 초기 유화가 유입될 무렵 일본의 일방적인 영향력에서 벗어나 서구 미술계와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했다.
나혜석이 파리에 머물게 된 이유는 백남순의 영향이 무엇보다도 컸는데, 백남순은 이미 파리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고, 파리로 여행을 온 나혜석이 그 영향으로 체류를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후 파리에서 생활하는 동안 남성과의 스캔들로 인해 귀국 후 그녀는 이혼이라는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게 되며, 이와 함께 그녀의 예술적 생애 또한 파탄의 경지에 이르고 만다.
 
백남순은 여성 최초로 파리에 유학을 화가로, 미국 유학생이었던 화가 임용련과 결혼했으며 파리살롱 초대 등에 초대를 받는 등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쳤다.
그녀의 작품은 현재 모두 유실되고 당시 작품으로 현존하는 것은 유일하게 <낙원>이라는 단 한 점만이 있을 뿐이다. <낙원>은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8폭 병풍으로 그려진 대작으로, 서양식 건물과 풍경이 혼합되면서 독특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작품에서는 동서양의 만남으로 환상적인 낙원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며, 이것은 원죄 이전의 에덴 동산을 한국적 시각으로 그린 듯하다. 즉, 서양의 새로운 물결을 소화하면서도 우리의 전통을 지키려는 백남순의 노력이 짙게 배어 난다.
또한 백남순의 그림에는 종교적인 상징이 숨어 있다. 작품 <승리>는 파스텔 톤으로 채워진 작품 안에 십자가와 종려나무 가지, 촛불 등이 바로 그 같은 요소들이다. 또한 십자가의 중앙에 있는 하트 모양은 심장의 상징으로 예수의 죽음을 의미하며, 예수의 죽음은 결국 승리로 귀결된다는 밝은 분위기의 내용이다.

..백남순, 1990, 패널에 아크릴릭,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낙원> 백남순, 1937년경, 캔버스에 유채, 172.8×373cm, 호암미술관
 
나혜석 작품의 표현 특징

나혜석의 작품이 가지는 특징 중 첫 번째는 형태의 단순화에 있다. 자화상에서 그녀는 팔과 몸통, 어깨 등의 형태를 세세히 모사하지 않고 과감하게 생략하는 기법을 사용했다.
만일 전통적인 회화 기법으로 그렸다면 팔이나 어깨 등을 그릴 때 옷주름이나 근육 등을 묘사했을 것이다. 하지만 야수파 화가들은 형태의 사실적인 묘사보다는 색채를 통해서 내면의 모습을 담아 내고자 했다. 그들에게는 형태를 세세히 묘사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형태를 세세히 묘사하지 않고 과감하게 생략, 단순화시킴으로써 오히려 주제를 더욱 부각시키는 효과를 노렸던 것이다.
나혜석 역시 그런 야수파 그림들의 표현법을 따라서 작품의 주제나 색채를 강조하기 위해서 형태의 세세한 묘사를 생략해서 형태를 단순화시켰던 것이다.
나헤석 작품의 두 번째 특징은 강렬한 색채를 통한 감정 표현이다.
야수파 화가들은 색채를 이용해서 감정을 표현하고자 했다. 색채 속에 화가의 감정을 담는 것이다. 나혜석의 자화상 역시 마찬가지이다. 자화상에서 배경은 물론이고 옷을 강하고 어두운 암청색으로 채색하고 있고, 얼굴, 목, 손 부분은 밝은 색으로 부각시키면서 상대적으로 어두운 느낌을 강조하고 있다. 얼굴 표정 역시 밝지 않은데, 이처럼 무겁고 가라앉은 분위기는 파리에서 귀국한 후 그녀가 겪게 되는 비운의 삶을 표현하는 듯하다. 특히, 눈언저리의 표현은 그녀의 심정을 잘 대변하면서 암울한 현실을 담아 내고 있는데, 이것 역시 색채 속에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을 담아 내는 야수파 화가들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헤석은 빠른 붓놀림을 통한 거친 표현을 추구했다.
이를 통해 그녀는 화면의 질감을 거칠게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활달한 터치를 통해 작품은 보다 동적이고, 강렬한 생명감이 있는 살아 있는 표현을 구사하는 것이다.

<자화상>

<나부> 나혜석, 1928, 캔버스에 유채, 73×59cm, 호암미술관

<영광> 백남순, 1987,
패널에 아크릴릭,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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