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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 라 톤
Platon : B. C 428 - B. C 427년 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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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젊을 때 소크라테스에게서 배우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그의 사상은
소크라테스의 연장이며, 발전으로서, 그의 저서는 모두 소크라테스가 주인공으로 된 변증론에 의한 《대화편》이어서 그와 스승과의 학설을 구별하기
힘들다. 스승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그는 정치가로서의 꿈을 버리고 정의를 가르치기로 결심, 동료들과 메가라에 도피하여 있다가 이탈리아를
여행하였다. 키레네학파로부터 이데아와
변증법의
기초를 얻고 피타고라스학파에 접하여 실천적 정신과 실생활에의 흥미를 얻은 뒤 그의 독자적인 사상을 반성하게 되었다. 그 사이 《변명》 《크리톤,
Kriton》 《라시스, Laches》》 등을 쓰고 40세에 귀국하였으며, 이어 《고르기아스》 《대힙피아스) 《소힙피아스》 등을 썼다. 그는
자신의 이상국가를 실현해 보고자 친구인 디온의 권고로 시칠리아의 참주(僭主) 디오니소스의 초청에 응했으나, 그의 과두정치를 비난함으로써 분노를
사 노예로 팔리기까지 하였다. 뒤에 그의 저작을 본 키레네 사람에 의해 해방되어 귀국, 아카데미아 학원을 건립하고 제자 양성에 전력하면서 저작에
몰두하였다. 《향연, 饗宴》 《파이돈, Phaidon》 《국가론》 《파이드로스, Phaidros》 등 주요 저술이 여기서 이루어졌고, 이 학원은
529년까지 계속되었다. 대학(University)의 처음 형태인 '아카데미(Academy)'라는
말은 여기에서 연유한다.
그는 인간의 영혼이 육체와 결합된 충동적이며,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는
정욕(情欲)과, 육체와 결합되지 않은 불사적인 순수한 이성(理性)으로 되어 있다면서, 이성은 매우 순수한 것으로서 이 세계의 배후에 있는 완전
지선(至善)의 실체계인 이데아(Idea)를 직관할 수 없으나, 세상에 탄생하여 육체 속에 들어감으로써 이데아를 잊고 있다고 하였다. 이 잊었던
이데아를 동경하는 마음이 에로스(Eros)이며,
현상을 보고 그 원형인 이데아를 상기하여 인식하는 것이 진리라고 하였다. 그리고 인간의 이성적인 부분의 덕이 지혜(Sophia)이며, 정욕적인
부분의 덕을 절제(Sophrosyne), 이성의 명령에 복종하여 정욕을 억압하는 기개(氣槪 : Thymoeides)의 덕을 용기라고 하였다.
정의(定義 : Dikaiosyne)란 모든 덕이 알맞게 그 기능을 발휘할 때의 상태를 말한다. 그는 이러한 덕론을 통하여 인간 개인의 윤리학을
논하고, 그러나 정의의 실현은 개인의 덕을 달성하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여 사회 전체의 윤리설을 말하였다. 그것이 그의
국가론(Politeia)이다. 그는 국가를 개인의 확대로 생각하여, 개인에 있어서의 정욕의 부분이 농·공·상업의 서민, 기개 부분은 군인·관리, 이성 부분은 통치자라고 하고, 이는 당연히
선의 이데아를 인식하여야 하므로 '철학자가 왕이 되거나 왕이 철학을 해야 한다'고 하는 유명한 철인정치론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통치자의 교육제도와 방법에서 그의
교육학을 엿볼 수 있다. 이어 통치자의 사유재산 금지, 처자의 공유 등을 주장하고 전제정치, 과두정치, 민주정치 등 정체의 성립과 발전·결함
등을 날카롭게 지적하였는데, 오늘날까지도 주목할 만한 탁견이 담겨 있다. 그의 철학은 서양 관념론적 이상론의 비조로, 그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실주의와 함께 철학사에서 쌍벽을 이루고, 아카데미아학파 신플라톤주의를 거쳐 철학사에 결정적 영향을 주고 있다.
: 플라톤 철학의
기본 개념으로 동사 이데인(Idein : 보다, 알다)의 파생어로 원래는 '보이는 것', 모양·모습, 그리고 물건의 형식이나 종류를 의미하기도
했다. 플라톤 철학에서는 육안(肉眼)이 아니라 영혼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상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아이데스(보이지 않는 것)라고 불리며,
이성(理性)만이 파악할 수 있는 영원불변하고 단일한 세계를 이루어, 끊임없이 변천하는 잡다한 감각세계의 사물과는 구별된다. 생성하는
감각세계의 사물은 이데아를 본떠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그것은 진실한 존재가 아니고, 이데아야말로 진실한 존재, 즉, 우시아(實有)이며, 궁극의
진실을 추구하는 애지(愛知), 즉, 필로소피아(철학)의 궁극의 목적이다. '선(善)의 이데아'나 '미(美)의 이데아'는 이와 같은 이데아의
전형이다. 이데아는 대개의 경우 '자체'라는 말을 붙여 '미(美) 자체', '선(善) 자체'라고 말하는데 이는 보편적인 명사(名辭)가 있을 때
그 명사를 의미하는 보편자(普遍者)가 이데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데아설(說)을 비판할 때 가한
해석인데, 그 뒤에도 이 해석이 답습되어 이데아는 보편개념의 실체화 또는 개념실재론이라 하여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데아론의
참뜻은 소크라테스의 애지(愛知) 속에 그 연원(淵源)이 있다고 생각된다. 소크라테스에게 있어 인간적 지혜의 유일한 존재이유는 인간의
최대사(最大事)를 묻는 일에 있는데, 이 물음은 그 최대사가 아직 무엇인지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무지(無知)의 자각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애지는 이 근원적인 물음이며, 이데아란 이 애지가 끊임없이 근원적인 물음을 할 때 돌연히 나타나는 것이며, 묻는 자의 존재를 포함하여 이 세계
일체의 존재를 되물어 오는 진리 그 자체의 시현의 모습인 것이다.
:
동일률(同一律)을 근본원리로 하는 형식논리에 대하여, 모순 또는 대립을 근본원리로 하여 사물의 운동을 설명하려고 하는 논리로 동일률(同一律)을
근본원리로 하는 형식논리에 대하여, 모순 또는 대립을 근본원리로 하여 사물의 운동을 설명하려고 하는 논리. 이 말은 그리스어의
Dialektike에서 유래하며, 원래는 대화술이나 문답법이라는 뜻이었다. 일반적으로 변증법의 창시자라고 하는 엘레아학파의 제논은 상대방의
입장에 어떤 자기모순이 있는가를 논증함으로써 자기 입장의 올바름을 입증하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문답법은 소크라테스에 의해 홀륭하게 전개되고,
그것을 이어받은 플라톤에 의해 변증법은 진리를 인식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중시되었다. 근세에 와서 변증법이란 말에 다시 중요한 의의를 부여한 것은
I. 칸트이다. 칸트는 변증법(칸트의 경우 보통변증론이라고 번역되지만 원뜻은 마찬가지이다)을 우리의 이성(理性)이 빠지기 쉬운, 일견 옳은
듯하지만 실은 잘못된 추론(推論), 즉, '선험적 가상(假象)'의 잘못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가상의 논리학'이라는 뜻으로 썼다. 이와 같이
칸트에 이르기까지의 변증법이란 말은 어느 경우에서나 진리를 인식하기 위해 직접 또는 간접으로 유효한 기술 및 방법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오늘날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것처럼 모순율(矛盾律)을 부정하는 특별한 논리로 생각되지는 않았다. 이에 비해 변증법이란 것을 인식뿐만 아니라
존재에 관한 논리로 생각한 것은 G. W. F. 헤겔이었다. 헤겔은 인식이나 사물은 정(正)·반(反)·합(合)(정립·반정립·종합, 또는
卽自·對自·즉,자 겸 대자라고도 한다)의 3단계를 거쳐서 전개된다고 생각하였으며 이 3단계적 전개를 변증법이라고 생각하였다. 정(正)의 단계란
그 자신 속에 실은 암암리에 모순을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순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단계이며, 반(反)의 단계란 그 모순이 자각되어
밖으로 드러나는 단계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모순에 부딪침으로써 제3의 합(合)의 단계로 전개해 나간다. 이 합의 단계는 정과 반이 종합 통일된
단계이며, 여기서는 정과 반에서 볼 수 있었던 두 개의 규정이 함께 부정되면서 또한, 함께 살아나서 통일된다. 즉, 아우프헤벤(Aufheben
: 止揚 또는 揚棄)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존재에 관해서도 변증법적 전개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존재 그 자체에 모순이 실재한다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변증법은 모순율을 부정하는 특별한 논리라고 생각된다. 오늘날 변증법은 이와 같은 의미로 해석되는 것이 일반적이며, K. 마르크스 또는
F. 엥겔스의 유물변증법(唯物辨證法)도 마찬가지로 해석된다.
: 학문이나 예술에
관한 지도적이고 권위 있는 전문가 단체를 지칭하는 단어로 B. C 385년 플라톤이 아테네 북서쪽에 있는 영웅신(神) 아카데모스의 신역에
청년들의 심신을 수양시켜 국정에 공헌할 인물을 배출하려는 목적으로 세운 아카데메이아(Akademeia)에서 유래한다. 이 학원은
수사학교(修辭學校)로서, 플라톤이 이곳에서 가르치면서부터 아카데미학파(아카데메이아파)라고 하였다. 후에 이것이 전용(轉用)되어 문학·과학·미술
등의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 또는 학교를 의미하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1) 고등·중등 교육기관으로서의
아카데미 : 고대로부터 교육기관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유럽에서는 16∼17세기, 대학(Universitas)의 명칭이 일반화될 때까지
고등교육기관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17∼19세기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새로운 경향 또는 중등교육기관을 아카데미라고 명명하였다. 독일에서는
17∼18세기 귀족의 자제에게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가르친 리터 아카데미(Ritter Akademie)가 유명하다. 현재 유럽 각국에서는
과학·기술(항해·군사·농업·미술·음악 등)에 관한 고등훈련기관을 이 명칭으로 부른다.
2) 과학·예술전문가 단체로서의
아카데미 : 르네상스시대 이후 새로운 학문정신과 학문분야의 발전에 발맞추어 중세적 대학 외에 새로운 학자의 집단이 형성되었는데, 주로
귀족이나 왕실의 비호 아래 있던 이들을 아카데미라 하였다. 아카데미라는 명칭은 13∼14세기에 쓰이기 시작하여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15∼16세기에 이르러 융성기를 맞았다. 전형적인 것으로는 예문(藝文)학자들의 아카데미아 델라 크루스카(Accademia Della
Crusca, 1582), 과학자들의 집단으로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가 속하였던 아카데미아 나시오날 데이
린케이(Accademia Nationale Dei Lincei, 1603) 등이 있다. 그 후의 유명한 것으로 프랑스의 아카데미
프랑세즈(Academie Francaise, 1635), 아카데미 데 시앙스(Academie Des Science, 1666), 영국의
왕립학회(Royal Society, 1662) 등이 있다. 각국의 아카데미 설립은 근대문화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으며, 현대의 각 국가는
정부가 직접 아카데미를 설립하거나 보호정책을 써서 과학·문화·예술 등의 아카데미를 육성하고 있다. 아카데미는 문화공로자를 회원으로 하는
영예기관이기도 하며, 문화의 발전을 위한 연구촉진, 문헌간행, 국제교류 등의 활동을 한다.
:
'사랑'의 뜻으로 고대 그리스의 사랑의
신이며, 기원전 7~6세기 서사시에서는 무서운 힘과 예측할 수 없는 습격을 하는 신, 사랑의 쾌락과 미(美)의 신으로 생각되었다. 또 우주혼돈의
질서화의 원리라고도 하였는데, 이러한 사상은 파르메니데스 등의 철학자에게로 흘러들었다. 플라톤은 이 말이 원래 갖고 있던 성적 의미를 없애고 철학용어로 사용하였다.
그것은 나중에 플로티노스를 통해 신(新) 플라톤주의, 나아가서는 중세의 신비주의적 사랑의 개념으로 이어졌다. 플라톤에 의하면 에로스란
절대의 선(善)을 영원히 소유하려고 하는 차원 높은 충동적 생명력이다. 멸(滅)해가는 것은 그 본성으로서 될 수 있는 대로 영원불멸하기를
바라는데, 그것은 오직 생식(生殖)에 의해 낡은 것 대신 새로운 것을 남김으로써 가능하다. 이 하나의 아름다운 육체를 소유하고자 하는 사랑을
모든 육체의 미(美), 심령상의 미, 직업이나 제도의 미, 나아가서는 교육이나 예술, 철학상의 미에 대한 사랑으로까지 승화시켜, 마침내는 미 그
자체인 이데아의 인식에까지 이르는 데 에로스의 참뜻이 있다고 한다.
그러기 때문에 에로스는 인도철학의
바크티(신들의 경지에 이르는 열광적 절대귀의의 감정)나 불교의 자비, 유교의 인애(仁愛), 또는 그리스도교에서의 아가페나 필레오와는 구별되는,
가장 그리스적인 사랑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프로이트는 1920년 정신분석 용어로서 처음 이 말을 썼다. 그의 말에 의하면
에로스는 일종의 에너지와 같은 것이어서, 그 목적은 생명을 보존하고 추진시키는 데 있다. 그것이 성(性)의 본능과 결부될 때는 리비도가 되고,
자기 보존의 본능과 결부될 때는 자아(自我) 리비도로 나타난다. 또한, 그는 에로스를 생명의 극한이라고 한다면 그 반대의 극한은 죽음의
본능이라고 말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