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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12월 라빈 총리의 防韓이후 金泳三 대통령은 이스라엘의 군사·무기 체제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올해 들어 安企部와 모사드의 최고 책임자가 상호방문하여 정보협력을 비롯한 여러 가지 교류 방안을 의논했음이 이스라엘에서 확인되었다. 한국군의 고위층 인사들이 이스라엘을 찾는 횟수도 늘고 있다. 한국의 국방과학연구소는 이미 이스라엘의 기술지원을 받아 무인정찰기를 개발하기로 했다. 한국-이스라엘의 安保 협력을 촉진하고 있는 것은 북한-이란의 장거리 미사일 개발 계획이다. 북한은 노동1호와 대포동1호(이들 명칭은 韓·美측에서 붙인 것이지 북한이 그렇게 부르는 것은 아니다)를 이란의 자금지원에 의하여 개발하고 있다. 동해에서 발사실험을 한 적도 있는 노동1호는 설계 사정거리가 1천4백km. 대포동1호는 다단계 로켓과 고체 연료를 쓰는 대륙간 탄도미사일로서 사정거리가 4천km를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둘 다 아직 실전배치 단계엔 이르지 못하고 있다. 노동1호, 대포동1호의 개발에 대해서는 안기부와 모사드뿐 아니라 미국과 러시아 정보기관도 예의 주시하면서 정보를 교환하고 있다. 지난 92년 러시아정보기관은 북한에 들어가려던 러시아 미사일 과학자의 입국을 금지시키고 북한에서 활동중인 러시아 기술자들을 철수시켰다. 이들에 대한 조사에 의해 북한이 러시아 과학자들에게 4천km 사정거리의 미사일 개발을 의뢰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고 그 정보는 관련국에 의해 공유되었다. 이즈음 모사드는 安企部에 노동1호의 설계도 정보를 제공했는데, 이 마시일이 核탄두 운반용일 가능성을 높여주는 정보였다고 한다. 이스라엘은 지금 이집트, PLO, 요르단과 잇따라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시리아와는 협상단계에 들어간 상태이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인접국가와는 급속히 화해 분위기로 가는 마당에 이란이 잠재적 적국 제1호로 등장하고 있다고 그들은 보고 있다. 이란이 추진하고 있는 핵무기 개발과 북한이 개발하여 이란에 팔기로 한 핵폭탄 운반용 장거리 미사일이 결합되면 이스라엘에 대하여 엄청난 위협이 된다는 판단이다. 이란은 인구 6천만, 면적이 한반도의 8배인데다가 찬란한 문화적 전통을 갖고 있다. 현재는 이슬람 원리주의자가 정권을 장악, 對이스라엘 테러를 조종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의 파괴를 국가목표로 설정하고 있다는 것이 이스라엘 측이 시가이다. 국가 잠재력에 있어서 중동 제1인 이란, 그것도 과격한 원리주의자의 손에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이 들어가는 것을 국가의 존망을 걸고서라도 막겠다는 결의를 기자는 이스라엘 安保관계자들과의 연속 인터뷰에서 실감할 수 있었다. 防産부문의 협력 가능성 높아져 한국의 한 정보관계자는 『현재로선 이스라엘이 우리에게 매달리는 형편이다. 對北정보를 아무래도 우리가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한국정부는 지난해 12월 텔아비에 대사관을 개설했고 이스라엘은 1992년에 서울의 테헤란로에 그들의 대사관을 재개했다. 1973년 제1차 오일 쇼크 직후 한국정부가 아랍 산유국가 들로부터 석유를 안정적으로 사들이기 위해 부득이 이스라엘과의 외교관계를 냉각시킨 이래(그 뒤 이스라엘은 駐韓대사관을 철수, 日本대사관이 한국 관련 업무를 代行해왔다) 20년만에 두 나라는 다시 밀월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현 단계에서 한국과 이스라엘은 對北정보 부문에선 이미 협력체제를 가동시키고 있다. 그 다음으로 협력 가능성이 큰 분야로 꼽히는 것은 이스라엘의 독창적인 무기체제의 수입 및 기술이전 부문이다. 특히 군사 대치상황이 한국과 비슷한 이스라엘의 군사정보수집체계에 대해 한국 측은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스라엘의 국영 放産업체 라파엘社도 이스라엘 정보시스팀을 한국에 수출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담당부서를 조직하는 등 의욕을 보이고 있다. 문제는 미국의 태도이다. 무기체제에서 한국과 이스라엘이 협력하는 것을 한국군이 미국에 대한 의존에서 탈피하여 독자성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으로 해석하여 견제로 나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년간 30억 달러의 미국원조(그 중 18억 달러는 군사원조)를 받으면서도 군사부문에선 自主노선을 걷는 데 성공한 나라다. 이스라엘이 그런 노하우를 한국에 전하여 바람 나게 할지도 모른다는 경계심을 미국이 갖게 된다면 복잡하게 될 것이다. 그 반대로 이스라엘의 협력을 발판으로 삼아 미국內 유태인 세력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결국은 한국정부가 하기 나름일 것이다. 대학살 박물관에서 이집트 외무장관 암리 무사가 1994년 8월에 이스라엘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유태인 학살 박물관(야드 바셈) 참배를 일정에서 빼달라고 요구하여 문제가 생긴 적이 있었다. 주요 방문객들은 한국에서 국립묘지를 참배하는 것과 같은 격으로 야드 바셈을 방문, 조의를 표하는 것이 관례다. 무사 외무장관은 페레스 이스라엘 외무장관과 이스라엘 의회에 진출한 아랍계(이스라엘 국적) 국회의원의 간청을 받아들여 결국 참배를 하긴 했으나 추모의 방에 꽃다발을 바치는 의식은 따르지 않아 이스라엘 국민들의 비난을 받기도 했었다. 기자는 일부러 그 방에 들어가 보았다. 「추모의 방」입구에서는 경비원이 반원구형(半圓球型)의 종이 모자를 나눠준다. 머리 뒤꼭지에 눌러 쓰고 앞을 보니 「영원의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바닥에는 22개 나치수용소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영원의 불」앞에는 나치 수용소에서 모아서 가져온 학살자 유골들의 재가 들어 있는 곽이 놓여 있었다. 넥타이 안 맨 국회국방위원장 대학살 박물관은 유태인 예술혼의 최고수준을 집중시킨 장소이기도 하다. 단순과 절제가 박물관의 설계와 여러 조각품의 공통점이다. 깔끔한 미적(美的)감수성이 만들어낸 공간과 여유는 관람자들의 몫이다. 강요되거나 선동되는 감정이 아니라 깊은 자기성찰을 자연스럽게 유도한다. 어린이 추모관에 들어가면 캄캄하다. 유리벽과 촛불, 그리고 수용소에서 죽어간 1백50만 어린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呼名)해가는 소리…. 이 추모관은 아우슈비츠에서 아들을 잃은 미국계 유태인 에디타 슈피겔의 헌금에 의해 지어졌다. 야드 바셈 박물관은 5백만점 이상의 자료를 가진 문서보관소와 유태인 대학살에 대해서 쓰여진 세계의 모든 간행물을 모은 도서관, 그리고 이스라엘 학교에서 이 대학살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해서 교사들을 교육하는 홀로코스트 세계 교육센터도 운영하고 있다. 이 센터는 매일 세미나와 강연회를 가지는 상시운영 기관인데 매년 3만명이 참여한다. 야드 바셈 박물관은 또 「세계각국의 정의로운 사람들을 발굴하는 과」를 운영하고 있다. 「쉰들러 리스트」의 쉰들러처럼 유태인들을 살리기 위해 위험을 무릅썼던 외국인들에 대해서 조사하여 「정의로운 사람」이란 증서와 메달을 주는데 지금까지 8천6백여 명이 지명되었다. 이분들이 기념식수한 나무가 야드 바셈을 둘러싸고 있다. 야드 바셈은 국민교육장이다. 기자가 들른 날에도 여러 그룹의 국민학생들이 박물관 內 여기저기서 설명을 듣고 있었다. 야드 바셈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우리가 나라를 잃는 순간 대학살은 되풀이 되게 마련이다」라는 강박관념의 주입이다. 지난 6월9일 콜 독일 수상은 야드 바셈을 방문한 자리에서 다시 한 번 사죄했다. 『독일의 이름으로 행해진 이 악행에 대해서 오직 부끄러워할 뿐이다』 콜 수상은 이스라엘 국민에게 충고도 했다. 『과거만 기억하고 미래를 잊어버리는 것도 나쁜 일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독일사람들에 대하여는 특별히 나쁜 감정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한다. 유태인 대학살은 나치 집단의 소행이지 일반 독일인에게 그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용이 가능하게 된 것은 2차세계대전 후 서독 정부가 철저하게 과거를 반성하는 자세를 취하고 희생된 유태인 가족들에게 많은 물질적 보상을 하는 등 행동으로서 반성의 뜻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일본이 전후(戰後)에 똑같은 태도를 취했더라면 지금쯤 한국인들은 『식민통치는 일본군국주의자들의 소행이었지 대다수 일본인들에게까지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는 식으로 너그럽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야드 바셈 바로 옆에 있는 언덕 꼭대기엔 국립묘지가 있다. 시온주의의 창설자 디오도어 헬젤의 무덤을 비롯하여 에쉬콜 수상, 골다 메이어 수상, 슈프린차크 초대 국회의장 등 역대 국가지도자들의 아주 조촐한 무덤들이 있었다. 봉분은 없고 석판 한 장이 무덤 하나인데 크기는 싱글 베드 정도였다. 비석도 없고 다른 장식물도 없다. 오히려 군인묘역의 전사자 무덤이 수상무덤보다 더 크고(그래도 별 것 아니지만) 꾸밈이 있었다. 기자는 이스라엘에서 처음 만난 사람은 이스라엘 국회(The KNESSET)의 외교·국방위원장 오리 올氏(56)였다. 역대 외교·국방위원장 출신 중에는 라빈 현 수상 등 다섯 명의 수상이 배출되었다. 집권 노동당 소속은 오리 올氏는 육군 소장 출신. 골란 전선 사령관, 중부전선·북부전선 사령관 등 요직을 거친 유명한 장군이다(이스라엘 군대의 최고계급은 중장). 그는 넥타이도 매지 않고 외투도 벗은 채 기자를 맞았다. 이스라엘에서는 여간한 공식행사가 아니면 넥타이를 매지 않는다. 격식과 형식에는 최소한의 신경을 쓰고 문제의 본질과 핵심에 정력을 집중한다는 것은 유태인들의 살아가는 방식인 듯했다. 오리 올 위원장은 기자가 앉자마자 그대로 본론으로 들어가 직설적인 語法으로 대답해나갔다. 이런 단도직입적인 대화법(對話法)도 이스라엘 사람들의 공통점. ―귀하가 위원장으로 있는 외교국방 위원회는 지난해 아그라나트(Agranat:당시 대법원장)위원회의 보고서를 공개하도록 결의한 바 있습니다. 이 보고서는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왜 적절하게 대비하지 못했는가를 조사한 것이었습니다. 이 보고서는 이스라엘군의 정보부대가 전쟁발발의 가능성을 과소평가 하는 실수를 저질렀다고 지적하고 당시 참모총장 엘라자르 장군과 육군 정보부대장 등의 해임을 건의하기도 했었지요. 『우리는 그 전쟁에서 많은 교훈을 얻었고 정보 수집능력을 그 뒤에 크게 개선시켰습니다. 당시 우리의 오판은 주로 분석과 판단의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아주 신뢰할 만한 정확한 정보를 수집했지만 고위층에서 무시했습니다. 나도 그 전쟁에서 골란고원 전선의 기갑부대장으로 고생했습니다만 이스라엘 군의 정보능력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가 우리와 평화협정을 맺게 된 것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수에즈운하를 도하하여 기습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이스라엘을 방문한 우리정보기관 간부를 만난 적이 있습니까? 『없어요. 우리 정보기관과 귀국(貴國)의 정보기관은 서로 협조 잘 하고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군요』 ―이스라엘과 한국의 공동 적이 되고 있는 북한에 대한 정보의 교환 말씀입니까? 『북한뿐이 아니지요』 ―전투에서 부상당한 적이 있습니까. 『이집트와의 소모전(War of Attrition) 때 시나이 반도에서 당했지요』 존경받는 게 군인의 즐거움 ―이스라엘이 계속되는 안보위기 상황 속에서도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유지해왔다는 것은 상당히 교훈적입니다. 위기 때는 강한 지도자를 요구하게 되는데 그런 유혹을 어떻게 뿌리쳤습니까. 『우리는 군사혁명을 할 필요가 없어요(웃음). 대통령 에즈라 와이즈만, 수상 라빈, 그리고 나도 다 장군출신이니 우리는 이미 권력을 잡고 있는 겁니다(웃음). 이스라엘 군대는 시민군입니다. 공군과 정보부대만은 주로 장기복무 직업군인으로 조직돼 있지요. 군인과 민간인의 구별이 불가능합니다. 군대는 인민으로부터 나왔고 인민으로 돌아갑니다. 군인이 시민이고 시민이 군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군대는 항상 리버럴하고 개방적이지요』 ―최근에 수상을 국민이 직접 선출하도록 법률을 개정한 것은 강한 지도자를 바래서 한 것이 아닙니까? 『한국에는 정당이 몇 개 있지요. 세 개? 우리는 열 개나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수상에게 더 강한 권력을 주어야겠다는 판단을 한 것이지요. 우리의 국가건설 역사는 47∼48년밖에 안됩니다. 아직도 생존을 위해 싸우면서 나라를 만들어가고 있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문제가 있으면 그때그때 고쳐야지요』 ―이스라엘은 GNP의 10%를 군사비로 쓰고 있는데 경제가 이런 지출을 계속적으로 지탱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지난 20년간 군사비의 비중은 계속 줄어들고 있어요』 ―예방공격(Pre-emptive strike)과 보복, 이것은 이스라엘의 전쟁수행원칙입니까. 『우리같이 작은 나라에서는 신속하게 전장을 적국 영토로 전개해야만 승리합니다. 그래서 강력한 공군을 발전시킨 것이지요』 ―작년에 이스라엘 군의 참모총장으로 임명된 암논 샤하크 장군은 만50세에 정상(頂上)에 올랐습니다. 굉장히 젊은데요…한국군에 비교하면. 『젊다니요. 샤하크 장군은 우리 역사상 50세에 참모총장이 된 최초의 인물입니다. 나는 41세에 소장이 됐어요. 47세 때 은퇴했어요. 몇 년 전 보다는 장성들의 평균연령이 4∼5세나 많아졌어요』 ―한국에서는 민주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군이 많은 진통을 겪고 있고 사회의 영향을 받아 사고가 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에선 이런 문제를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국민이 군대와 지휘관을 믿고 아이들을 군에 보내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개방적인 사회와 개방적인 군대에 적응할 수 있는 개방적인 지휘관의 존재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군대에서는 어떻게 부하를 통솔합니까. 『오픈 마인드(open mind)! 상하관계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무지와 무관심입니다. 개방적인 자세 없이는 무지, 무관심이 없어질 수가 없지요. 지휘관은 세상의 변화에 적응해가야 합니다. 오픈 마인드로써만 그렇게 할 수 있어요. 또 하나 덧붙인다면 리더는 타인(他人)들을 리드하는 사람입니다. 모범을 보여야만 리드할 수 있지요. 육군사관학교를 나와서 지휘관이 되어도 전투경험이 없으면 어떻게 리드를 합니까. 우리는 웨스트 포인트가 없습니다. 모든 장교들은 사병에서 출발하여 올라갑니다. 그러니 모범을 보일 수 있지요』 ―군인된 사람으로서의 즐거움이 뭡니까. 『남으로부터 존경받고 인정받는 것이지요. 이스라엘에서는 처음 만나는 사람일 때 습관처럼 「당신은 군대에서 무엇을 했었느냐」고 물어요. 군인생활, 그리고 군대가 사회로부터 평가받고 감사를 받고 있다는 것, 그게 이스라엘 군인의 즐거움이지요』 국민적 합의(合意)가 군사기(軍士氣)의 기초 지브 쉬프氏는 텔 아비브市에서 발행되는 일간지 하레츠(HAARETZ)의 국방부장으로서 이스라엘에서 제일 가는 安保분야의 전문기자이다. 61세의 老기자인 그는 이스라엘이 치른 여섯 번의 전쟁과 캄보디아 월남전쟁 등 지금까지 여덟 번 전장을 누볐다고 한다. 이스라엘 상류층에서는 『라빈 수상도 쉬프 기자에게 보고한다더라』는 우스개가 있을 정도로 그는 고급정보에 많이 접하면서도 신뢰를 받고 있는 大記者이다. 크지 않은 체구에 조용한 분위기를 가진 쉬프氏는 텔 아비브의 한 카페에서 한 시간 반쯤 자신의 소견을 이야기해주었다. 그는 『요사이 젊은 기자들이 국익을 해치는 국방 관련 기사도 마구 쓰고 지나친 상업주의가 또한 부작용이 되고 있다』라고 했다. 그는 『우리의 적이 알면 유일하게 되는 군사상의 기밀은 보도하지 않는 것이 언론계의 자율적인 관례이다』고 했다. 그는 『국방당국자와 언론인들이 비공식적인 접촉을 항상적으로 유지하면서 상호이해를 도모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쉬프氏는 『자주국방을 위해서 중요한 것은 방위산업의 기초이다』고 했다. 그는 『미제 무기를 사더라도 그것을 한국식으로 개조, 독자적으로 운영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방위산업의 독자적 운용이 있어야 무기수입이 금지되는 상황에서도 버틸 수 있기 때문에 그 국가는 외교적으로 여유를 갖게 된다』고 충고했다. 쉬프氏는 또 『국가의 전략과 관계된 주요 이슈에 대해서는 전국민적 合意가 있어야 국가의 단결이 유지될 수 있고 젊은 세대에게 무엇을 위해 싸울 것인가를 설명하기가 쉽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스라엘의 경우 지난 1년간 시리아, PLO(팔레스타인해방기구) 등과의 평화협상을 둘러싸고 어떤 점령지를 어떻게 포기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국론이 분열됨으로써 「국민적 합의」가 다소 약화돼가고 있다고 걱정했다. 그는 이스라엘의 국론이 영토문제라는 매우 민감한 주제를 선택하여 갑론을박하도록 만든 것이 실수였다면서 「국민적 합의」라는 목표를 너무 깊게 추구하다가 보면 오히려 국민적 합의가 약화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태인의 역사를 살펴보면 군사적 천재성(天才性)은 발견되지 않는데 어떻게 이처럼 독창적인 군사조직과 전술을 개발하여 나라를 지켜내는 데 성공했습니까. 『유태인은 군사면에선 아주 형편없는 전통밖에 가지고 있지를 못했지요. 우리는 군대를 조직할 때(영국식민지시대) 다른 나라와 아주 다른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는 이스라엘 사람들 모두가 비밀전투요원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전통 속에서 이스라엘 군대가 탄생했으므로 우리는 IDF(Israel Defense Force)를 인민군(People's Army)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건국 주역들은 농업을 일으키는 데 주력했고 그 뒤에 군대를 만들었습니다. 당시엔 무역이나 산업처럼 人力수요에 대한 다른 경쟁부문이 없어서 가장 뛰어난 人材가 군대로 몰려들었습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유태인들 중에서도 가장 머리 좋은 사람들이 그 기초를 놓은 조직이란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또 하나 이스라엘 군대를 강군(强軍)으로 만든 요인은 싸우지 않으면 국가와 국민의 생존이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생존이냐 멸망이냐, 여기서 살 것인가 다시 쫓겨날 것인가, 예속이냐 독립이냐의 상황에서 우리는 다른 선택이 없었습니다』 「노 아더 초이스」(No other choice)-이 말을 기자는 이스라엘 취재 중에 수십 번은 더 들어야 했다. 용감하게 싸우는 수밖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벼랑에 선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강박관념이 맹렬한 투지로 전환된 곳에 이스라엘 군대가 있다는 얘기다. 쉬프 기자는 『이스라엘이 주변 아랍 국가와 평화를 이룬 다음에는 이스라엘 군대나 안보의식도 달라질 것이다』면서 『그때는 국민적 합의를 도모하기가 더 어렵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평화협정이 완결된 이후에도 이스라엘이 강한 군대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이스라엘과 아랍국가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아랍국가들끼리의 수많은 충돌과 전쟁의 역사를 보면 자명(自明)해집니다. 중동은 1990년대에 들어서 만도 두 개의 나라가 지도상에서 지워져버린 경험을 가진 지구상의 유일한 지역입니다. 쿠웨이트는 국제연합군의 도움으로 국가를 회복했으나 남 예멘은 멸망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생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북한+이란 커넥션」은 폭발의 임계량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란·북한이 협력하여 각각 장거리 미사일과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란을 잠재적인 적국 제1호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국과 이스라엘은 공동의 적국을 상대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이란은 한국의 적이 아니고 북한은 이스라엘의 적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누가 누구의 적이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란과 북한은 국제적인 위협이란 점이 중요합니다. 이란과 북한은 예측 불가능한 정권으로서 그들이 손에 들어가는 미사일과 핵은 통제불가능한 파괴력(Uncontrolled destructive power)이 됩니다. 이란은 이스라엘과 국경을 맞대고 있지는 않지만 이스라엘의 파괴를 국가목표로 공언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개의 통제불가능한 파괴력이 하나로 합친다면 폭발의 임계량(Critical mass)에 도달하게 된다는 점이 문제의 본질인 것입니다.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사정권 안에 일본이 들어가고 걸프 연안의 산유국들이 이란의 위협에 직면한다면 이것은 국지적인 문제가 아니라 지구촌의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쉬프 기자는 이란과 북한이란 공통의 위협에 대처하는 방법으로서 몇 가지 방안을 제시하였다. 첫째, 국제적인 압력. 둘째, 한국과 미국, 이스라엘과 미국의 전통적인 협력관계를 활용하여 이 세 나라가 긴밀하게 협조하는 방안. 셋째, 북한과 이란의 위협이 노골화될 경우 북한과 이란에 대해서 이 세 나라를 주축으로 한 국제적 연합전선을 형성하는 것. 쉬프 기자는 또 『며칠 전에 美國의 군축국장이 처음으로 북한의 또 다른(노동1호 이외의 다른 미사일 아마도 대포동 1호를 지칭하는 듯) 장거리 미사일의 사정거리가 수천마일 이라고 지적한 자료를 보았다』면서 『북한은 일본을 사정권 안에 넣음으로써 일본과 미국과의 협상을 유리하게 끌고 가려는 목적과 지역강국을 지향하면서 동시에 미사일을 팔아 먹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밖에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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