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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비 오는 바닷가의 작은 텐트. 엄상익(변호사)

鶴山 徐 仁 2024. 7. 1. 15:29

비 오는 바닷가의 작은 텐트. 엄상익(변호사)

 

月雲 백일천 2024.06.26 17:20


비 오는 바닷가의 작은 텐트
엄상익(변호사)     


  초여름을 알리는 소낙비가 내리는 날 오후였다. 우산을 쓰고 해변을 산책하고 있을 때였다. 성난 파도가 흰 거품을 뿜어내며 우르르 해변으로 달려드는 모래 위에 작은 텐트 하나가 외롭게 있었다. 그 안의 누군가가 가만히 앉아서 파도소리의 의미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연약해 보이는 그 텐트를 보면서 그게 ‘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젯밤 유튜브에서 여든여덟 살의 영감이 배낭을 지고 끝없이 길을 걷는 장면을 봤다. 몸에 지닌 유서에는 자기를 발견하는 즉시 그가 지정하는 의과대학 병원에 알려달라는 것이다. 그는 장례를 치를 필요없이 바로 자신의 몸을 해부용 시신으로 사용해 달라고 했다.
  
  갈대가 바람에 은발을 휘날리는 저수지 옆에서 작은 텐트를 치고 있는 그의 모습이 보인다. 누룽지를 끓여서 멸치를 반찬으로 먹고 있다. 저녁 어스름이 내리고 밤하늘의 달이 점차 밝아오고 있었다. 그는 길을 걷다가 어디서 쓰러져 숨을 거두어도 좋다고 죽음과 삶을 포갠 위에서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삶이 맑고 향기로워 보였다.
  
  바닷가에 살다 보니까 작은 차를 자기의 집으로 해서 그곳에서 잠을 자고 밥을 먹으면서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트럭을 캠핑카로 개조해서 몇 달씩 낚시터만 돌아다니는 사람도 봤다. 부자가 아니라도 그렇게 살아지는 것 같았다. 해변의 쉼터에서 한 남자를 만난 적이 있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
  
  “부동산 중개사를 통해 제일 싼 아파트를 알아봤어요. 그랬더니 북평에 있는 열여덟 평 아파트가 오천만 원에 나와 있더라구요. 그걸 샀죠. 이따금씩 와서 쉬었다 갑니다. 나만의 공간이죠. 비워둬도 관리비가 거의 안 나와요.”
  
  살 줄 아는 사람 같았다. 돈 돈 하면서 미루면 나중은 없는 게 세상일 것 같다.
  
  나는 동해항의 작은 등대가 보이는 언덕에 있는 낡은 이층집을 사서 두 달째 살고 있다. 내부의 자잘한 구멍이 있는 거친 콘크리트 천정과 벽을 흰 페인트로 칠했다. 외벽도 소박하게 한 풀 가라앉힌 노란 칠로 마감을 했다. 천정에도 알전구를 달았다. 나이 먹은 내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 쉽게 갈아끼우기 위해서 한 선택이다. 이 집을 나는 세상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묵는 천막이고 텐트라고 생각하고 있다. 나의 방에서 죽었으면 좋겠다. 재가 되어 바다가 보이는 양지바른 곳에 뿌려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집에 대한 관념이 많이 바뀌었다. 어린 시절 동네 부자가 사는 기와집에서 살고 싶었다. 높은 축대 위에 있는 양옥집도 부러웠다. 봄이 되면 그 집 담장 위로 하얀 목련이 등불로 피어나곤 했다. 대학 시절 강남에 신축된 열여덟 평짜리 아파트를 보고 황홀했다. 따뜻하고 온냉수가 나오는 욕조와 깨끗한 변기를 보고 반했다. 그런 아파트에서 살면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을 하고 셋방을 전전했다. 여러 번 이사를 한 끝에 서울의 강남에 내 이름으로 등기된 아파트를 가졌다. 개발 시대 그것은 작은 성취였다. 나는 거기서 멈추기로 했다. 더 가면 집이 과시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우연히 만난 한 남자가 자기 집을 자랑하고 싶은데 구경하겠느냐고 물었다.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백층 건물의 중간쯤이 그의 아파트였다. 유명 연예인들과 부자들이 산다고 했다. 그는 친구들한테는 거기 산다는 얘기를 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의 안내로 철저히 외부인의 출입이 차단된 그곳으로 들어가 구경했다. 수십억이 든 인테리어의 집이었다. 이태리 대리석을 깐 바닥은 내게는 외국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내 취향에는 맞지 않았다. 거대한 유리병 안에 들어있는 커다란 새가 된 느낌이었다. 선불교의 화두 중에 유리병 안의 새를 상하지 않고 꺼내보라는 문제가 기억 저편에 남아 있었다. 숨이 막힐 것 같고 불안했다. 남의 시선을 의식한 전시용 공간이지 편안한 집이 아니었다. 메마르고 공허한 느낌이었다.
  
  호주의 골드코스트 호화저택을 소유한 엄씨의 집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백화점을 해서 성공한 사람이었다.
  
  집안에 요트 선착장이 있고 드넓은 바다의 광경이 집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방마다 전면유리창으로 되어 있었다. 이상하게 넓은 주방의 싱크대에는 요리를 한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그 집 주인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말이죠, 내 가게의 구석에 딸린 작은 방이 훨씬 편해요. 거기서 라면을 끓여 먹고 간이침대에서 자면서 평생 물건들을 팔았어요. 이 바닷가의 저택은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과시용이에요. 이 집에서 사는 게 편하지 않아요.”
  
  인간은 길들여진 것이 편한 법이다. 집이란 결국 이 땅에 잠시 치고 사는 천막이 아닐까. 성경을 보면 우리의 몸도 영혼이 잠시 묵는 텐트라고 했다. 우리는 때가 되면 천막을 거두고 그곳을 향해 가야 하는 이 땅의 나그네가 아닐까.
  

출처: 경북중고40 동기회 | 비 오는 바닷가의 작은 텐트. 엄상익(변호사)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