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24.05.13. 16:48업데이트 2024.05.13. 17:38
13일 오후 서울 양천구 목동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대회의실에서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전체회의가 열리고 있다./연합뉴스
민주노총이 반미 활동과 관련해 북한 단체로부터 받은 글을 홈페이지에 올려놓아, 국가정보원이 글을 삭제하게 해달라고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에 요청했으나, 방심위 직원들이 국정원이 보내온 증거 자료들을 심의에 올리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심의위원들은 ‘증거 불충분’이라며 해당 글에 대한 삭제 요청을 기각했고, 글은 민주노총 홈페이지에 1년 넘게 올라 있었다. 김정은 찬양 게시물이 있는 북한 당국 웹사이트도 방심위 직원들의 업무 소홀로 장기간 차단되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북한 조선직업총동맹 중앙위원회가 민주노총에 보낸 연대사. /민주노총 홈페이지 캡처
앞서 2022년 8월 민주노총은 홈페이지에 ‘로동자의 억센 기상과 투지로 미국과 그 추종세력의 무분별한 전쟁대결광란을 저지파탄시키자’라는 글을 올렸다. 북한의 노동자 단체라는 ‘조선직업총동맹 중앙위원회’가 민주노총에 보내온 ‘련대사(연대사)’였다. 북한 측은 이 글에서 “내·외 반(反)통일 세력의 전쟁 대결 책동을 저지시키기 위한 ‘로동자 통일 선봉대’ 활동을 힘차게 벌려온 귀 단체 대원들에게 뜨거운 격려를 보낸다”고 했다. 이어 한미 연합훈련을 겨냥해 “미국과 남조선의 윤석열 보수 집권 세력은 각종 명목의 침략전쟁 연습을 광란적으로 벌려놓고 있다”며 “내외 반통일 세력의 이러한 대결 망동을 단호히 짓뭉개버려야 한다”고 했다.
민주노총은 이 북한 단체와 민주노총, 한국노총의 ‘공동 결의문’도 올렸다. 결의문에서 세 단체는 “외세와의 합동 군사연습과 침략전쟁 장비 반입을 비롯한 전쟁 대결 책동을 단호히 짓부셔버리기 위한 투쟁에 총궐기해 나설 것”이라고 했다.
13일 감사원이 공개한 방심위 감사 보고서에 따르면, 민주노총이 이런 글들을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되자 2022년 12월 14일 국정원이 방심위에 이 글들에 대한 삭제를 심의해달라고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다. 경찰청도 다음날 삭제 심의 요청 공문을 보냈다.
국정원은 당시 방심위에 공문과 함께 다양한 증거 자료들을 보냈다. 노동 단체라는 ‘조선직업총동맹 중앙위원회’가 실제로는 어떤 단체인지를 소개하는 자료와, 민주노총이 올린 글의 어떤 부분이 국가보안법상 ‘이적 표현물’에 해당하는지를 기존에 법원으로부터 이적 표현물로 판결을 받은 다른 글과 비교 분석한 자료 등이 포함돼 있었다. 반면 경찰청이 보내온 자료라고는 민주노총이 올린 글을 복사해 붙여넣기해 놓고, ‘국가의 존립·안전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해악을 끼칠 위험이 있어 삭제가 필요하다’고 적어놓은 것이 전부였다.
그러자 방심위 직원들은 더 늦게 온 경찰청 공문을 먼저 접수하고, 국정원 공문을 나중에 접수했다. 그러고는 경찰청 공문을 근거로 심의를 개시했다. 방심위 통신심의소위원회 위원들에게는 경찰청이 보내온 자료만 제시하고 심의를 하게 했다.
심의위원들은 2022년 12월 19일 소위원회에서 ‘판단을 내릴 근거 자료가 부족하다’며 의결을 보류했다. 다양한 근거 자료가 첨부돼 있는 국정원의 심의 요청은 ‘이미 동일 사안(경찰청의 심의 요청) 심의가 진행되고 있다’며 자동으로 각하 처리됐다.
방심위 직원들은 국정원이 제출한 증거 자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경찰청에 보완 자료를 내라고 했다. 경찰청이 자료를 추가로 내지 않자, 방심위 직원들은 이듬해 2월 20일 열린 통신소위에 경찰청의 심의 요청 건을 그대로 다시 올리면서, 심의위원들에게 국정원 자료는 보여주지 않았다. 통신소위는 ‘증거 불충분’이라며 ‘해당 없음’ 결정을 내렸다. 민주노총에 글 삭제를 요청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민주노총 홈페이지 글들은 국정원이 지난해 9월 재심의 요청을 하면서 심의 대상이 됐다. 글을 그대로 둔다는 결정이 내려진 지 7개월이 지난 뒤였다. 통신소위 심의위원들은 2023년 9월 25일 회의에서 ‘추가적인 자료 확인이 필요하다’며 다시 결정을 보류했다. 그러자 국정원은 2023년 10월 방심위에 ‘증거 자료가 심의위원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다’는 취지의 의견서를 보냈다. 국정원은 의견서에서 “그간 본 기관은 다양하고 충실한 자료를 공문서를 통해 제공해 왔으나, 이런 자료들이 심의위원들에게 그대로 전달되기보다는, 심의용 자료로 만들어지는 과정 중 일부 각색·편집·누락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며 “이 의견서는 심의위원들이 본 기관의 신청 사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별도 편집 없이 원본 그대로 전달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통신소위 심의위원들은 지난해 10월 30일에야 민주노총에 해당 글을 삭제시킨다는 ‘시정 요구’ 결정을 했다. 민주노총이 문제의 글을 올린 지 1년 2개월이 지난 뒤였다.
북한 국가관광총국이 운영하는 웹사이트 ‘조선관광’의 첫 화면. /조선관광 홈페이지 캡처
북한 당국이 운영하는 북한 관광 안내 웹사이트 ‘조선관광’도 방심위 직원들의 업무 소홀로 장기간 국내 접속이 차단되지 않은 상태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북한 국가관광총국이 운영하는 이 사이트는 북한 관광 정보 외에도 ‘불멸의 령도’라는 페이지를 통해 김정은을 찬양하는 북한 조선중앙통신의 보도들을 제공하고 있다.
국정원은 지난해 4월 이 웹사이트에 대한 국내 접속 차단을 심의해달라고 요청했으나, 방심위 직원들은 KT·LG유플러스 2개 통신망에서만 해당 사이트에 대한 접속을 시도해보고 접속이 되지 않자 ‘국내에 해당 정보가 유통되지 않고 있다’며 국정원 요청을 각하했다. 그러나 SK텔레콤이 운영하는 통신망 등 다른 통신망 3곳에선 접속이 가능한 상태였고, 조선관광 웹사이트는 국정원이 재심의를 요청해 지난해 10월 방심위 통신소위가 국내 접속을 차단하기로 결정할 때까지 국내 인터넷 사용자들에게 노출돼 있었다.
감사원은 국보법 위반 글과 웹사이트에 대한 통신심의 업무를 부당하게 처리한 방심위 직원 2명을 징계하라고 방심위 감독 기관인 방송통신위원회에 요구했다.
방심위는 감사원에 “앞으로 관계 기관의 심의 요청에 대해 심의위원들에게 자료를 충실하게 제공하고, 내부 절차의 미비점 등을 검토해 향후 심의 과정에 적극 반영될 수 있도록 조치하겠다”고 했다.
한편 방심위 직원들로 이뤄진 언론노조 방심위지부 김준희 지부장은 본지 통화에서 “감사원은 마치 방심위 직원들이 심의 자료를 통신소위 위원들에게 의도적으로 부실하게 제공한 것처럼 보고서에 기술했으나, 통신소위 심의는 국정원 자료 등과 상관없이 내·외부 법률 자문, 특별위원회 자문까지 거쳐서 이뤄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위원들이 종합적으로 판단해서 결정했던 것인데, 감사원이 이런 사실들은 감사 보고서에서 다 빼고 직원들이 자료를 제공하지 않은 잘못으로 몰아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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