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23.09.29. 06:02업데이트 2023.09.29. 09:12
윤석열 대통령과 부친인 고 윤기중 연세대 명예교수. /사진=대통령실
그날은 비단 대통령의 부친상(父親喪)이 아니었다.
“학교의 아버지셨습니다. 장례식에 온 건 제자의 반(半)도 되지 않아요. 아무래도 경호원도 많고 하니, 바로 앞까지 왔다가 돌아간 이도 많지요. 저도 가르치는 직업인데, 선생님에 비하면 선생도 아니에요. 인간적이고 배려 깊은, 진짜 스승님이죠. 저희는 못 따라갑니다.”
제자들은 상주(喪主)를 자처했다. 이학배 연세대 응용통계학과 교수도 그중 하나다. 작고 한 달여. 이 교수는 “아직도 마음이 좋지 않다”고 했다.
“선생님을 모시면서 참 많은 걸 배웠습니다. 제 아버님이 1987년에 돌아가셨는데, 사흘 내내 빈소를 찾아주셨어요. 그런 스승이 또 있을까요. 1989년. 제가 유학길에 오를 때는 김포공항까지 배웅을 나와주셨습니다. 그 덕에 저도 제자에게 그렇게 하고 있어요. 같이 식사하러 가다 제가 교내에서 친구를 마주치면, 친구와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옆에서 기다려주실 만큼 자상하셨어요.”
지난 8월 15일 별세한 윤기중(尹起重· 1931~2023년) 연세대 명예교수는 통계학의 거목(巨木)이다. 국내 ‘응용통계학’의 아버지 격이라 불린다. 대통령의 아버지인 그는 아버지 같은 스승이기도 했다.
자장면, 매운탕, 백반
연희동 자택에는 제자들이 수시로 드나들어 밥을 먹었다. 1970년 초에 지어 50년 가까이 살았던 집이다. 주변에서 집값이 유망한 지역으로 옮겨 다녀도 꿈쩍하지 않았다. 외식을 해도 밥값은 늘 본인이 냈다. 이학배 교수의 말이다.
“저는 1984년 선생님의 조교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일을 주실 때도, 명령조로 말씀하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이거 할 수 있을까, 오늘 약속 없니, 늘 이러셨어요. 선생님이 1997년 8월에 은퇴하셨고, 저는 2001년도에 교수로 부임했습니다. 꼭 한 번 식사 대접을 해드리고 싶었는데, 매번 당신이 내시겠다고 하셔서 어느 날은 카드를 카운터에 맡기고 들어간 적도 있었어요. 그걸 아시고 또 한참을 뭐라고 하셨죠. 고르시는 메뉴라 해 봐야 자장면, 매운탕, 백반 이런 거였는데 말이에요.”
연세대에서 통계학을 전공하고 동(同)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를 받은 김인규 한림대 경제학과 교수는 “지금까지 모신 은사 가운데 진정한 참스승”이라고 했다.
“연말연시(年末年始)에는 항상 제자들에게 자필 연하장을 먼저 보내셨습니다. ‘건승을 비네, 지난 한 해도 수고 많았네’와 같은 내용이었어요. 제자들이 깜짝 놀라서 답장을 하곤 했죠. 취직해서 식사 대접하려고 하면 중간에 화장실 가시는 척하면서 미리 계산하셔서 송구스러웠던 적도 많았어요. 제 자녀 안부를 물을 때도 항상 이름을 기억해, ‘재현이는 이제 대학을 마쳤는가’ 하셨고, 유명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하거나 신문에 칼럼을 쓰면 ‘잘 봤네’라며 연락을 주셨지요. 상당히 세심하고, 자상하셨습니다.”
이학배 교수는 “제자에게 아무 일 없이 전화 걸어 인사하시는 건 일상이었다”고 했다. 아버지 같은 스승인 윤 교수는 ‘아들 같은 제자’이기도 했다. 이 교수의 말이다.
“선생님이 모셨던 스승이 계십니다. 고(故) 김준보(金俊輔·1915~2007년) 교수님이에요. 언젠가 김 교수님의 자제분이 미국에 가시고, 홀로 과천에 계실 때가 있었어요. 그때 선생님이 아들 역할을 했는데,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매우 극진히, 아들보다 더 아들처럼 모셨어요. 한 번은 초밥을 곱게 포장하시기에, 여쭤봤더니 과천 가신다더라고요. ‘모셔다 드릴까요’ 했더니 지하철 타면 된다고 극구 사양하셨어요.”
“대통령 취임식 때도 일반석에 앉아”
자가용은 웬만하면 이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1981년부터 30년 이상 연세대 교직원 생활을 했던 김광열 베세토국제학교장은 “연대 북문(北門) 쪽으로 항상 걸어서 학교에 오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면서 “제자뿐만 아니라, 교직원 모두에게도 존경받은 분”이라고 했다.
“제가 재무처로 가기 직전 윤 교수님께서 재무처장이었는데, 판공비를 1원도 안 쓰셨다고 하더군요. 여럿을 모셔봤는데, 그런 분은 거의 없었어요. 재무처에서 두고두고 회자되는 얘기죠. 윤 교수님이 40여 년 재직하며 맡은 보직이 상경대학장과 재무처장 딱 두 개입니다. 보통 학장 이후 대학원장을 맡는 게 과정처럼 돼 있는데 더 이상의 보직은 일절 맡지 않겠다고 공언하셨어요. 재무처장은 상경대 교수라면 돌아가면서 해야 하는 거라 하신 거고요.
학교 돈 한 푼 쓰시지 않으면서도, 상경대 교수들이나 교직원들과 식사를 할 때는 밥값을 다 내셨어요. 가리지 않고 다 잘 잡수셨죠. 윤 대통령 ‘먹방’이 화제인데, 그보다 더 잘 잡수셨어요. 교직원 식당도 자주 가셨고요. 퇴직하고 가끔 학교에 가봤는데, 최근까지도 명예교수실에 나와 책을 읽으시고, 연구도 하셨어요. 아드님이 대통령 되고 난 뒤에는 경호원이 동행했는데, 그걸 그렇게 불편해하셨다고 합니다. 워낙 ‘아들은 아들, 나는 나’라는 분이라, (윤 대통령의) 취임식 때도 일반석에 앉으셨어요.”
통상 대통령의 가족은 VIP로 분류돼 취임식 단상에 앉는 게 관례다. 당시 취임식준비위원 관계자에 따르면 윤 교수는 ‘다른 귀한 분을 모시라’며 한사코 사양했다고 한다.
지난 8월 17일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윤기중 연세대 명예교수 발인식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부인 김건희 여사. /사진=대통령실
기부금 내면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마라”
정치 얘기는 윤 교수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김인규 교수는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는 가끔 옛날 얘기를 하시거나, 주로 듣기만 하셨다”고 했다.
“제가 ‘정치인 윤석열’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걸 선생님도 아셨어요. 당선 후에는 아들이 대통령이니 왠지 또 먼저 연락드리기가 좀 그렇더라고요. 그런데 항상 먼저 전화해주셨어요. 선생님 봐서 윤 대통령을 지지해야 하는데, 살짝 미안한 마음을 비쳐도 전혀 개의치 않으시고 ‘그러지 말고 와서 식사나 같이 한 번 하자’ 하셨습니다. 혹시 제 마음이 불편할까 봐 항상 먼저 전화를 하셨던 것 같아요. 만난 자리에서는 아들을 지지해달라는 말도, 정치 얘기도 전혀 하지 않으셨고요.”
이학배 교수 또한 “정치 얘기하시는 건 못 봤다”면서 “일상 얘기를 주로 하셨고, 저희 얘기를 많이 들어주셨다”고 했다.
마지막일지 몰랐던 만남은 지난 6월이다. 이 교수는 “얼굴은 6월에 마지막으로 뵈었고, 그 후로 두세 번 전화를 걸어오셔서 7월경 마지막 통화를 했다”면서 “건강 괜찮으시냐고, 식사 많이, 자주 하셔야 한다고 하니 ‘걱정하지 말게’ ‘괜찮네, 괜찮아’ 하셨다”고 했다. 돌이켜보면 그때는 지병이 악화돼 서울대병원에 입원할 무렵이었다.
“마지막까지 꼿꼿하셨어요. 최근까지도 연구실에 나와 책을 읽으셨습니다. 명예교수 연구실은 공동으로 여러 명이 쓰는데, 선생님 자리라 해 봐야 책상 하나가 전부예요. 그 자리가 아직 남아 있어서, 저희가 정리를 해야 하는데…. 선뜻 그러기가 쉽지 않네요.”
윤 교수는 앞서 지난해 5월에는 연세대 명예교수의 날에 참석해 기부금을 전하기도 했다. 이날 행사가 끝난 후 서승환 연세대 총장을 조용히 불러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연세대 발전을 위해 귀하게 써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경제 통계 분야 개척자
통계학은 원래 이과 학문이다. 국내에서 이를 경제와 경영 부문에 접목시켜 처음 상경대에 통계학과를 개설한 이가 윤기중 교수다. 당시 사회과학, 특히 상경 계열에서 통계학을 쓴다는 건 생각 못 할 일이었다. 1인당 국민총생산(GNP)이 100달러도 채 안 되던 1960년대. 경제 성장에 있어 통계학의 필요성을 통찰한 셈이다. 실사구시(實事求是) 학문을 통해 국내 경제 발전에도 기여했다는 평가다. 이학배 교수의 말이다.
“당시만 해도 통계학은 모두 자연과학이나 이과에 속했어요. 경제학을 공부하시면서 객관적 자료, 확률적 접근인 통계학을 경제, 경영에 접목해야 한다면서 한국에서 상경대 안에 이를 처음 개설하셨죠. 상경 계열에서 통계학을 가르친 건 연세대가 최초인 거죠. 이후 고려대 등 다른 학교 상경대, 사회과학대에 통계학과가 생기기 시작했고요.”
충남 공주에서 태어난 윤 교수는 1956년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58년 같은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한양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한·일 수교 직후인 1967년 일본 문부성 국비 장학생 1호로 선발됐다. 일본 히토쓰바시대 대학원을 수료했다. 그러나 박사 학위는 없다. 구제(舊制) 박사 제도가 있었지만 윤 교수는 이를 거부했다. 간단한 논문으로 다른 대학교수들에게 심사받아 박사 학위를 따던 관행이다. 그런 식으로 박사가 된들 무슨 소용이냐는 이유에서다.
1960~70년대만 하더라도 실력이 뛰어나면 석사 학위만으로도 강단에 설 수 있었다. 1968년 귀국해 연세대 상경대학 교수로 부임했다. 조교수와 부교수를 거쳐 1973~1997년 연세대 응용통계학과 교수로 일했고, 1991~1993년 연세대 상경대학장을 지냈다. 한국통계학회장, 일본 히토쓰바시대학 객원교수, 한국경제학회장으로도 활동했다. 그가 집필한 《통계학》과 《수리통계학》 《통계학개론》 등은 국내 통계학 분야 필독서다.
지난 2014년 제자(김인규 교수)의 아들(재현씨) 대학입학을 축하한다며 마련한 식사자리. 사진 왼쪽부터 윤기중 교수, 김인규 교수의 아들 김재현씨, 윤 교수와 먼 친척 간인 윤석범 연세대 명예교수, 윤 교수의 제자인 김인규 한림대 경제학과 교수. /사진=김인규 교수
‘불평등’ 연구에 평생 몰두
경제 통계 분야 개척자인 그는 미(未)개척 분야 연구를 지속했다. 특히 비주류(非主流) 연구 주제인 ‘불평등’ 문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자유주의 경제의 기본 취지와 원칙만 제대로 지킨다면 불평등 문제를 해소할 수 있다’는 게 윤 교수의 생각이었다. 윤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한 인터뷰에서 “아버지 평생의 관심이 양극화와 빈부격차였다”고 했다.
1997년 펴낸 《한국경제의 불평등 분석》은 그 실증적 연구 결과를 담은 책이다. 이를 통해 쿠즈네츠(Kuznets)의 곡선(U자 가설)이 한국에서도 타당한 가설인가를 논증했다. 쿠즈네츠 곡선은 경제 개발 초기 단계에서는 소득 불평등이 증가하지만, 일정 수준 이상으로 소득이 늘어나면 소득 불평등은 감소한다는 내용이다. 쿠즈네츠는 이 가설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윤 교수는 한국의 소득불평등도는 도시화가 진행되던 1960년대 초(제1국면)부터 서서히 개선되다, 유류파동 이후 악화됐으며, 다시 1978년(제2국면)을 정점으로 개선되는 경향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쿠즈네츠의 가설과 비교하면, 제1국면은 U자형과 반대 양상이고 제2국면은 부합한다. 이 연구는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의 소득과 부(富)의 분배 불평등 분야 연구에 한 획을 긋는 연구 결과로 남아 있다. 은퇴 이후에도 ‘불평등’ 연구를 계속했다. 김인규 교수의 말이다.
“불평등은 경제학자들이 그리 좋아하는 주제가 아닙니다. 특히 우파 시장경제학자들은 이 분야를 잘 안 들여다보죠. 경제학의 효율성을 강조하다 보면 형평성의 문제를 소홀히 하기 쉬운데, 이 연구를 계속하신 게 대단한 거죠. 실제로 가지지 못한 자에 대한 따뜻함도 항상 있었던 분이고요. 그런 부분 또한 존경해 마지않습니다.”
김광열 교장은 “내가 연세대에서 노조위원장을 세 차례 했는데, 윤 교수님은 교직원은 물론 청소하시는 분들에게도 늘 다정다감했다”고 했다. 이학배 교수는 “추석이나 설날, 교내 청소하시는 분들, 여타 비정규직분들 떡값 하시라고 준비하신 봉투를 제가 대신 전해드린 적도 많았다”고 했다. 이 교수의 말이다.
“1970~80년대 때에는 시골에서 올라와 면접날 입을 양복이 없던 학생들도 있었어요. 그 친구들 양복 값도 일일이 챙겨주셨습니다. 또 석사 마치고 유학까지 했던 아주 똑똑했던 저의 7년 선배가 있었어요. 그런데 너무 안타깝게도 눈에 질병이 생겨 맹인이 되셨죠. 1980년대 초로 기억합니다. 선배도 생계를 유지해야 하잖아요. 그때 선생님께서 이 선배를 위해 직접 국회를 수차례 다니면서 시각장애인에게만 안마사 자격을 인정하는 의료법 제정을 위해 애쓰셨어요. 사비(私費)를 써가면서요. 그 선배가 나중에 시각장애인 관련 협회장도 하셨죠.”
윌리엄 페티에 푹 빠져
윤 교수의 번역서 《페티의 경제학》 또한 주류 연구 대상은 아니었다. 김인규 교수는 “윌리엄 페티 또한 국내 학자들이 주로 들여다보는 인물이 아니다”라면서 “(페티를 연구할 당시) ‘이거 중요한데 왜 안 다룰까’라면서 작업을 하셨던 것 같다”고 했다.
현대 경제학자들은 영국 경제학자인 윌리엄 페티를 노동가치설의 창시자로 꼽는다. 동시에 18세기 애덤 스미스로 대표되는 고전학파 경제학의 기틀을 닦은 인물로 평가한다. 고전학파의 핵심은 노동가치설과 자유경쟁이다. 시장에 국가 개입을 최소화하고 모든 생산과 분배는 시장을 매개로 자유롭게 이뤄져야 한다는 요지다.
윤 교수는 이런 페티에 푹 빠져 있었다. 번역서 외에도 〈윌리암 페티 경의 생애〉 〈윌리암 페티에 대한 연구〉 〈페티의 아일랜드의 정치적 해부의 연구〉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모두 70세를 넘긴 시기였다.
윤 대통령은 하관식 때 《한국경제의 불평등 분석》과 《페티의 경제학》을 함께 묻었다. 아버지가 평생 한 연구의 집약체다. 한편 아버지가 선물한 밀턴 프리드먼의 《선택할 자유》는 아직 손에 쥐고 있다. 윤 대통령은 참모들에게 “대학생 때도, 검사로 임관했을 때도 이 책을 읽으며 학업과 공직에 임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책에서 프리드먼은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윤 대통령은 검찰총장 취임 당시 “시장기구가 경제적 강자의 농단에 의해 건강과 활력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리 헌법체제의 본질”이라고 했다. 대통령 취임식에서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기반으로 국민이 진정한 주인인 나라로 재건하겠다”면서 “자유로운 정치적 권리와 시장이 숨 쉰 곳에 번영과 풍요가 꽃피었고, 지나친 양극화와 사회갈등은 도약과 성장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가 평생 몰두한 자유주의 원칙과 불평등 해소가 그대로 녹아 있는 말이었다.
“아버지의 자유주의 가치관 영향 미쳐”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원장은 “부모님의 가르침이 대통령의 리더십과 국정 운영에 미치는 영향은 상당히 크다”면서 “이승만 대통령부터 살펴보면 역대 대통령은 통상 부모 한쪽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데, 윤 대통령은 아버지의 영향을 특히 많이 받았다. 자유민주주의 가치관 또한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라고 했다.
“윤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자유’를 35번, 지난 광복절 경축사에서는 27번이나 언급했습니다. 시장 중심 경제 기조 또한 아버지의 영향을 상당히 받았다고 봐야 합니다. 부자(父子) 모두 강함과 부드러움을 동시에 갖고 있어요. 엄격하고 완고한 원칙주의자, 우직한 집념과 끈기의 모습이 있는 한편 풍류를 즐기는, 낭만주의자 기질도 있죠. 문화평론가들이 쓴 책을 보면 대통령의 애창곡인 ‘아메리칸 파이’는 물질적 자유를, ‘빈센트’는 정신적 자유를 갈구하는 노래이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밥상머리 교육 등을 통한 아버지의 자유주의 학풍 및 가치관이 굉장히 영향을 많이 미친 거죠.”
윤 대통령은 후보 시절 방송에 출연해 “아버지는 원칙을 중요시하는 분이었다. 대학 다닐 때도 늦게까지 놀다가 아버지께 맞기도 했다”고 했다. 아들에게는 엄격하면서도 다정했다. 윤 대통령이 검사로 일하던 때는 입버릇처럼 ‘부정한 돈을 받지 마라’고 가르쳤다. 그러면서 항상 빈 지갑을 슬쩍 채워줬다고 한다. 32세 나이에 사법시험에 합격한 아들이 동기들 사이에서 돈 쓸 일이 많을 걸 알고 행한 배려다.
대통령 당선 후에는 ‘국민만 바라보라’고 조언했다. 김인규 교수는 “선생님이 덕을 많이 쌓았기 때문에 윤 대통령이 탄생한 게 아닌가 한다”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참모들에게 이따금씩 부친과의 추억담을 이야기하곤 했다고 한다. 특히 “아버지와 식사 중 대화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과 국가관, 경제관을 형성하게 됐다”며 그리워했다는 전언이다. 올해 2월 연세대 신촌캠퍼스 학위수여식에 참석한 윤 대통령은 “연세의 교정은 제게 남다른 의미가 있다”며 “아버지 연구실에서 방학 숙제를 하고 수학 문제도 풀었다”고 했다.
지난 8월 17일. 윤기중 교수의 운구(運柩) 차량은 제자와 아들과의 추억이 있는 연세대 상경대 건물 주위를 한 바퀴 돌아 장지로 향했다. “잘 자라줘서 고맙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건넨 마지막 말이었다.⊙
※ 더 많은 기사는 <월간조선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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