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탈 살육 왕하 25:8-17
07월 26일 (화)
약탈 살육 왕하 25:8-17
8.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열아홉째 해 오월 칠일에 바벨론 왕의 신복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9.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귀인의 집까지 불살랐으며 10. 시위대장에게 속한 갈대아 온 군대가 예루살렘 주위의 성벽을 헐었으며 11. 성 중에 남아 있는 백성과 바벨론 왕에게 항복한 자들과 무리 중 남은 자는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모두 사로잡아 가고 12. 시위대장이 그 땅의 비천한 자를 남겨 두어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와 농부가 되게 하였더라 13. 갈대아 사람이 또 여호와의 성전의 두 놋 기둥과 받침들과 여호와의 성전의 놋 바다를 깨뜨려 그 놋을 바벨론으로 가져가고 14. 또 가마들과 부삽들과 부집게들과 숟가락들과 섬길 때에 쓰는 모든 놋그릇을 다 가져갔으며 15. 시위대장이 또 불 옮기는 그릇들과 주발들 곧 금으로 만든 것이나 은으로 만든 것이나 모두 가져갔으며 16. 또 솔로몬이 여호와의 성전을 위하여 만든 두 기둥과 한 바다와 받침들을 가져갔는데 이 모든 기구의 놋 무게를 헤아릴 수 없었으니 17. 그 한 기둥은 높이가 열여덟 규빗이요 그 꼭대기에 놋 머리가 있어 높이가 세 규빗이요 그 머리에 둘린 그물과 석류가 다 놋이라 다른 기둥의 장식과 그물도 이와 같았더라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귀인의 집까지 불살랐으며 시위대장에게 속한 갈대아 온 군대가 예루살렘 주위의 성벽을 헐었으며>(9-10절).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자기를 배신한 시드기야를 징계하기 위해 다시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포위 2년만인 시드기야 11년 4월 9일에 예루살렘을 점령했습니다. 본절 이하에 기록된 사건들은 모두 예루살렘 멸망 후 약 한 달 만에 발생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솔로몬 왕 제11년 8월에 완공됐고, 그후 13년이 지난 솔로몬 제24년에 왕궁이 완공되었습니다. 이 때가 B.C. 946년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성전과 왕궁이 시드기야 11년 곧 B.C. 586년에 불살라진 것입니다. 성전 건축 453년 만에, 왕궁 건축 440년 만에 완전히 파괴된 것입니다. 물론 예루살렘 성벽의 경우는 전체가 헐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벽 주요 부분들이 파괴되었는데 그럼에도 예루살렘 성벽은 곧 하나님의 보호, 무한하신 능력, 평강, 피난처, 구원 등을 의미했기 때문에 그렇게 부분적으로 헐린 것임에도 그것은 곧 예루살렘의 멸망을 의미하고 상징하기에 족했습니다. <시위대장이 그 땅의 비천한 자를 남겨두어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와 농부가 되게 하였더라>(12절). 이것은 당시 바벨론이 유다에 소수 농부들을 남겨놓음으로써 계속 농사를 짓게 했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그러한 농사는 포로시대 이후까지도 계속되었습니다. 특히 바벨론은 정책적으로 총독 그달리야를 유다에 보내 경작을 더욱 활성화하도록 했는데, 그것은 그들이 식민지 유다로부터 계속해서 조공을 거둬들이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거룩하게 지은 성전을 파괴당하게 하셨을 뿐 아니라 성전 내부의 모든 기구들까지도 이방인들의 손에 붙여 노략질 당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① 외형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의 죄에 대해 크게 진노하신 심판의 표시이고, ② 암시적으로는 메시야, 즉 인류의 구원자가 오실 때 모든 외형적인 제사 제도가 폐지되고 오직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징표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성전을 버리셨다는 것은 지상적이고 가시적인 건물이 결코 궁극적이고 영원한 예배의 처소가 될 수는 없음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 <성전의 두 놋 기둥>(13절)의 이름을 적어보십시오(왕상 7:15-22).
- <성전의 놋 바다>(13절)는 그 용도가 무엇이었을까요(대하 4:1-6)? - 예루살렘 성전을 지키는 문지기(18절)들은 모두 몇 명이었습니까(대상 26:17-18)? 주님, 갈대아 사람들이 왕궁과 성전을 파괴하고 각종 성전 기구들까지 다 약탈해 갔습니다.
나라의 지도자들을 살육하고 또 수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이제 유다라는 나라가 완전히 사라졌고, 이는 여호수아에 의해 약속의 땅 가나안이 정복된 지 약 820년 만에 일어난 비극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었지만 그들이 범죄하자 하나님이 그렇게 심판하신 역사를 통해 저희로 하여금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닫게 해주시옵소서. |
|
디지털 문해력
“글자는 읽을 줄 알지만(중략), 고도로 발달한 디지털 지식 정보 기술
사회를 살아가지만 눈 앞에 펼쳐진 정보와 텍스트와 미디어를 맥락화 하여 정확하게 분석적으로 읽지 못하는 사람들(중략), 기계만도 못한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제대로 리터러시를 배워야 합니다.” 조병영 저(著) 《읽는 인간 리터러시를 경험하라》 (샘앤파커스, 113-114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우리는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여러 의미와 지식이나 정보 등을 전달하며 소통합니다. 이러한 표현 소통의 방식, 방법들이‘기호’입니다. 즉, 우리는 기호로써 소통하고 있는데, 기호를 읽고 쓰는 것이 리터러시 (문해력)입니다. 기호 중에 가장 친숙한 기호가 ‘글(문자)’입니다. 글을 잘 읽고 쓰는 것이 문해력의 시작이고 핵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글 만이 아니라 사진, 동영상, 인포그래픽 등 수많은 미디어 기호를 읽을 줄 알아야 하는 현실 속에 있습니다. 읽어야 할 기호들이 상당히 많아진 것입니다. 분명 문자가 가장 핵심적이고 기본적이고 가장 중요한 의사소통의 기호이지만, 지금의 디지털 사회에서는, 다양한 방식의 시각 적, 청각적, 공감각적인 기호들이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디지털 기호들을 읽을 줄 아는 ‘디지털 리터러시’도 필요합니다. 분명 우리는 아날로그 세계 뿐만이 아니라 디지털 세계 속에서도 살아 갑니다. 그리고 더욱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아날로그 세계 뿐 아니라, 디지털 세계속에서도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 악한 마귀가 디지털 세 계를 어둠의 세계로 장악하려는 시도를 막아야 합니다. 디지털을 통해 서도 전도 선교 구제를 실천하여 디지털 세계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 도록 하는 시대적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오.” (딤전6:15b) |
|
누가복음 1장47절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and my spirit rejoices in God my Savior, |
|
인정 욕구
설교자도 인정 욕구가 있다. 인정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 설교자는 청중을 외면하거나 무시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러나 인정 욕구가 지나쳐 인정 중독에 이른다면 치명적이다. 설교자가 인정받아야 할 최고의 청중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인정에 목마르고 하나님의 인정에 중독된다면 사람의 인정에서 자유 할 수 있다. 그래도 가끔 사람에게 인정받아야 한다. 설교자 역시 사람이며 사람 사이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지혁철의 [설교자는 누구인가] 중에서- 우리는 무엇을 하면서 왜 하는지? 누구에게 하는지?에 대한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목적이 분명하지 않으면 바라는 소원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뜻을 잘 전달하는 것이 설교의 목적이라면 우리는 사람의 인정이 없어도 기쁨과 만족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 잘한다는 칭찬이 목적이 되면 말씀은 온데간데없고 세상 화려한 미사여구만 늘어놓게 됩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것에 목적을 두면 하나님의 뜻은 없어지게 됩니다. |
07월 26일 (화)
약탈 살육 왕하 25:8-17
8.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열아홉째 해 오월 칠일에 바벨론 왕의 신복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9.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귀인의 집까지 불살랐으며 10. 시위대장에게 속한 갈대아 온 군대가 예루살렘 주위의 성벽을 헐었으며 11. 성 중에 남아 있는 백성과 바벨론 왕에게 항복한 자들과 무리 중 남은 자는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모두 사로잡아 가고 12. 시위대장이 그 땅의 비천한 자를 남겨 두어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와 농부가 되게 하였더라 13. 갈대아 사람이 또 여호와의 성전의 두 놋 기둥과 받침들과 여호와의 성전의 놋 바다를 깨뜨려 그 놋을 바벨론으로 가져가고 14. 또 가마들과 부삽들과 부집게들과 숟가락들과 섬길 때에 쓰는 모든 놋그릇을 다 가져갔으며 15. 시위대장이 또 불 옮기는 그릇들과 주발들 곧 금으로 만든 것이나 은으로 만든 것이나 모두 가져갔으며 16. 또 솔로몬이 여호와의 성전을 위하여 만든 두 기둥과 한 바다와 받침들을 가져갔는데 이 모든 기구의 놋 무게를 헤아릴 수 없었으니 17. 그 한 기둥은 높이가 열여덟 규빗이요 그 꼭대기에 놋 머리가 있어 높이가 세 규빗이요 그 머리에 둘린 그물과 석류가 다 놋이라 다른 기둥의 장식과 그물도 이와 같았더라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귀인의 집까지 불살랐으며 시위대장에게 속한 갈대아 온 군대가 예루살렘 주위의 성벽을 헐었으며>(9-10절).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자기를 배신한 시드기야를 징계하기 위해 다시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포위 2년만인 시드기야 11년 4월 9일에 예루살렘을 점령했습니다. 본절 이하에 기록된 사건들은 모두 예루살렘 멸망 후 약 한 달 만에 발생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솔로몬 왕 제11년 8월에 완공됐고, 그후 13년이 지난 솔로몬 제24년에 왕궁이 완공되었습니다. 이 때가 B.C. 946년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성전과 왕궁이 시드기야 11년 곧 B.C. 586년에 불살라진 것입니다. 성전 건축 453년 만에, 왕궁 건축 440년 만에 완전히 파괴된 것입니다. 물론 예루살렘 성벽의 경우는 전체가 헐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벽 주요 부분들이 파괴되었는데 그럼에도 예루살렘 성벽은 곧 하나님의 보호, 무한하신 능력, 평강, 피난처, 구원 등을 의미했기 때문에 그렇게 부분적으로 헐린 것임에도 그것은 곧 예루살렘의 멸망을 의미하고 상징하기에 족했습니다. <시위대장이 그 땅의 비천한 자를 남겨두어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와 농부가 되게 하였더라>(12절). 이것은 당시 바벨론이 유다에 소수 농부들을 남겨놓음으로써 계속 농사를 짓게 했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그러한 농사는 포로시대 이후까지도 계속되었습니다. 특히 바벨론은 정책적으로 총독 그달리야를 유다에 보내 경작을 더욱 활성화하도록 했는데, 그것은 그들이 식민지 유다로부터 계속해서 조공을 거둬들이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거룩하게 지은 성전을 파괴당하게 하셨을 뿐 아니라 성전 내부의 모든 기구들까지도 이방인들의 손에 붙여 노략질 당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① 외형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의 죄에 대해 크게 진노하신 심판의 표시이고, ② 암시적으로는 메시야, 즉 인류의 구원자가 오실 때 모든 외형적인 제사 제도가 폐지되고 오직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징표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성전을 버리셨다는 것은 지상적이고 가시적인 건물이 결코 궁극적이고 영원한 예배의 처소가 될 수는 없음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 <성전의 두 놋 기둥>(13절)의 이름을 적어보십시오(왕상 7:15-22).
- <성전의 놋 바다>(13절)는 그 용도가 무엇이었을까요(대하 4:1-6)? - 예루살렘 성전을 지키는 문지기(18절)들은 모두 몇 명이었습니까(대상 26:17-18)? 주님, 갈대아 사람들이 왕궁과 성전을 파괴하고 각종 성전 기구들까지 다 약탈해 갔습니다.
나라의 지도자들을 살육하고 또 수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이제 유다라는 나라가 완전히 사라졌고, 이는 여호수아에 의해 약속의 땅 가나안이 정복된 지 약 820년 만에 일어난 비극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었지만 그들이 범죄하자 하나님이 그렇게 심판하신 역사를 통해 저희로 하여금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닫게 해주시옵소서. |
|
디지털 문해력
“글자는 읽을 줄 알지만(중략), 고도로 발달한 디지털 지식 정보 기술
사회를 살아가지만 눈 앞에 펼쳐진 정보와 텍스트와 미디어를 맥락화 하여 정확하게 분석적으로 읽지 못하는 사람들(중략), 기계만도 못한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제대로 리터러시를 배워야 합니다.” 조병영 저(著) 《읽는 인간 리터러시를 경험하라》 (샘앤파커스, 113-114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우리는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여러 의미와 지식이나 정보 등을 전달하며 소통합니다. 이러한 표현 소통의 방식, 방법들이‘기호’입니다. 즉, 우리는 기호로써 소통하고 있는데, 기호를 읽고 쓰는 것이 리터러시 (문해력)입니다. 기호 중에 가장 친숙한 기호가 ‘글(문자)’입니다. 글을 잘 읽고 쓰는 것이 문해력의 시작이고 핵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글 만이 아니라 사진, 동영상, 인포그래픽 등 수많은 미디어 기호를 읽을 줄 알아야 하는 현실 속에 있습니다. 읽어야 할 기호들이 상당히 많아진 것입니다. 분명 문자가 가장 핵심적이고 기본적이고 가장 중요한 의사소통의 기호이지만, 지금의 디지털 사회에서는, 다양한 방식의 시각 적, 청각적, 공감각적인 기호들이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디지털 기호들을 읽을 줄 아는 ‘디지털 리터러시’도 필요합니다. 분명 우리는 아날로그 세계 뿐만이 아니라 디지털 세계 속에서도 살아 갑니다. 그리고 더욱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아날로그 세계 뿐 아니라, 디지털 세계속에서도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 악한 마귀가 디지털 세 계를 어둠의 세계로 장악하려는 시도를 막아야 합니다. 디지털을 통해 서도 전도 선교 구제를 실천하여 디지털 세계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 도록 하는 시대적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오.” (딤전6:15b) |
|
누가복음 1장47절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and my spirit rejoices in God my Savior, |
|
인정 욕구
설교자도 인정 욕구가 있다. 인정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 설교자는 청중을 외면하거나 무시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러나 인정 욕구가 지나쳐 인정 중독에 이른다면 치명적이다. 설교자가 인정받아야 할 최고의 청중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인정에 목마르고 하나님의 인정에 중독된다면 사람의 인정에서 자유 할 수 있다. 그래도 가끔 사람에게 인정받아야 한다. 설교자 역시 사람이며 사람 사이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지혁철의 [설교자는 누구인가] 중에서- 우리는 무엇을 하면서 왜 하는지? 누구에게 하는지?에 대한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목적이 분명하지 않으면 바라는 소원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뜻을 잘 전달하는 것이 설교의 목적이라면 우리는 사람의 인정이 없어도 기쁨과 만족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 잘한다는 칭찬이 목적이 되면 말씀은 온데간데없고 세상 화려한 미사여구만 늘어놓게 됩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것에 목적을 두면 하나님의 뜻은 없어지게 됩니다. |
'Faith - Hymn'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용서하지 말라 신 13:6-11 (0) | 2022.07.28 |
---|---|
유다 땅에 남은 자들 왕하 25:18-30 (0) | 2022.07.27 |
예루살렘의 몰락 왕하 25:1-7 (0) | 2022.07.25 |
악을 제하라 신 13:1-5 (0) | 2022.07.23 |
가감하지 말라!신 12:29-32 외 1 (0) | 2022.07.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