앗수르 왕이 왕하 17:24-33
06월 14일 (화)
앗수르 왕이 왕하 17:24-33
24. 앗수르 왕이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두매 그들이 사마리아를 차지하고 그 여러 성읍에 거주하니라
25. 그들이 처음으로 거기 거주할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사자들을 그들 가운데에 보내시매 몇 사람을 죽인지라 26.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앗수르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왕께서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옮겨 거주하게 하신 민족들이 그 땅 신의 법을 알지 못하므로 그들의 신이 사자들을 그들 가운데에 보내매 그들을 죽였사오니 이는 그들이 그 땅 신의 법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니라 27. 앗수르 왕이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그 곳에서 사로잡아 온 제사장 한 사람을 그 곳으로 데려가되 그가 그 곳에 가서 거주하며 그 땅 신의 법을 무리에게 가르치게 하라 하니 28. 이에 사마리아에서 사로잡혀 간 제사장 중 한 사람이 와서 벧엘에 살며 백성에게 어떻게 여호와 경외할지를 가르쳤더라 29. 그러나 각 민족이 각기 자기의 신상들을 만들어 사마리아 사람이 지은 여러 산당들에 두되 각 민족이 자기들이 거주한 성읍에서 그렇게 하여 30. 바벨론 사람들은 숙곳브놋을 만들었고 굿 사람들은 네르갈을 만들었고 하맛 사람들은 아시마를 만들었고 31. 아와 사람들은 닙하스와 다르닥을 만들었고 스발와임 사람들은 그 자녀를 불살라 그들의 신 아드람멜렉과 아남멜렉에게 드렸으며 32. 그들이 또 여호와를 경외하여 자기 중에서 사람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택하여 그 산당들에서 자기를 위하여 제사를 드리게 하니라 33. 이와 같이 그들이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 <앗수르 왕이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두매 그들이 사마리아를 차지하고 그 여러 성읍에 거주하니라>(24절). 당시 앗수르의 강제 이송 정책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다른 모든 속국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바벨론은 당시에 앗수르 통치 아래 있었지만 아직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국가적 반란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바벨론 사람들이 대거 이스라엘 지역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던 것입니다. 대신 이스라엘 사람들은 <고향에서 앗수르에 사로잡혀 가 오늘까지 이르렀다>(23절)고 합니다. 이는 이스라엘도 다메섹처럼 조공국에서 식민지로 전락했음을 의미하며 그 식민지는 결국 종족과 종교의 혼합으로 인해 오랜 후대에 이르기까지 멸시를 당하게 하는 치명적인 요인이 됩니다. <앗수르 왕이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그곳에서 사로잡아 온 제사장 한 사람을 그곳으로 데려가되 그가 그곳에 가서 거주하며 그 땅 신의 법을 무리에게 가르치게 하라>(27절). <사로잡아 온 제사장 한 사람>은 이방 땅 앗수르로 잡혀갔던 이스라엘의 제사장을 가리키는데, 그런 그가 이제 다시 여호와의 법을 사마리아에 거주하는 이방인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이스라엘로 되돌아오게 되었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고대 이방인들의 종교적 심성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라 하겠습니다. 다신 사상에 사로잡혀 있었던 앗수르 왕 역시도 이스라엘의 수호신이신 여호와를 달램으로써 행여 자신의 제국에 미칠지도 모르는 재앙을 사전에 막고자 한 것입니다. <그들이 또 여호와를 경외하여 자기 중에서 사람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택하여 그 산당들에서 자기를 위하여 제사를 드리게 하니라>(32절). 시간이 흐르면서 혼합된 여호와 종교가 더욱 널리 보급되자 그들은 더 많은 제사장이 필요 했습니다. 그래서 임의로 자기들 중에서 제사장을 뽑아 제사를 주제하게 했는데 이것은 명백한 하나님의 율법 위반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아론의 후손, 레위 족속의 후예 가운데서만 제사장을 택하라고 명령하셨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제멋대로 제사장을 세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전통은 이미 여로보암에 의해 세워진 것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숱한 사람들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며 많은 권능을 행하지만 정작 주님은 훗날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고 선언하실지도 모릅니다. 성경은 그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고 자신의 영광만을 추구하며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 바벨론의 유명한 전쟁의 신 <네르갈>(30절)에 관해 아는 대로 적어보십시오.
- 아람의 여신 <아시마>(30절)에 관해 아는대로 적어보십시오. - 사람들이 그 자녀를 불살라 바쳤다는 아람의 신 <아드람멜렉>과 메소보다미아의 신 <아람멜렉>(31절)에 관해 아는대로 적어보십시오. 주님,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고 그 와중에 여호와 신앙마저 이방의 온갖 종교들과 혼합되어 극심한 혼란과 무질서한 타락을 연출하던 과거 이스라엘 역사의 어두운 한 때를 봅니다. 저희로 하여금 늘 근신하며 자신을 살피게 하사 어떤 경우에도 그들처럼 신앙 양심을 범하며 우상 숭배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성령으로 지켜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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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자 스티븐 호킹도 인정한 것
“우리의 우주와 그곳의 법칙들은 우리를 지탱하기 위해서 맞춤형으로
설계된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존재하려면,그 설계를 변경할 여지는 거의 없을 듯하다. 이것은 쉽게 설명되지 않는 행운이다.” 스티븐 호킹,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 공저(共著) 전대호 역(譯) 《위대한 설계》 (까치, 205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인류 원리’라는 과학 용어가 있습니다. 우주가 마치 인간이 존재할 수 있도록 누군가가 처음부터 미세하게 조절해둔 것처럼 보인다는 뜻 입니다. 현대 과학을 통해 밝혀진 우주는 인간이 살기에 너무나 완벽 하고 조화롭습니다. 마치 세밀하게 조절되어 인간이 살 수 있는 조건을 갖추도록 미리 준비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이런 우주를 가리켜 ‘미세-조정된 우주(fine-tuned universe)’라고 부릅니다. 다시 말하지 만, 여기서 미세 조정었다는 것은 인간이 탄생하고 존재할 수 있는 적 합한 환경을 만들어내기 위해 우주의 물리적 조건이 마치 누군가에 의해 미리 세밀하게 조절된 것처럼 보인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미세 조절은 인류를 위해 준비된 것 같기 때문에 이 특징을 가리켜 ‘인류 원리’ 라고 부릅니다. 심지어는 무신론자 스티븐 호킹마저도 우주는 마치 인 간을 탄생시키기 위해 잘 준비된 것처럼 보인다고 했습니다. 당연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밀하고 완벽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0.00000001%의 어긋남도 없는 우주 상수들의 완벽한 조화를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
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 계하지 못할지니라.” (롬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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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19장 12절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 'Do not swear falsely by my name and so profane the name of your God. I am the LORD. Leviticus 19:12 [NI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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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경건한 사람
모든 배움의 시작은 머리로부터 시작한다
영적인 사람이 가끔 무시하는 것이 있는데 하나님은 영이시니 인간의 지식으로 알 수 없다 모든 지식은 필요없다“.이렇게 주장하다 이단이 된 초대교회 성도들을 ”영지주의자“라고 한다. 이 사람들은 툭하면 영이나 성령을 이야기하면서 인간의 지식과 이성을 무시했다. 그 결과 이단으로 떨어졌다. 랍비 힐렐은.“무식한 자는 진실로 경건할 수 없고 부끄러워 하는 자는 참으로 배울 수 없으며 성질이 급한 자는 결코 가르칠 수 없다”.했다. 공부를 많이 했다고 자동적으로 경건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무식해서는 절대 경건할 수 없다. 경건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는 데 하나님의 말씀을 잘 모르는 데 어떻게 경건할 수가 있겠는가? - 이윤재 목사의 ‘넘어져도 배우면서 자란다’에서- 아무리 쉬운 성경공부라해도 마음속에 쏙쏙 박히고 은헤되는 경우는 교재가 좋아야 은혜받는 것이 아니고 강사가 박사여야 은혜받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 가난해야 은혜받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이 갈급해 있으니까요. 그래서 신사는 옷 잘 입는 사람이 아닙니다 좋은 학교 나오고 멋 부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마음이 가난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 배우기를 힘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배우는 사람이 정말 경건한 사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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