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훈 칼럼] 삼성 총수 입에서 튀어 나온 “목숨 걸고”란 말
한국 기업의 성공은
글로벌 전쟁터에서
적들의 시체 위에
사활 걸고 쌓아 올린
피의 전리품이다…
기업은 목숨을 거는데
정치는 무엇을 걸 텐가
입력 2022.06.03 00:00
이재용 삼성 부회장 입에서 “목숨 걸고”란 말이 나올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지난주 ‘450조원 투자’ 계획을 내놓은 그는 기자 질문에 “숫자는 모르겠고 그냥 목숨 걸고 하는 것”이라고 했다. 신중한 스타일의 이 부회장으로선 이례적으로 거친 표현이었다. 나는 “마누라·자식 빼고 다 바꿔라” 이후 이보다 더 실감하고 날것 그대로인 기업인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글로벌 산업 현장은 포연이 자욱한 전쟁터와도 같다. 죽고 죽이는 생존 경쟁의 한복판에 서있는 기업인에게 ‘목숨 건다’ 이상으로 절실한 소리가 어디 있겠는가.
지난 달 20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 공장을 방문한 자리에서 이재용 부회장(맨 오른쪽)이 지나 러몬도 미 상무장관(오른쪽 두번째)에게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경영에 조금이라도 몸담았던 사람이라면 그 말에 한 치 과장도 없음을 안다. 경쟁자는 턱밑까지 추격해오고 새로운 도전자가 끊임없이 나타나 잡아먹겠다고 덤벼든다. 앞길은 잘 보이지 않는다. 복잡한 변수로 가득 찬 미래 앞에서 기업인은 오로지 직관에 의존해 불확실성의 정글을 헤쳐가야 한다. 책임은 최종적이고도 비(非)가역적이다. 한 번의 판단 착오, 한 번의 결정 오류가 기업을 몰락으로 이끌 수 있다. 사활을 거는 절박한 심정으로 불투명한 미래에 베팅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부회장뿐 아니라 모든 기업인들이 다 그럴 것이다.
우리는 삼성 반도체의 성공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그것은 숱하게 죽을 고비를 넘기고 쌓아 올린 기적 같은 성취다. 위기는 1984년 삼성이 반도체에 뛰어들자마자 바로 찾아왔다. 천신만고 끝에 64KD램 양산에 성공하자 일본 업체들이 저가 공세를 펼치며 죽이겠다고 달려들었다. 견디다 못한 미국 인텔이 두 손 들고 메모리 사업을 포기했다. 삼성도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손실이 쌓이고 창고엔 재고가 넘쳤다. 그런데도 이병철 회장은 생산 라인을 증설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임원들은 “회사가 망한다”며 사색이 됐지만 이 회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런데 예상 못한 행운이 찾아왔다. 미국 정부가 일본 반도체에 대한 무역 보복에 나선 것이었다. 미·일 반도체 전쟁으로 일본 업계는 타격을 입었고, 삼성에 반사 이익이 돌아갔다. 출혈을 감수하고 생산 라인을 미리 증설해 놓은 것이 대박을 터트린 것이다. 사람들은 이 결과만 보고 이병철의 선견지명에 감탄한다. 그러나 천하의 이병철이라도 미래를 장담했을 리는 없다. 그냥 앉아서 죽을 순 없기에 죽기 살기로 선제 공격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2007년, 이번엔 대만 업체들의 선공으로 반도체 ‘치킨 게임’이 발발했다. D램 값이 10분의 1 토막 나는 살벌한 덤핑 공세 속에 세계 2위 독일 키몬다가 파산했다. 그 3년 뒤 벌어진 2차 치킨게임에선 일본 엘피다가 나가떨어졌다. 약자를 죽여 시장을 나눠 먹는 약육강식의 정글판에서 미국·독일·일본세가 차례로 탈락하고 삼성·SK하이닉스는 끝까지 버텨냈다. 그래서 세계 1·2위가 됐다. 한국 반도체의 성공은 경쟁자의 시체 위에 쌓아 올린 피의 전리품이다.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남은 모든 한국 기업들이 다 마찬가지다.
기업들이 싸워야 할 상대는 밖에만 있지 않다. 포퓰리즘 정치라는 내부의 적과도 격투해야 한다. 기업을 쥐어짜야 표(票)가 되는 줄 아는 후진적 정치가 기업들 뒷덜미를 잡고 있다. 사고가 나면 무조건 경영진을 형사 처벌하는 중대재해처벌법, 저녁만 되면 연구원들을 사무실에서 내쫓는 주52시간제, 노조가 파업해도 대체 인력 투입이 불가능한 노동법 등 전 세계에서 가장 경직적인 한국형 규제들이 하나둘이 아니다. 한번도 돈 버는 데 목숨 걸어본 적 없는 정치인들이 밖에 나가 싸우는 기업들 등에 총질을 해대고 있다.
‘정치는 4류’라 했던 이건희 회장의 일갈은 27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것은 한국 정치가 바깥 세상과 경쟁하려 하질 않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은 나라 안에서 편 갈라 진영 싸움만 하면 된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글로벌 관점에서 정치는 갑(甲)이 아니다. 기업들이 세계 지도를 펼쳐 놓고 공장 지을 나라를 고르는 세상이다. 전 세계 정부와 의회, 지자체가 기업에게 ‘선택’ 받기 위해 더 좋은 환경, 더 매력적인 조건을 제공하며 치열하게 경쟁한다. 그 흐름에서 한국 정치만 열외다. 그러니 아직도 4류다.
17명의 시·도 지사, 226명의 시·군·구 단체장이 새로 선출됐다. 선거에서 이들은 다른 당 후보와 싸웠지만 진짜 라이벌은 나라 밖에 있다. 서울시의 경쟁자는 베이징·도쿄·싱가포르이고, 경기도의 라이벌은 광둥성·오사카부·텍사스주다. 국회도 마찬가지다. 300명 의원들이 미국·중국·일본 의회를 상대로 누가 더 좋은 제도를 만드냐의 입법 경쟁을 벌여야 한다. 정치가 글로벌 경쟁에서 이겨야 경제가 산다. 기업들은 목숨을 거는데 정치는 무엇을 걸 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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