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이세벨의 최후 왕하 9:30-37

鶴山 徐 仁 2022. 4. 19. 10:33

이세벨의 최후 왕하 9:30-37

 
 
04월 19일 (화)
   
이세벨의 최후 왕하 9:30-37



30. 예후가 이스르엘에 오니 이세벨이 듣고 눈을 그리고 머리를 꾸미고 창에서 바라보다가
31. 예후가 문에 들어오매 이르되 주인을 죽인 너 시므리여 평안하냐 하니
32. 예후가 얼굴을 들어 창을 향하고 이르되 내 편이 될 자가 누구냐 누구냐 하니 두어 내시가 예후를 내다보는지라
33. 이르되 그를 내려던지라 하니 내려던지매 그의 피가 담과 말에게 튀더라 예후가 그의 시체를 밟으니라
34. 예후가 들어가서 먹고 마시고 이르되 가서 이 저주 받은 여자를 찾아 장사하라 그는 왕의 딸이니라 하매
35. 가서 장사하려 한즉 그 두골과 발과 그의 손 외에는 찾지 못한지라
36. 돌아와서 전하니 예후가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그 종 디셉 사람 엘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라 이르시기를 이스르엘 토지에서 개들이 이세벨의 살을 먹을지라
37. 그 시체가 이스르엘 토지에서 거름같이 밭에 있으리니 이것이 이세벨이라고 가리켜 말하지 못하게 되리라 하셨느니라 하였더라
 
<예후가 이스르엘에 오니 이세벨이 듣고 눈을 그리고 머리를 꾸미고 창에서 바라보다가 예후가 문에 들어오매 이르되 주인을 죽인 너 시므리여 평안하냐>(30-31절).
23세의 손자를 둔(8:26) 노년의 이세벨이 이같이 치장을 한 것은 황태후로서의 위엄을 갖춤으로 예후를 두렵게 하겠다는 오만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렇게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의 죄를 가증스러움으로 은폐하려 했기에 오늘날까지도 이세벨은 악녀의 상징 같은 존재로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이세벨의 비참한 최후에 대해서는 이미 엘리야에 의해 예언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곧 하나님께서 그녀에게도 회개할 기회를 주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우상 숭배를 멈추지 않았고 결국은 모든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그 우상 숭배에 빠지게 했고, 마침내는 백성들마저도 다 그렇게 했습니다. 따라서 그 여자와 함께 우상에 빠진 백성들도 처참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임을 당했습니다(19:18-25).


<그 시체가 이스르엘 토지에서 거름 같이 밭에 있으리니 이것이 이세벨이라고 가리켜 말하지 못하게 되리라 하셨느니라 하였더라>(37절).
사실 이세벨의 죄는 자신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녀가 타락시킨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핏값까지도 포함됩니다. 그래서 그녀는 왕비임에도 무덤에 묻히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시신마저도 부정하게 여겨졌던 개들에게 먹히는 비극을 당해야 했던 것입니다. 


<예후가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그 종 디셉 사람 엘리야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라 이르시기를 이스르엘 토지에서 개들이 이세벨의 살을 먹을지라>(36절).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예후의 모습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하여 교훈을 삼을 수 있습니다. 
① 예후는 하나님의 명령에 철저했을 뿐 아니라 그 명령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도 대단히 민첩하고 신속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기회를 재빨리 포착하여 전심전력으로 일을 진행시켜 나갔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명을 맡은 자는 좌우로 치우치거나 머뭇거림 없이 허리를 동여매고 전력으로 질주하여야 합니다. 
② 예후는 이 일을 준행함에 있어 주위의 동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을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마찬가집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일을 수행해 갈 때 하나님뿐 아니라 사람들로부터도 신뢰와 인정을 받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 본문 30절과 신약 베드로전서 3:3-4 말씀을 비교해보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단장은 어떤 것인지 확인해보십시오.
- <시므리>(31절)는 어떤 왕이었습니까?
- 이세벨의 죽음에 대한 엘리야의 예언을 열왕기상 21:23에서 다시 한번 확인해보십시오.
 
주님, 이세벨의 소름끼치는 최후는 오늘 저희에게도 인간의 권력과 영광의 무상함과 덧없음을 깨우쳐줍니다. 저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공의를 멸시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이 반드시 심판하사 이세벨처럼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거기 너 있었는가?
 
“이 작품들에서 렘브란트는 상반된 모습으로 등장한다.〈십자가에
달리심〉에선 빵떡 모자를 쓰고 십자가를 올리는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내리심〉에선 온기를 잃어버린 싸늘한 그리스도를 두 팔로
안는 슬픔에 잠긴 사람으로 형용되고 있다.”


서성록 저(著) 《렘브란트의 거룩한 상사력》(예영커뮤니케이션, 40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는 신앙적인 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
특히 그 작품들에 자신을 등장시켰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심’에서는
로마 병정들과 같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고 있는 죄인의 모습으로,
‘빌라도의 법정’ ‘십자가에서 내리심’ ‘순교자 스테판’에서는
군중 속에 숨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넣었고, ‘돌아온 탕자’에서는 자
신의 모습을 탕자로 그렸습니다. 그는 “내가 그 자리에 있었고 나도
공범”이라며 고개 숙이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 너 있었는가’라는
제목의 흑인 영가의 가사와 같이 내가 거기 있었던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 당시 로마 총독 빌라도는 소리치는 군중의 요청대로 예수
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줍니다. 예수님이 죄 없는 존재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지만, 진실보다는 자신의 권력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는 예
수님을 내어 준 뒤 손을 씻었습니다. 자신하고는 상관이 없는 일이고,
나는 책임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빌라도는 권력이, 바리새인들은 자신
들이 ‘의로와 보이는 것’이 예수님보다 더욱 중요했습니다.
예수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그 무엇을 가리켜 ‘우상’이라고 합니
다. 나의 우상은 무엇인가 부끄럽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요19:25)
   
잠언 1장 19절
 
이익을 탐하는 모든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
Such is the end of all who go after ill-gotten gain; it takes away the lives of those who get it.
proverbs 1:19 [NIV]
   
패배
패배가 삶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갖게 함으로써 우리의 인간 관계에 미치는 영향이란 참으로 의미 심장합니다. 만일 우리가 실패를 전혀 알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지도 않을 것입니다. 너무 많은 승리를 거둔 자는 다른 사람들의 감정 상태와 장애와 문젯거리들을에 대해 무감각하고 무관심하기 쉽습니다.
-엘스워스 칼라스의 [경험으로부터 배우기 위한 12가지 원리] 중에서-


우리 인생에 있어서 패배의 시간도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있음을 인정하는 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패배를 통해 우리는 겸손을 배웁니다. 다른 사람을 인정하게 합니다. 나의 잘남은 결코 다른 사람을 섬기는데 방해가 될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한사코 모든 일을 능수능란하게 잘 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실패를 딛고 하나님으로 인하여 다시 사는 자들의 말씀입니다.

'Faith - Hymn'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평화의 말 신 2:26-37  (0) 2022.04.21
너희는 알라 왕하 10:1-11  (0) 2022.04.20
어찌 평안이 있으랴 왕하 9:21-29  (0) 2022.04.18
찬송가 색소폰 연주  (0) 2022.04.17
그 땅을 차지하라 신 2:16-25  (0) 2022.0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