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호 감독 “血稅 받으면서 나라를 위기에 빠뜨리는 사람들이 ‘기생충’”
제2연출부 시절 동생 대학등록금 가지고
서울고 동기 최인호의 <별들의 고향> 판권 따내
최인호, “야, 구워 먹든 삶아 먹든 네 맘대로 해”
망치려고 작정하고 만들었다가 희대의 문제작이 된 <바보선언>
장원재 장원재TV대표
입력 2021.07.31 11:16
이장호(李長鎬·76)의 영화는 1970~1980년대 한국 청년문화의 자화상(自畵像)이다. 1974년, 29세의 젊은 감독 이장호가 ‘청년문화의 결정판’ 같은 영화를 개봉했다. 〈별들의 고향〉이다.
영화감독 이장호./월간조선
그가 깃발을 든 곳에서 때로는 환호가, 때로는 포연(砲煙)이 피어올랐다. 빈민가 청년들의 생존일기 〈바람 불어 좋은 날〉(1980년), 망치려고 작정했다 희대의 실험영화로 격상한 〈바보선언〉(1984년), 성(性)과 트라우마의 만남 〈무릎과 무릎 사이〉(1984년), 에로물이냐 에로물로 포장한 정치영화냐 논쟁이 일었던 〈어우동〉(1985년), 이현세 원작 만화를 영화화한 1986년 흥행 1위 〈이장호의 외인구단〉(1986년), 이제하 원작 소설로 유수의 해외영화제가 작가주의 작품으로 격찬한 로드무비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1987년)까지, 이장호가 있는 곳이 대중문화와 시대의 최전선이었다.
1972년 9월부터 1973년 9월까지 신예작가 최인호가 《조선일보》에 소설을 연재했다. 〈별들의 고향〉이다. 당시 신문 연재소설은 지금의 드라마 못지않게 장안의 화제를 모았다. 점심을 마친 직장인들이 소설 속 주인공들의 대화와 행동을 주요 화제(話題)로 삼았다. 미처 소설을 못 읽은 사람은 주변의 해설을 기다릴 정도였다.
◇영화 <별들의 고향>
자연히, 영화화에 대한 기대 또한 적지 않았다. 판권 경쟁에 관한 기사가 나올 정도였다. 이장호는 서울고 동기인 친구 최인호의 집을 급습, 버티기를 시전하며 판권을 따냈다. 군자금(軍資金)은 동생의 대학등록금. 친구라지만, 겨우 제2 연출부(조감독이 되려면 제1 연출부로 승진해야 했다)에 머물고 있던 이장호에게 영화 판권을 준다는 건 최인호로서도 흔쾌한 결정은 아니었을 터다. 최인호는 “야, 구워 먹든 삶아 먹든 네 맘대로 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도장을 찍었다.
이장호가 〈별들의 고향〉 판권을 샀다는 소문은 금방 충무로에 쫙 퍼졌다. 신상옥 감독은 “연출은 네가 하더라도 촬영은 베테랑 이형표 감독에게 맡기자”고 했다. 이장호는 “알겠다”고 답한 뒤 그날로 책상을 빼서 줄행랑을 놨다. 신상옥 감독이 나중에 “키워놓으니까 말도 없이 도망쳤다”고 섭섭해한 이유다.
“윗분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제 마음대로 영화를 만들고 싶었거든요. 화천공사에 찾아가 제작 조건으로 ‘코닥 필름 3만 자’를 달라고 했습니다. 다른 영화의 두 배 남짓 필름을 쓰겠다고 한 거죠.”
화천공사는 소설 〈별들의 고향〉의 인기를 믿고 이장호의 제안을 받아줬다. 대신 개런티는 감독협회가 정한 최저선인 40만원에 합의했다. 동생에게 빌린 등록금 15만원을 갚고 조연출에게 25만원을 주며 전투 준비를 마쳤다.
감독 경험이 없으니 콘티도 없이 즉흥 촬영이 많았지만, 서울고·홍익대 선배인 촬영기사 장석준이 이장호의 희한한 요청을 다 받아줬다. 영화음악 역시 관행을 무시한 결과다. 서울고 2년 후배 이장희와 홍익대 1년 후배 강근식에게 음악을 맡겼더니 영화를 보기도 전에 완성품을 만들어왔다. 소설만 보고 느낌에 따라 작업한 결과였다.
서두에 나오는 ‘한 잔의 추억’, 하이라이트 때 깔리는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와 ‘휘파람을 부세요’는 영화를 넘어 불후의 명곡이 되었다. 20대 초반의 가수가 청순한 목소리로 취입한, 경아가 죽을 때 들려오는 ‘난 그런 거 몰라요~ 아무것도 몰라요~ 왠지 겁이 나네요~ 그런 말 하지 말아요~’로 시작하는 ‘나는 열아홉 살이에요’도 공전의 히트를 쳤다. ‘얼굴 없는 가수’는 잠시 사라졌다 몇 년 후 허스키한 목소리로 돌아와 가요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열애’의 윤시내다.
◇ 대마초 파동
이런 과정을 거쳐 세상에 나온 〈별들의 고향〉은 단관 개봉시대에 46만 5000명의 관객을 모은다. 관객 5만명이면 대히트라고 평가하던 시절이다. 관행에 도전한 젊은 감각의 승리였다.
청년 세대는 자기 세대의 감각이 투영된 영화에 열광했다. 주인공 안인숙의 대사 “추워요, 안아주세요”와 경아의 마지막 남자 신성일의 대사 “경아, 오랜만에 같이 누워보는군”은 40여 년이 지난 오늘도 여전히 유행어의 지위를 내려놓지 않고 있다.
〈어제 내린 비〉(1974년·음악 정성조) 등 3편의 영화를 감독하며 승승장구하던 이창호가 덫에 걸린다. 대마초 파동. 1976년의 일이다.
“그땐 각 대학 앞에서 와이셔츠곽에 담은 개비 담배를 팔던 시절인데, 절반이 대마초였어요. 그만큼 흡연 문화에 관대했습니다. ‘환각’에 대한 호기심도 있어서 딱 한 번, 정말 딱 한 번 피워봤습니다. 그런데 별 감흥이 없더라고. 감흥이 있었다면 계속 피웠겠죠.”
남대문 도큐(東急)호텔 건너편에 있던 검찰, 보건사회부, 내무부, 시경 합동조사반에 불려갔다. ‘딱 한 번’뿐이라 별 생각 없이 선선히 자백했는데 예상과 달리 응암동 정신병원으로 끌려갔다. 다른 ‘대마초 연예인들’이 갇혀 있던 곳이다.
대마초 흡연의 결과는 무기한 활동 정지. 1979년 10·26이 터지고 12월 대마초 규제가 풀릴 때까지 이장호는 4년을 야인(野人)으로 지냈다.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막걸릿집을 했고, 그는 울분을 삼키며 기약 없는 독서를 하고 다른 감독들의 영화를 봤다.
본인이 가난해지니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 눈에 들어왔다. 복귀작 〈바람 불어 좋은 날〉(1980년)은 4년 면벽수행(面壁修行)이 응축된 작품이다. 발랄한 청춘 이장호는 ‘진지한 장년’으로 진화해서 돌아왔다. 감각에 의존한 즉흥적인 연출방식에서 벗어나 꼼꼼하게 콘티를 짜고 메가폰을 잡았다. 시골에서 상경한 자장면 배달부 덕배(안성기 분)와 이발사 춘식(이 감독의 동생 이영호 분), 여관 종업원 길남(고 김성찬 분)의 험난한 도시생활 생존기. 여배우로는 유지인, 김보연, 임예진이 나온다. 이 영화는 아역배우 출신 안성기의 성인역 데뷔작이기도 하다.
◇ 망치려고 작정하고 만든 영화 <바보선언>
운동권의 울분을 담은 듯한 영화는 대학 영화 동아리에 큰 울림을 전했다. 장선우, 박광수 등이 그를 찾아왔다. 사회적으로 충격을 준 화제작이 또 있다. 2019년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자 봉준호 감독이 인생영화 가운데 하나로 꼽은 작품이다. 〈어둠의 자식들〉(1981년),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1981년), 〈낮은 데로 임하소서〉(1982년)를 거쳐 나온 문제작 〈바보선언〉(1983년)이다.
“그때는 영화사마다 1년에 4편을 의무 제작하고 반대급부로 외화수입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둠의 자식들〉 속편 시나리오가 사전검열에서 계속 반려되더라고요. 우리나라의 실상을 북에서 악용할 우려가 있다면서 〈어둠의 자식들〉 〈바람 불어 좋은 날〉은 해외 반출 불가라고 하고.
반려당하면 수정본 넣고 또 반려당하고 하다가 한 달이 지났어요. 제작자는 초조하지. 의무 제작 편수를 못 채우면 그해 외화수입 쿼터를 못 받으니까. 〈별들의 고향〉 이후에는 영화가 내 천직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때는 영화를 관두고 싶더라니까. 그런데 내가 못 하겠다고 하면 제작자가 계약서 갖고 와서 법적으로 걸거나 아무튼 그냥은 안 넘어갈 것 아닙니까. 그래서 ‘영화를 찍되 망치자!’라고 생각했죠. 영화를 말아먹은 감독한텐 기회를 안 줄 테니 제가 자연스럽게 은퇴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사전검열 통과용으로 교과서적인 모범답안 시나리오를 만들고, 제목도 여러 개 만들어서 문공부 사람들에게 고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화천공사 박종찬 사장도 좋다고 그랬어요.”
훗날 문화부 장관을 하는 김명곤이 다리 저는 역할로 나오고, 이보희는 뭣도 모르고 여주인공을 했다. 저속으로 찍었다가 고속으로 찍었다가, 시나리오도 없이 현장에 나가서 다큐멘터리처럼 찍으며 좌충우돌(左衝右突)했다. 배우들의 대사가 없고, 영화 제목과 감독, 배우 이름이 나오는 타이틀도 크레파스로 그려서 썼다. 감독 자살 장면도 넣고 판소리도 넣고, 나중엔 전자오락 음향도 넣으며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게 만들었다.
시사회 하던 날, 지방 흥행사들이 하나둘 일어나더니 모두 중간에 나가버렸다. 혼자 남은 박종찬 사장이 “야, 이장호, 잠깐 사이에 개판 쳤구나!”라고 일갈할 정도였다. 이장호는 그렇게 영화계에서 강제 은퇴했고, 새마을 영화를 찍으며 생계를 해결했다.
영화 완성 후 1년이 지났다. 화천이 수입한 외화의 흥행성적이 좋지 않았다. 얼른 다른 외화를 거는 것이 해결책이었다. 외화와 한국영화를 교차 상영하는 것이 규칙이었기에 1년 전 완성 후 창고에서 잠자던 〈바보선언〉을 단성사에 걸었다. 딱 일주일만 돌리고 내리는 패전처리용이었다. 그런데 대박이 났다.
“사실은 촬영 중간에 김희수 편집 기사가 저를 부르더라고요. 자기가 편집한 걸 보여주면서 ‘이 감독, 이번 영화는 한국영화에서 못 보던 독특한 영화 같아’라는 겁니다. ‘무서운 영화가 될 것 같다’고 하기에 ‘기왕에 망치는 것, 온갖 실험을 다 하는 쪽으로 가자’라고 마음먹었죠.”
◇ 1987년 이후 시련의 연속
망치려고 작정한 영화가 극찬을 받으니 기회가 다시 왔다. 〈무릎과 무릎 사이〉(1985년), 〈어우동〉(1986년)으로 연타석 안타를 쳤고, 영화사 설립 규제가 풀린 후엔 직접 영화사 ‘판’을 설립해 〈이장호의 외인구단〉(1986년)을 제작했다.
하지만 1986년 흥행 1위 〈외인구단〉을 끝으로 흥행감독 이장호의 전성기는 다시 오지 않았다. 소설가 이제하의 원작을 AFKN 제2차 세계대전 다큐멘터리처럼 세피아 톤으로 찍은 로드 무비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1987년)는 흥행은 저조했으나 평단의 극찬을 받은 이장호의 마지막 걸작이다. 유수의 해외영화제가 그를 초청했다.
이후에 만든 영화는 대중과 평단으로부터 거의 외면당했다. 김지미의 지미필름이 제작한, 사할린 현지촬영까지 감행한 야심작 〈명자 아끼꼬 쏘냐〉(1992년) 역시 완전히 망했다. 1987년 이후 지금까지는 시련의 연속이다. 제작한 8편의 작품이 하나같이 실패했고, 집도 경매에 들어갔으며, 외도로 가정을 무너뜨렸고, 교통사고도 크게 당했다.
― 대중이 갑자기 이장호의 영화를 외면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제가 너무 상업적으로 흘렀으니까요. 매력을 잃은 겁니다. 자연도태(自然淘汰)죠.”
◇ 북한 인권 戰士가 되다
이장호의 현직은 서울영상위원회 위원장이다. 서울에서 영화를 찍고 싶은 국내외 영화사를 유치・지원하는 기관이다. 시나리오 창작, 영화 편집 등 작가와 연출가를 지원하는 공간도 운영해 영화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2011년부터 집행위원장을 맡아 진행한 북한인권국제영화제도 그의 주요 활동 무대다.
“저 자신이 실향민(失鄕民)의 아들이기도 하고, 탈북민(脫北民)이 많아지면서 저도 북한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어요. 북한의 실상을 제 눈으로 보고 싶었습니다. 첫해 초청작 중에 〈노스 코리아 VJ〉라는 다큐멘터리가 있었죠. 북한 지하 언론인들이 촬영해 넘겨준 영상을 일본의 이시마루 지로 감독이 40분으로 편집한 작품입니다. 비쩍 마른 여자아이가 남루한 옷에 거무튀튀한 얼굴로 토끼풀을 뜯고 있죠. 자기가 먹으려고 한다면서요. 나중에 그 아이가 죽었다는 기사도 나왔어요. 초등학교 5~6학년으로 보였지만, 촬영 당시 그 아이의 나이가 22세인가 23세입니다. 영양실조죠. 고운 이름을 가진 아이였는데, 부모님이 예쁜 이름을 지어줬을 때 심정을 생각하니 눈물이 막 쏟아졌습니다.”
이장호 감독은 ‘자유·정의·인권’을 기치로 내걸고 지난 6월에 열린 ‘제1회 서울락스퍼인권영화제’에서도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박선영 조직위원장(물망초 이사장·제18대 국회의원)의 권유도 있었지만, 북한인권국제영화제를 하며 느낀 문제의식이 그를 북한 인권 전사(戰士)로 만들었다.
“몇 해 전 서울역 광장에서 북한인권국제영화제 개막식을 하는데 젊은이들이 무관심하더라고요. ‘삼국시대처럼, 아예 다른 나라로 가자’는 친구들도 있고. 노숙자들은 ‘우리도 먹고살기 힘든데 왜 북한까지 도와야 하나’ 하더군요. 누군가 계속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북한인권은 사각지대(死角地帶)가 되겠구나, 이건 내 여생(餘生)의 숙제다, 숙제가 크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1970~1980년대 내내 정부에 비판적이었는데, 좌(左)에서 우(右)로 방향을 튼 겁니까.
“그때도 제가 좌라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군부독재가 영화를 마음대로 못 만들게 해서 반발했던 겁니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청렴결백했고, 국가를 위해 헌신한 점은 인정합니다. 다만, 국민과 상호 소통했다면 나라를 좀 더 발전시킬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은 지금도 합니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말고, 대한민국의 기생충은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국민의 혈세(血稅)를 받으면서도 오히려 대한민국을 위기에 빠뜨리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사람들이 바로 ‘기생충’이죠.”
― 이장호에게 영화란 무엇입니까.
“영혼을 깨우는 수단이죠. 삶의 문제, 영혼의 문제를 다루고 영혼을 살리는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 젊은 후배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균형감각을 길러라. 젊다는 건 열정이 넘치지만 다른 면에선 편견에 빠지기 쉬우니까요. 사회, 인생을 보는 눈을 기르고, 인문적 소양을 길러야 오래갈 수 있습니다.”
― 본인의 인생을 평가한다면.
“나를 이룬 것에는 위장(僞裝)이 많다. 다 청소하고 싶다. 나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고, 하나님이 계셔야만 구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어쩌면 하나님 계신 곳이 ‘별들의 고향’일지 모른다. 경아가 그곳에선 행복하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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