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살롬의 최후(삼하 18:9-15)
05월 29일 (토)
압살롬의 최후(삼하 18:9-15) 9. 압살롬이 다윗의 부하들과 마주치니라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그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 번성한 가지 아래로 지날 때에 압살롬의 머리가 그 상수리나무에 걸리매 그가 공중과 그 땅 사이에 달리고 그가 탔던 노새는 그 아래로 빠져나간지라 10. 한 사람이 보고 요압에게 알려 이르되 내가 보니 압살롬이 상수리나무에 달렸더이다 하니 11. 요압이 그 알린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보고 어찌하여 당장에 쳐서 땅에 떨어뜨리지 아니하였느냐 내가 네게 은 열 개와 띠 하나를 주었으리라 하는지라 12. 그 사람이 요압에게 대답하되 내가 내 손에 은 천 개를 받는다 할지라도 나는 왕의 아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우리가 들었거니와 왕이 당신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삼가 누구든지 젊은 압살롬을 해하지 말라 하셨나이다 13. 아무 일도 왕 앞에는 숨길 수 없나니 내가 만일 거역하여 그의 생명을 해하였더라면 당신도 나를 대적하였으리이다 하니 14. 요압이 이르되 나는 너와 같이 지체할 수 없다 하고 손에 작은 창 셋을 가지고 가서 상수리나무 가운데서 아직 살아 있는 압살롬의 심장을 찌르니 15. 요압의 무기를 든 청년 열 명이 압살롬을 에워싸고 쳐죽이니라 <압살롬이 다윗의 부하들과 마주치니라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그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 번성한 가지 아래로 지날 때에 압살롬의 머리가 그 상수리나무에 걸리매 그가 공중과 그 땅 사이에 달리고 그가 탔던 노새가 그 아래로 빠져나간지라>(9절). 결국 압살롬은 자신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던 길고 탐스런 머리칼이 상수리나무 가지에 휘감겨 공중에 달리게 되었고, 그 사실을 보고받은 다윗의 심복 요압은 <손에 작은 창 셋을 가지고 가서 상수리나무 가운데서 아직 살아 있는 압살롬의 심장을 찔렀다>(14절)고 합니다. 다른 부하들이 <내 손에 은 천 개를 받는다 할지라도 나는 왕의 아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우리가 들었거니와 왕이 ...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삼가 누구든지 젊은 압살롬을 해하지 말라 하셨나이다>(12절) 그랬지만 요압은 기어이 압살롬의 심장에 단창을 꽂고야 말았습니다. 이처럼 당시 다윗은 자신이 직면한 모진 현실의 아픔과 도전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고, 그 현실을 하나씩 통과하며 지난날의 안주했던 삶과 결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절한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스러움의 정체는 그가 이전에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던 것이었습니다. 압살롬의 그 참혹한 최후는 그를 이제껏 안전하게 지켜주었던 모든 것을 박탈당한 느낌이었고, 미래를 알 수 없는 공허함 속에서 희망의 촛불은 꺼져 가고 분노의 발톱이 자신의 심장을 할퀴고 있었으며 어디에서도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죽음 같은 고독이 그를 짓눌렀습니다. 말하자면 아버지의 사랑도 압살롬을 그 치명적인 구덩이에 빠지지 않도록 막아주지 못했으며 그의 야망이 덫에 걸리지 않도록 도와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왕의 명망도 능력도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 등 그 어느 것 하나도 한계상황의 압살롬을 구출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렇게 자신이 철저하게 혼자가 된 느낌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 그런 곳에서 역사하십니다.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뼛속 깊이 깨닫는 순간, 그것은 다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거기에서 우리의 기도는 더욱 깊어지며 우리의 영혼도 비로소 하나님을 향해 애타게 달려갈 줄 알게 될 것입니다. -다윗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요압이 굳이 압살롬을 죽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본문 9절 말씀에 대한 당신의 느낌을 적어 보십시오. -본문 5절 말씀을 읽고 <부성애>에 대해 적어 보십시오. 주님, 결국 압살롬이 참혹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그동안 몇 번이나 아버지 가슴에 못을 박았던 아들인데 이번에는 더 이상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는 다윗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지휘했던 요압이 그의 심장에 단창 세 개를 박았습니다. 이 끔찍한 압살롬의 죽음을 보며 저희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고, 또 많은 것을 느끼며 보다 깊이 깨닫게 해주시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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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손님처럼? “가족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끔 ‘가족을 손 님처럼’ 바라보는 것입니다. 한 번 떠나면 다시는 못 만날 손님처럼 바라보면 모든 것이 다르게 느껴집니다.” 이민규 저(著) 《표현해야 사랑이다》 (끌리는 책, 141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이순신 장군도 가족들 앞에서는 갑옷을 벗습니다. 가족들 앞에 서면 무장 해제를 할 수 있고, 그지없이 편안합니다. 그런데 너무 편하다 보니 무례할 경우도 많습니다. 이럴 때 가끔 가족을 ‘손님처럼’ 바라 보면 무례함이 사라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좋은 방 법이 있습니다. 가족을 주님이 만세 전부터 택해주신 경외스러운 존재 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창세 전에 택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1:4) 가족 또한 그러합니다. 우연히 한 가족이 된 것이 아닙니다. 창세 전 부터 택하신 경외스러운 존재들이 바로 우리 가족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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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오심 성경의 핵심은 하나님이 천국에서 우리를 기다리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그분은 몸소 우리 가운데 찾아오셨다. 인생이란 진흙탕에서 우리와 똑같은 삶을 사셨다. 이 과정을 의미하는 신학 용어가 있다. 성육신은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셨다’는 뜻이다. -닐 콜의 [오가닉 처치] 중에서- 왜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서 보내셨고, 죽으시게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십니다. 사랑하면 반드시 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 증거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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