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김용석]반도체 강국이 무너지는 세 가지 이유
김용석 산업1부장 입력 2021-05-08 03:00수정 2021-05-08 03:23
기업 경쟁력만으로 정해지지 않는 반도체 패권
지정학, 치킨게임, 국제 분업 위기 극복해야
김용석 산업1부장
불과 몇 년 전까지 한국 반도체의 최대 위협으로 중국의 반도체 굴기가 꼽혔다. 맹렬한 기술 추격이 위기론의 실체였다. 하지만 반도체 강국이 무너지는 이유는 기술 추격 때문만은 아니었다. 미국→일본→대만과 한국으로 이어지는 반도체 강국의 부침을 보면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 역사는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첫째, 일본 반도체는 지정학적 위기에서 무너졌다. 1980년대 세계 최강 일본 반도체 공세로 미국 반도체의 점유율이 하락했다. 미국 정부는 반덤핑 조사, 지식재산권 침해 제소 등 일본 압박 카드를 꺼냈다. 1986년 미일 반도체 협정으로 일본은 미국에 저가 수출을 중단하고, 일본 내 미국 반도체 점유율을 높여야 했다. 일본이 약해진 사이 미국 기술을 전수 받은 한국과 대만이 부상했다. 시장 균형이 쏠리는 걸 경계한 미국 때문에 일본 반도체가 무너진 셈이다.
한국 반도체도 지금 시장 쏠림을 우려해 자국 기업과 공급망을 강화하려는 미국의 시장 재편 아래 놓여 있다. 주 타깃은 중국이다. 하지만 한국 반도체는 미국과 중국 사이 지정학적 위기 탈출구를 명쾌하게 찾지 못하고 있다.
둘째, 대만과 유럽의 메모리 반도체는 치킨게임 때문에 무너졌다. 치킨게임은 대규모 투자와 생산 우위를 바탕으로 가격을 떨어뜨려 경쟁자가 버티지 못하게 만드는 전략이다. 2007년과 2010년 D램 메모리 반도체 값이 10분의 1로 떨어지는 극단적인 치킨게임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세계 2위 독일 키몬다와 일본 엘피다, 대만 난야, 파워칩 등이 무너지고 시장이 재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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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미국발 지각변동이 다시 일어나고 있다. 100조 원이 넘는 대규모 투자 경쟁이다. 대만 TSMC가 미국 내 공장을 늘리며 공격에 나섰다. 미국과 유럽은 천문학적 투자로 자국 반도체 공급을 늘린다. 메모리 반도체에선 마이크론 등 미국 기업이 일본 키옥시아를 인수하는 시장 재편을 모색한다.
셋째, 국제 분업에 따른 선택의 결과로 명암이 갈리기도 한다. 전 세계 반도체 매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인텔, 퀄컴, 엔비디아 등 미국 기업들은 생산을 대만, 한국으로 넘기는 대신 반도체 설계 등 소프트파워로 반도체 패권을 누려 왔다.
문제는 국제 분업 구도가 바뀔 때 생존할 수 있느냐다. 삼성전자는 스마트폰, 컴퓨터, 통신장비, 가전을 직접 만드는 종합 전자업체다. 반도체 최대 고객인 미국 테크 기업들엔 협력자인 동시에 잠재적 경쟁자다. 견제를 피할 수 없다. 애플, 퀄컴 등에는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만 하는 TSMC가 ‘최애(가장 좋아하는)’ 파트너다. 때맞춰 대만은 기업과 정부가 손잡고 미국, 일본 끌어안기에 모든 걸 걸었다.
미국 인텔이 파운드리 재진출을 선언하자 마이크로소프트, IBM, 아마존, 시스코, 퀄컴, 구글이 우군으로 나섰다. 반면 삼성전자는 여전히 외로운 싸움 중이다. 한국 반도체는 소재, 장비에선 일본, 유럽에 의존해야 하는데 오히려 우리 정부와 일본의 갈등으로 불리한 환경을 자청한 형국이다.
반도체 강국은 영원하지 않다. 오히려 반도체 패권 역사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반도체 전쟁의 냉정한 결말을 예고한다. 경제와 안보, 외교가 얽힌 이 위기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기업 혼자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 위기를 넘기지 못한다면 그 결과 역시 한 기업만이 아닌 대한민국 전체의 몫이 될 것이다.
김용석 산업1부장 y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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