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가인과 아벨의 제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창세기 4장 1-12절)외 1

鶴山 徐 仁 2020. 12. 23. 12:10

가인과 아벨의 제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창세기 4장 1-12절)

 

 

12월 23일 (수)

   

가인과 아벨의 제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창세기 4장 1-12절)


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예배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신 이유는 그들이 고통당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게하기 위함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예배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가인이 아벨을 살인하는 시작이 예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지금 우리 교회에서 이런 모습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배를 드리는 곳이 지옥처럼 변한 곳이 얼마나 많습니까?

많은 교회가 서로 나누어져 예배를 놓고 싸우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성경은 예배의 자리에서 얼마든지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음을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예수님을 믿는 것’보다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것’이 훨씬 더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이 애통함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배 가운데 살인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깨닫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예배는 어디서부터 문제였을까? 5절에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샤아”라는 단어인데, “쳐다보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무슨 이유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가인과 그의 제물을 쳐다보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에게는 그런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하나님을 위해서 준비해서 드렸는데, 하나님이 아벨의 것만 받으시고 내 것만 안 받으실 수가 있지?” 

그에게는 분노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히브리서 말씀에 보면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받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우리가 예배의 형식을 ‘행 했냐, 행하지 않았느냐’가 

아니라 ‘믿음으로 드렸느냐, 그렇지 않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이 ‘쳐다보시느냐, 쳐다보시지 않느냐’가 결정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 예배를 내 관점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내가 헌신하고, 내가 드렸다.”라는

사실에 집중하니까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인가”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로지 

내가 한 일에 대한 결과만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배의 모습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나 중심’의 예배를 ‘하나님 중심’의 예배로 바꾸지 않으면 우리의 예배의 비극은 계속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의 예배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찾고 끊임없이 

재조정하는 열정을 잃어버리면 우리의 삶의 예배도 예배의 비극으로 치달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의 모습이 회복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의 삶과 예배 가운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중심’의 예배에 대한 갈급함이 있는지 점검해 봅시다. 

 

주님! 우리의 예배가 가인처럼 예배의 비극으로 치닫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항상 기억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여 주시고, ‘나 중심’의 예배가 아닌, ‘하나님 중심’의 예배로 인도해 주시옵소서.

 
   

아내(남편)의 무서움

 

“너무 맑은 눈초리다

온갖 죄는 드러날 듯

부끄러워

나는 숨고 싶어.”

 

허영자 시인의 시 「하늘」입니다.

겨울 하늘 저 맑은 눈초리가 우릴 정죄하는 눈초리라면 우리는 어찌할

바를 모를 것입니다.

 

형사 둘이서 한가로이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거짓말 탐지기는 정말 놀라운 발명품이야. 자네 그거 사용해 본 적이

있나?”

“말도 말게. 사용 정도가 아니라 결혼해서 같이 살고 있잖아!”

 

하나님 말고 나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은 내 자신이고, 그 다음이 아내

(남편)입니다. 누군가가 하늘의 맑은 눈초리처럼 나를 잘 알고 있다면

얼마나 무서울까요? 그런데 아내가 무섭지 않고 더 좋은 것은 나를 사

랑하기에 그러합니다. 사랑은 덮어주고 이해하고 북돋아 줍니다.

나를 잘 아는 사람이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라면 불행입니다.

나를 잘 아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없는 행복입니다.

겨울 하늘보다 맑은 주님의 눈초리는 정죄가 아닌 한없는 사랑의 눈길

이기에 더 없이 행복합니다.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벧전4:8)

   

마태복음 1장 21절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태복음 1장 21절

She will give birth to a son, and you are to give him the name Jesus, because he will save his people from their sins."

   

인간의 역사와 하나님 나라의 역사

인간의 역사에서는 

원수의 나라들 간 왕래와 교류가 끊어지지만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서는 

그 나라들 간에도 왕래와 교류가 이루어진다.  

인간의 역사 에서는, 이스라엘과 애굽과 앗수르간에 

우호적인 왕래와 교류가 있을 수 없지만

그러나 세상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비전에는 

세 나라들 간에 우호적인 왕래와 교류가 이루어진다. 

오늘의 인류의 역사의 관점에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틴과의 왕래와 교류가  

미국과 이란과의 왕래와 교류가 이루어질 수 없으며, 

남한과 북한과의 왕래와 교류가 이루어질 수가 없다. 

그러나 세상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비전에는 

원수의 나라들 간에도 우호적인 왕래와 교류가 이루어진다. 

-김명혁 목사의 '하나님 사랑과, 사람의 사랑.. 그 차이'에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에는, 

모든 민족, 모든 나라의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백인과 흑인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서양 사람과 중동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지며, 

기독교문화권 사람과, 불교문화권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비전은 인간의 비전과 다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5:8~9) 

모든 민족 모든 나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 

이것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입니다.    

 

 

12월 22일 (화)

   

약삭빠르지 않고, 미련하게 살게 하옵소서.(마태복음 5장 38-48절)


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올해도 이제 2주가 남았습니다. 한 살 더 먹으면 철든다는 이야기가 있듯이 우리는 신앙에서도 과연 철들고 있는지, 

성장하고 있는지 돌아 봐야합니다. 신앙에 철이 든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기도의 시간이 길어지고 많은 예배를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오늘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말씀을 일다보면

이 말씀이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읽다보면 우리의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이렇게 살아서는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손가락질과 비난거리가 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 편도 돌려 대며”라고

말씀하시는데 만약 우리 자녀가 밖에서 누군가에게 뺨을 맞고 왔을 때, 과연 우리는 성경의 이 말씀대로 가르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오른편 뺨을 맞았을 때 왼쪽 뺨을 돌려대라는 말은 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고대 근동 사람들은 왼손은 뒷일을 볼 때만 사용하고 대부분 오른손을 사용했기 때문에

오른손으로 뺨을 때렸다면 맞는 사람은 당연히 왼쪽 뺨을 맞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면 이 말씀의 상황은 때리는 사람이 손을 반대편에서 손등으로 때린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손등으로 반대 뺨을 때리는 것은 의도적으로 경멸하며 수치심을 느끼게 할 때 하는 행위입니다. 

상대방이 그냥 때리는 수준이 아니라 수치스럽게 하려고 작정한 상황인 것입니다. 다음 절인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라는 말씀도 당시 상황에서는 ‘옷 하나’ 건네주는 정도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속옷은 통으로 된 안에 있는 옷이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벌의 옷을 갖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또한 겉옷은 밤을 지낼 수 있도록 이불처럼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이렇게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힘들지만 포기하지 않고 그렇게 살기를 갈망해야하며

어려우니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너희가 좀 미련해졌으면 좋겠다. 너희가 너무 똑똑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떠나가는지를 보기를 원한다. 너희가 너무 완고하여 너희를 쓸 수가 없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렇게 미련하게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미련하게 제자들을 믿으셨고, 미련하게 죄인들을 편들다가 돌에 맞고 조롱을 당하셨고,

결국은 미련하게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미련하신 것이 아니라,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의 사랑으로 조금이나마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미련하게 살기로 결단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 오른 하루 삶 속에서 작은 부분에서 나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서 미련한 결정을 하나씩 해 봅시다. 

 

 주님! 한 해의 삶을 돌이켜 보며 너무 내 이익을 계산하는데 빠르고 그렇게 살아와서

나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자리에서 멀어진 사람들이 있다면 기억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작은 부분에서부터 미련하게 살아가는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무엇을 해도 성공할 사람

 

“네가 양계를 한다고 들었다. 닭을 치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하지만

닭을 기르는데도 우아한 것과 속된 것, 맑은 것과 탁한 것의 차이가 있

다. 진실로 농서(農書)를 숙독해서 좋은 방법을 골라 시험해 보도록 해

라(중략). 속된 일을 하더라도 맑은 운치를 얻는 것은 모름지기 언제나 이것을 예로 삼도록 해라.”

 

 

정민 저(著)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김영사, 127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조선시대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아들 학유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다산은 글 읽는 선비의 양계법과 못난 사내의 양계법을 대조해서 설명했

습니다. 닭을 쳐서 달걀을 얻고 병아리를 기르는 것은 당시 시대의 속

설에 의하면 속된 일이지만, 이 속된 일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우아

하고 맑은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해도 성공할 사람이 있습니다. 주어진 환경이 어떠하든 간에 맡

겨진 작은 일에 까지 신명과 운치를 섞어 즐겁게 일하는 사람이 그러 합니다.

 

정약용은 장기에서 귀양 살 때 약을 못 구해 병을 키우는 사람들을

위해 그들이 쉽게 할 수 있는 처방 중심으로 「촌병혹치」라는 의학서를

편집했습니다. 또 수십 종의 의학서에서 천연두 관련 항목만 추려내 목

차에 따라 재가공해서 「마과회통」을 엮었습니다. 또한 베껴 쓰기만

해도 수십 년이 걸릴 경집(經集) 232권과 문집 260여권을 강진 유배 18

년간에 모두 정리해냈습니다. 참고할 서적도 넉넉지 않고, 여건도 여

의치 않은 척박한 환경에서 이뤄낸, 경이롭다 못해 경악할만한 성과였

습니다. 그는 어느 속된 환경 속에서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았습니

다. 그리고 그의 손에 맡겨진 일은 어떤 속된 일이라도 우아하고 맑은

시가 되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무엇을 해도 성공할 사람입니다.

주님이 권면하는 신앙인의 삶의 자세가 이러합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하며 주께하듯 성심을 다 쏟는 삶의 자세!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골3:23)

   

이사야 9장 6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사야 9장 6절

For to us a child is born, to us a son is given, and the government will be on his shoulders. And he will be called Wonderful Counselor, Mighty God, Everlasting Father, Prince of Peace. Isaiah 9:6

   

말 아래 둔 등불은 쓸모가 없다

등불을 켜면, 등경 위에 두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등불을 켜서는 등잔걸이에 얹어 놓아야 한다.

그래야 등불에서 나오는 빛이 집안을 환하게 비춘다.

그러면서 등불은 집 안의 어둠을 몰아내며, 

집안에 있는 것을 밝히 드러낸다.

그런데 만일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 때의 “말”이란 한 말, 두 말 하듯이 

곡식을 될 때 사용하는 그릇이다.

예컨대 등불을 켜서 그것을 상자로 덮어버리면,

그 등불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맛을 잃은 소금이 쓸 데 없는 것처럼,

말 아래 둔 등불도 쓸모가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박상훈 목사의 ‘빛과 소금이 하는 일’에서-

 

말 아래 둔 등불은 등불을 켠 사람에게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집 안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니 이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소금이나 빛이나 

그 역할은 똑같이 다른 존재에게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두어 세상을 밝히십시오.

우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