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20.08.08 09:00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17>
◇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포르투나’의 시간
권력투쟁의 진흙창에선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으로 바뀔 수 있다. 절친했던 친구가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가 되기도 한다. 선악이 착종(錯綜)하고, 가치가 전도(顚倒)되고, 좌우가 번복(飜覆)된다. 바로 그러한 정치의 불확실성 때문에 권력투쟁에선 덕망, 실력, 지략, 용기 등 인물의 비르투(virtù)보다도 포르투나(fortuna)가 더 크게 작용할 수 있다.
그리스 신화 속 운명의 여신 포르투나는 성격이 변덕스럽고 장난스럽다. 아무리 뛰어난 인물이 ‘자유의지’에 따라 뼈를 깎는 노력을 해도 운이 따르지 않으면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 1966년 중공중앙의 "5.16 통지" 이후,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이 공식적으로 개시된 후 최초의 50일간은 진정 포르투나의 시간이었다.
1966년 5월 25일, 베이징대학에 나붙은 1400자의 길지 않은 대자보 한 장이 "천하대란"을 일으키는 문혁의 도화선이 되었다. 대자보를 대표로 집필한 인물은 베이징대 철학과 중국공산당 총지부위원회 서기 녜위안쯔(聶元梓, 1921-2019)였다. 그녀는 1964-65년 사회주의교육운동(이하 사청[四淸]운동) 당시 교내의 혁명투쟁에서 베이징 대학 당위원회와 첨예하게 대립했던 인물이다.
<1964년 전국적으로 진행된 “사회주의 교육운동”의 한 장면. 부농을 비판하는 농민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이들의 표정이 인상적이다. 사회주의 교육운동은 농촌에선 사청운동으로, 도시에선 오반운동으로 전개되었는데, 그 모든 과정이 이후 사청운동으로 불리웠다. 사청운동은 흔히 문화혁명의 전조로 인식된다./ 공공부문>
◇ “베이징대는 反당·反사회주의·反마오사상의 기지”
1964년 11월 초, 중앙선전부 부(副)부장 장판스(張磐石, 1905-2000)가 이끄는 210명의 공작대(工作隊)가 베이징대학 캠퍼스에 진입한다. 이들의 임무는 바로 베이징 대학 당위원회를 비판하는 계급투쟁의 개시였다. 이때 녜위안쯔 등 "좌파"가 선두에 나섰는데, 이들은 베이징 대학 총장이자 당서기 루핑(陸平, 1914-2002), 부서기 펑페이윈(彭珮雲, 1929- ) 등을 표적 삼아 표독하고도 집요한 계급투쟁의 십자포화를 퍼부었다. 베이징대학이 “자본주의의 용광로"이며 "자산계급이 통치하는 학교"라는 게 그들 주장의 핵심이었다.
이후 베이징 대학의 "계급투쟁"은 두 달 후까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장판스의 보고서에 따르면, 전교 20개 장소에서 대면(對面) 투쟁이 일어나 “격렬하고, 첨예하고, 활발하고, 생동감 있게” 전개됐다. 대면 투쟁이란 크고 작은 대중집회에 반혁명의 혐의자를 잡아놓고 직접 혐의를 추공하고 단죄하는 “비투”(비판투쟁)의 인민재판이었다. 그 과정에서 녜위안쯔는 좌파투사로 급부상하지만, 역시 포르투나가 변덕을 부린다.
베이징 시장 펑전이 베이징 대학 사태에 개입한 것이다. 그는 노골적으로 루핑과 펑페이윈을 감싸고 돈 후, 베이징대학 사청운동의 과도함을 비판한다. 반격의 기회를 얻은 루핑은 1월 23, 24일 이틀 동안 공작대를 비판하면서 적극적인 자기항변을 이어간다. 마침내 2월 20일 중앙선전부의 루딩이(陸定一, 1906-1996)는 "루핑은 좋은 사람인데, 실수를 했을 뿐"이라는 유권해석을 내리고, 3월 3일, 덩샤오핑이 루딩이의 판단을 승인한다. 이로써 베이징 대학의 사청운동은 일단 수습되었다.
4월 29일 루딩이는 장판스가 이끄는 공작대를 해체하고, 중앙선전부 부부장 쉬리췬(許立群, 1917-2000)을 그 자리에 앉힌다. 이듬 해, 6월 29일 펑전은 베이징 대학이 “자본주의의 용광로"가 아님을 분명히 선언한다. 루핑을 공격하던 녜위안쯔 등 학내의 좌파세력은 이제 비투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좌파는 우파로 몰리고, 우파는 다시금 좌파가 되어 극적으로 소생하는 장면이 연출됐다.
<1965년 출판된 “미신타파 괘도.” 벽에 걸어 놓고 보는 우화집. “신의 관념이 어떻게 나왔냐?”는 제명 아래 농촌의 인민에 사회주의적 종교관을 심어주는 계몽적 우화가 제시되어 있다. 전통적 신앙은 모두 미신이라는 마르크시즘의 종교관이 담겨 있다./ chineseposters.net>
루핑은 베이징 대학의 간부, 교사 및 학생들로 구성된 공작대를 조직한다. 농촌 지역 사청운동에 그들을 파견하기 위함이었다. 녜위안쯔는 철학과 서기직을 박탈당한 채, 베이징 근교의 화이러우(懷柔)현에서 사청운동에 투입될 예정이었으나…. 놀랍게도 1966년 2월 이후, 펑전과 루딩이는 삼반분자의 멍에를 쓰고 추락하고 만다. 얼마 후, “5.16통지” 반포되었다. 포르투나가 녜위안쯔 쪽으로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펑전과 루딩이는 이미 삼반분자의 멍에를 쓰고 만신창이가 되어 직무 해제된 상태였다. 녜위안쯔로선 눈이 번쩍 뜨이는 반격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이미 몇 달 전부터 마오쩌둥의 오른팔 캉성은 와이프 차오이오우를 사주해 베이징 대학에서 문혁의 불길을 지피고 있었다. 차오이오우는 베이징 대학에서 녜위안쯔와 접선한다. “5.16통지"가 정치국 확대회의를 통과해서 중공중앙의 공식노선으로 채택되자 녜위안쯔는 차이이오우과의 협의를 거쳐 곧 행동에 나선다. 녜위안쯔는 6명의 좌파들과 함께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대자보”를 작성한다. 베이징 대학 당위원회를 “반당, 반사회주의, 반마오쩌둥 사상”의 기지로 규정하는 이 대자보는 순식간에 문혁의 돌풍을 일어난다. 위협을 느낀 대학 당위는 매일 밤 회의를 열고 수천 장의 대자보를 써 붙이며 반격을 시도하지만….
<1966년 6월 추정. 문혁시절 대자보의 홍수/ 공공부문>
◇ 관영매체, 문화혁명의 불길에 기름을 붓다
1966년 6월 1일 마오쩌둥은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대자보”를 전국의 매체를 통해 발표하라 지시하고, 그날 저녁 중앙방송은 그 사건을 대서특필한다. 곧바로 전국의 공산당 기관지들이 문화혁명의 팡파르를 불어댔다. 관영매체의 선전선동은 강력한 동원력을 발휘했다. 문혁의 광풍이 일단 불자 혁명의 불길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대학 캠퍼스가 제일 먼저 요원(燎原)으로 화(化)했다. 전국의 대학에선 좌파 학생들이 학교의 당위원회에 공격의 포문을 열었다.
한 통계에 따르면, 중국 최고의 명문 베이징의 칭화(淸華)대학의 캠퍼스엔 6월 동안에만 6만5000장의 대자보가 붙었다. 상하이 선전부의 통계에 따르면, 6월 18일 이전까지 무려 8만8000 장의 대자보가 붙었고, 1390명이 반혁명세력의 낙인을 받았다. 상하이 시정부의 집계에 따르면, 6월 첫 주, 270만 명이 순식간에 문혁의 물결에 동참했다.
마오쩌둥은 이미 문화혁명의 타깃은 관료집단 내부의 최상층이라 언급한 바 있다. 마오의 교시에 따라, 대학가의 투쟁은 우선 총장, 대학간부 및 교수들을 겨냥했다. 그해 6-7월 언론은 날마다 “반혁명 흑방(黑幇)”의 발본색원을 부르짖고 있었다. 관영매체의 선전선동으로 학생들의 투쟁은 점점 더 과격한 양상으로 치달아 6월 18일 급기야 폭력사태가 발생한다. 6월 21일 중공중앙 확대회의에서 덩샤오핑은 “무정부주의 현상은 제지돼야 한다”는 발언을 하기에 이르는데….
<1966년 5-6월 베이징의 최고명문대학 베이징대학과 칭화대학에서 가장 먼저 문혁의 돌풍이 일어났다. 위의 사진은 칭화대학 홍위병 비투(批鬪) 집회의 한 장면. “반동학술권위를 타도하라!”>
◇ 마오쩌둥 “이건 아무도 막을 수 없는 혁명의 폭풍이야”
문혁의 화마가 캠퍼스를 덮치자 중공중앙은 기민하게 베이징의 교육 및 문화 기관 곳곳에 7239명의 대규모 공작조를 파견했다. 6월 3일부터는 지방의 당위원회도 공작조를 내보낸 상태였다. 1950년대부터 대규모 정치투쟁이 전개될 때면 중앙정부는 공작조를 파견해 “질서정연하고 합법적인” 계급투쟁을 관장하게 했다. 공작조는 대부분 퇴역 장교들과 간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6월 9일,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은 저우언라이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항주로 간다. 그들은 마오쩌둥을 알현하고 베이징으로 돌아와 중공중앙을 지도해 달라 읍소하지만, 마오는 넌지시 그 부탁을 뿌리치면서 묘한 말을 남긴다.
“문화대혁명에 관해선, 그저 손을 떼야 해. 혼란을 두려워 하지마! 손을 놓아야 군중을 격동시킬 수 있어. 크게 일을 벌일 수가 있어. 그렇게 해야 우귀사신(牛鬼蛇神, 반혁명분자의 비유)들을 모두 끌어낼 수 있어. 공작조(工作組)를 꼭 보낼 필요도 없어. 우파들의 파괴행위도 두려워 말아. 베이징대학의 대자보 한 장으로 문화대혁명의 불길을 타오르기 시작했어. 이건 아무도 막을 수 없는 혁명의 폭풍이야!”
이미 류와 덩은 투쟁의 현장에 공작조를 파견해 놓은 상태였다. 그런 사실을 훤히 아는 마오는 “혼란을 두려워 말라”며 “공작조를 꼭 보낼 필요도 없다”는 말을 한다. 과연 어떤 의도였을까? <계속>
<문화혁명을 일으킨 마오쩌둥은 학계, 문화계, 관계, 정부기관 등 모든 단위에서 권위에 도전하는 군중의 반란이 필요하다 주장했다. 마오쩌둥이 고안한 “조반유리”와 “혁명무죄”는 그 당시 중국의 집단의식을 드러내는 문혁의 키워드다./ 공공부문>
※ 필자 송재윤(51)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는 최근 ‘슬픈 중국: 인민민주독재 1948-1964’(까치)를 출간했다. 중국 최현대사를 다룬 3부작 "슬픈 중국" 시리즈의 제 1권이다. 이번에 연재하는 ‘문화혁명 이야기’는 2권에 해당한다. 송 교수는 학술 서적 외에 국적과 개인의 정체성을 다룬 영문소설 "Yoshiko's Flags" (Quattro Books, 2018)의 저자이기도 하다.
☞ <16회> 당중앙에 반대하는 자는 착취계급의 이익을 대변” 바로가기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
|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8/08/2020080800449.html
'歷史. 文化參考' 카테고리의 다른 글
[펜앤특집] 당신이 몰랐던 진짜 건국 이야기 - 3부 대한민국 건국의 조력자들 (20년 08월 16일) (0) | 2020.08.16 |
---|---|
시진핑이 모르는 진짜 중국, 위대한 중국은 없다 (0) | 2020.08.08 |
[영상+] 국가기록원이 공개한 6.25 한국전쟁 사진 (0) | 2020.06.13 |
최 근세사의 재 인식(3) (0) | 2020.06.03 |
[THE] 세종의 소통 리더십 _ 신세돈 (0) | 2020.05.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