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모압 땅에서(신 29:1-9)

鶴山 徐 仁 2019. 3. 2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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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종소리 - 365일 하나님과 행복한 삶의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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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월 22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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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본문 모압 땅에서(신 29:1-9)

1. 호렙에서 이스라엘 자손과 세우신 언약 외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사 모압 땅에서 또 그들과 세우신 언약의 말씀이 이러하니라
2.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소집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너희 목전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온 땅에 행하신 모든 일을 너희가 보았나니
3. 곧 그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 네가 목도하였느니라
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5. 주께서 사십년 동안 너희를 인도하여 광야를 통행케 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하였으며
6. 너희로 떡도 먹지 못하며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못하게 하셨음은 주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7. 너희가 이곳에 올 때에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이 우리와 싸우러 나왔으므로 우리가 그들을 치고
8. 그 땅을 취하여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에게 기업으로 주었나니
9. 그런즉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의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

본문 해석

<... 모압 땅에서 그들과 세우신 언약의 말씀은 이러하니라>(1절).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지 40년이 되던 해, 요단 동편 모압 평지에서 호렙산 언약을 재확인하고 새롭게 갱신한 언약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1:3, 5:1~). 과거 하나님과 호렙산 언약을 맺었던 구세대는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지난 40년 간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다 죽고 말았습니다(민 13:25-14:38). 그리고 이제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모압 평지에 진치고 있는 사람들은 다 호렙산 언약을 맺을 당시는 20세 미만이었던 출애굽 2세대들이었습니다(민 14:29-31). 따라서 모세로서는 이 새로운 세대에게 호렙산 언약을 새롭게 강조해 줄 필요성이 없지 않았던 것입니다.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4절).

전후 문맥을 살펴 볼 때 이는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받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친히 목격하고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지 못한 채 하나님의 뜻을 거부한 이스라엘의 강퍅하고도 굳은 마음(출 32:9, 34:9)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은 40년간 광야를 유랑했지만 옷도 낡아 해어지지 않았고, 신발도 닳아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밤낮으로 행군했지만 발이 부르트지도 않았다고 했고, 낮의 더위나 밤의 추위에 희생된 사람, 마실 물이나 먹을 양식이 없어 죽은 사람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광야에서 죽은 출애굽 1세대는 다 말씀에 불순종하다 객사했을 뿐입니다. 따라서 제2세대는 가나안에 입성하여 두 번 다시 그런 부모 세대의 전철을 밟지 않게 하기 위해 지금 가나안 문턱인 모압 땅에서 다시 한 번 하나님과의 언약을 새롭게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9절).

<지키다>는 뜻의 히브리어 <솨마르>는 <주의를 집중하다>, <세심히 보다>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따라서 <지켜 행하라>는 말씀은 그저 영혼 없이 건성으로 행하는 맹목적인 몸짓이 아닌 집중하고 주의해서 최선을 다하는 실천을 가리킵니다. 

<그리하면 너희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니라>(9절)고 했습니다. 

부디 이 말씀이 당신에게도 희망과 아름다운 축복이 되길 빕니다.

결단과 적용

-출애굽 1세대 가운데서 살아남은 두 사람은 누구였습니까?(민 14:30)

-출애굽 1세대가 시내반도에서 맺었던 호렙산 언약을 출애굽기 19:1-24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해 보십시오.

-당신이 이해하는 <호렙산 언약>과 <모압 땅 언약>의 핵심 내용을 간략히 적어 보십시오.

오늘의 기도

주님, 말씀하신대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 중 헐벗거나 굶주려 죽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일사병이나 저체온증으로 죽은 사람도 없었습니다. 다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고 하나님과 모세에게 대들며 원망하고 작당하다 광야에 뼈를 묻었습니다. 출애굽 1세대 가운데는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살아 가나안에 입성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늘 모세가 출애굽 2세대를 향해 호렙산 언약을 재확인하고 새롭게 갱신한 의미를 바르게 깨닫게 하사 저희는 늘 순종하고 감사하며 살므로 가나안 입성에 낙오하는 일이 없게 해 주시옵소서. 

인문학 큐티더 보기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공리주의)
인문학 나눔

“거리에서 거지를 줄일 목적으로 나온 이 계획은 공리주의 논리를 생생히 보여준다.  

벤담은 우선,거지와 마주치면 두 가지 측면에서 행복이 줄어든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정이 많은 사람이라면 동정심이라는 고통이,정이 없는 사람이라면 혐오감이라는 

고통이 생긴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든 거지와 마주치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공리가 줄어든다. 

따라서 벤담은 거지를 구빈원으로 몰아넣자고 제안했다(중략).  

결국 구빈원으로 끌려가는 거지들이 어떤 불행을 느끼든, 

그러지 않을 경우 일반 대중이 겪는 고통의 합이 

그보다 크다는 게 벤담의 결론이다.” 

마이클 샌델 저(著) 이창신 역(譯) 「정의란 무엇인가」

(김영사, 56-57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무엇이 정의인가?  마이클 샌델이 400쪽이나 넘는 책에서 

설명해야만 할 만큼 어려운 문제입니다.  

샌델은 이 책에서 정의를 “분배 정의”로 한정 지으며 공리주의적 정의, 

자유주의적 정의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공동체적 정의를 주장합니다.

공리주의자들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가져오는 행위나 결정이 

정의로운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책에는 벤담이 거지에 대한 정책을 제안하면서 공리주의를 

적용한 사례를 보여줍니다.  거지를 포함한 사회구성원 모두의 행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거지는 모두 수용소 시설에 몰아넣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거지가 아닌 사람이 거지를길거리에서 만나는 것이 고통스럽기

때문이라는 이유입니다.  즉, 거지가 길거리에 있음으로 해서 거지들이

얻는 행복의 합계보다,  거지가 수용소에 있음으로 해서 거지가 아닌 사람들이 

얻는 행복의 합계가 더 크다는 것입니다.  

샌델은 이런 공리주의적 정의는 옳지 않다고 합니다. 

첫째는 정의와 권리를 원칙이 아닌 ‘행복의 합계’ 라는 계산의 문제로 만든다는 점이고,  

둘째는 인간 행위의 가치를 하나의 도량형으로 환산해 획일화하면서 

그것들의 질적 차이를 무시한다는 점입니다.누가복음 15장에는 ‘잃은 양 비유’ 가 나옵니다. 

공리주의적 입장에서 보면 아흔 아홉마리 양을 들에 놔두고 한 마리 양을 위해 길을 나서는 

목자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다시 찾은 한 마리 양 때문에 

잔치를 벌이는 것은 배보다 배꼽이 큰 경우일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아흔 아홉 마리에 대한 소홀함이 초점이 아니라,  

잃어버린 한 양에 대한 사랑이 초점입니다. 공리주의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셨습니다.

기독 메시지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눅15:4)

그림 큐티더 보기
사무엘하 22장 2절
고린도전서 15:10

이르되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위하여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

 

He said: "The LORD is my rock, my fortress and my deliverer;

도서 큐티더 보기
세상을 부끄럽게 해야 하는 사람들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결혼을 합니다.

 자녀도 양육합니다. 

하지만 자녀를 버리는 법이 없습니다.

 식탁은 공유하지만 아내는 공유하지 않습니다.

 육체를 지니고 살지만 육체대로 살지는 않습니다.

 땅에 살지만 천국 시민들입니다.

 법을 준수하지만 법 없이도 살아갈 사람들입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데도 모든 사람에게 박해를 받습니다. 

무명한 사람들인데도 비난과 정죄를 당합니다. 

죽음을 당하는 것 같은데 살아 있습니다. 

가난하면서도 많을 사람들을 부요하게 만듭니다. 

가진 게 없으면서도 모든 것에 넉넉합니다. 

비난을 받지만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중상모략을 당하지만 무고합니다. 

저주를 당하면서도 축복합니다. 

조롱을 당하면서도 존경을 합니다.

 선을 행하면서도 범죄자처럼 처형을 당합니다.

 처형을 당할지라도 다시 살 것을 생각하고서 기뻐합니다. “

 -은혜의 동산교회 이규현 목사의 ‘부러워할 것인가? 부끄럽게 할 것인가?’에서-

 

2세기 말에서 3세기 초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글 중에서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글이 있습니다.

 아마도 디오그네투스 라는 불신자가

 기독교에 대해서 궁금해 할 때 그리스도인 중에서

 누군가가 그에게 보낸 편지일 거라고 생각됩니다.

 거기에 위의 내용들이 있었습니다.

주위의 많은 불신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욕하지만

어느 순간 기독교인들의 삶 앞에서 부끄러워진다는 것입니다.

 자기들과는 너무나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 앞에서 

자기들의 방탕하고 이기적인 삶을 부끄러워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부러워하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부끄럽게 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당신의 모습을 보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부끄러워 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