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의 계절입니다. 거리에는 캐롤이 흘러넘치고, 아름답고 웅장한 크리스마스 트리는 밤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2.000년 전의 역사적 상황으로 돌아가 예수님의 탄생 기사를 보면 이렇게 아름다운 것도 깨끗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가난하고 어려웠던 이야기였음을 알게 됩니다. 요셉에게 조금만 여유와 요령이 있었더라면 만삭이 된 아내를 가축의 분뇨 냄새가
진동하는 마구간에서 가축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몸을 풀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전승에 의하며 마리아는 16세에 예수를 낳았다고 하는데
초산의 진통소리와 함께 아이를 낳고 제대로 아이나 산모에게 뒤처리는 하였을지 의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이나 명문가가 아닌 왜 하필 시골 마구간에서 탄생하셨을까요?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길은
세상의 어떤 방법으로도 불가능합니다. 수양과 명상을 통해서도, 금욕과 고행을 통해서도, 윤리와 도덕적으로 완전하며 철저하게
율법을 지킴으로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수양의 종교가 아닌 계시의 종교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시고 상대해 주시고 낮은 자세로 인간을 찾으신 것입니다.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어른들과 같이 권모술수를 부리며 간사하고 탐욕으로 얼룩진 마음에는 오실 수 없습니다.
어린 아이같이 순수하고 꾸밈없이 있는 모습 그대로 자신을 인정하는 가난한 마음에 오시는 것입니다.
마구간을 청소한 다음에 그곳을 분만의 장소로 사용하려 하였다면 다급해진 마리아는 다른 장소를 선택했을 것입니다.
이 시대를 돌아보십시다. 온갖 비리와 부정부패가 만연화되어 버린 사회입니다. 이제 국민들은 무감각해 졌구요.
아황산가스와 황사로 공기는 오염되고 물도 마음껏 마실 수 없으며 농약으로 오염되지 않은 채소와 과일도 없을 정도이며,
여성들이 홀로 집을 지키거나 외출해도 걱정되는 도덕적으로 이 사회는 마구간이 되어 버렸습니다.
중요한 것은 현 상태 그대로 마구간의 문을 열어두는 일입니다. 더럽고 냄새나는 그대로 문을 열어 예수님을 모실 장소를 제공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정치, 경제,&n bsp;사회적인 상황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오셨습니다. 복음은 주의 은혜를 먼저 받은 후 감사해서 말씀을 지켜 사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가 거지꼴 그대로, 빈털터리 그대로 아버지께로 돌아오기 위하여 일어섰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아버지는 탕아의 모습 그대로 맞아주셨고 아들의 권세를 회복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성탄은 지금 이대로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만민에게 미칠 큰 기쁨의 소식” 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서 회개시키러 왔다”(눅5:35)고 하셨습니다.
크리스마스는 작은 자, 소외된 자, 외국인과 같은 나그네들에게, 죄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자들을 위해 준비된 축제의 날입니다.
마음의 문을 여는 자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금번 성탄에는 마구간의 문을 열고 주님을 맞이하며 천군 천사들과 함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14)라고 찬양하는 주인공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