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피 뿌리는 규례 외 4

鶴山 徐 仁 2016. 6. 24. 16:11
6월 24일 (금)
피 뿌리는 규례 겔 43:18-27
   
 

18.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이 제단을 만드는 날에 그 위에 번제를 드리며 피를 뿌리는 규례는 이러하니라
19.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를 가까이 하여 내게 수종드는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에게 너는 어린 수송아지 한 마리를 주어 속죄제물을 삼되
20. 네가 그 피를 가져다가 제단의 네 뿔과 아래층 네 모퉁이와 사방 가장자리에 발라 속죄하여 제단을 정결하게 하고
21. 그 속죄제물의 수송아지를 가져다가 성전의 정한 처소 곧 성소 밖에서 불사를지며
22. 다음 날에는 흠 없는 숫염소 한 마리를 속죄제물로 삼아 드려서 그 제단을 정결하게 하기를 수송아지로 정결하게 함과 같이 하고
23. 정결하게 하기를 마친 후에는 흠 없는 수송아지 한 마리와 떼 가운데에서 흠 없는 숫양 한 마리를 드리되
24. 나 여호와 앞에 받들어다가 제사장은 그 위에 소금을 쳐서 나 여호와께 번제로 드릴 것이며
25. 칠 일 동안은 매일 염소 한 마리를 갖추어 속죄제물을 삼고 또 어린 수송아지 한 마리와 떼 가운데에서 숫양 한 마리를 흠 없는 것으로 갖출 것이며
26. 이같이 칠 일 동안 제단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려 정결하게 하며 드릴 것이요
27. 이 모든 날이 찬 후 제팔일과 그 다음에는 제사장이 제단 위에서 너희 번제와 감사제를 드릴 것이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즐겁게 받으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번제는 희생제물을 태우는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께 상달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붙여진 명칭입니다. 따라서 번제는 온전한 헌신과 철저한 순종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사 피 흘려 죽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시며 자신의 몸을 바치신 주님의 희생에서 번제의 참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번제에는 희생제물로부터 받은 피를 <제단의 네 뿔과 아래층 네 모퉁이와 사방 가장 자리에> 바르고 뿌리는 의식이 있습니다. 이 피 뿌리는 규례는 그렇게 함으로써 번제를 드리는 자가 속죄되고 또 하나님으로부터 새 생명을 얻는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리고 그 피 역시 주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대속의 피의 예표였다는 것입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3-14). < ...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어린 양을 잡아 문설주와 인방에 그 피를 칠하므로 죽음의 신을 피할 수 있었듯이 피 뿌리는 규례는 그렇게 속죄와 구원을 뜻하는 이스라엘 제사 규례의 최상위 의식을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다 주님의 보혈로 대속의 은총을 입은 자들이고, 주님의 피 뿌리심으로 새 생명을 얻어 구원의 반열에 든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번제로 피 뿌리는 규례를 행한 자는 다시금 감사제를 드리며 속죄와 구원에 대해 진심 어린 사의를 표해야 마땅합니다. <그 다음에는 제사장이 제단 위에서 너희 번제와 감사제를 드릴 것이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즐겁게 받으리라>(27절). 번제와 감사제야 말로 언제나 하나님이 즐겁게 받으시는 제사임을 기억하시며 평생 속죄의 은총과 감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들 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번제의 피 뿌리는 규례가 무엇을 뜻하는지 말씀해 보십시오.
-번제의 피 뿌리는 규례가 궁극적으로 예시하는 사건은 무엇입니까?
-감사제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레 7:15, 16)

 
   
   
 

주님, 주님이야 말로 유월절의 어린 희생양이셨습니다. 십자가의 제단에서 온 몸을 바치시고 피를 뿌려주셨기에 저희가 속죄에 이르고 구원을 누릴 수 있었음을 고백하오니, 평생 이 대속의 은총을 잊지 않고 감사제를 드리며 사는 저희들 되게 해주시옵소서. 피 뿌리는 규례로 거듭나 새 출발한 성도들답게 늘 주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성호를 높이며 사는 저희들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비전이 있는 사람은 2

아브라함은 그 비전을 이루어 열국의 아비가 되었고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탄생하게 되었으며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되었다.
요셉의 하나님은 그에게
모든 사람이 자기 앞에 절을 하는 꿈을 주셨다.
다니엘의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란 비전을 주셨다.
비전이 있는 사람은 꿈을 이루기 위하여 방자히 행하지 않는다.
자기 욕심대로 살지 않는다는 말이다.
내가 일평생 그것을 위하여 살고 그것을 위해
죽을 수 있는 비전이 자신을 인도하기 때문이다.‘
-김인수 목사의 ‘주님의 비전, 우리의 비전’에서-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이 비전은
푯대로 표현되었습니다. (빌 3:13-14)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일평생 주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이루어 가시려면.

 
     
       
 

고린도후서 1: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who comforts us in all our troubles, so that we can comfort those in any trouble with the comfort we ourselves have received from God.

 
       
 
   
  주신장로교회 황요한 목사
  전적 무능력1
   
   



6월 23일 (목)
죄를 부끄러워하라! 겔 43:10-17
   
 

10. 인자야 너는 이 성전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여서 그들이 자기의 죄악을 부끄러워하고 그 형상을 측량하게 하라
11. 만일 그들이 자기들이 행한 모든 일을 부끄러워하거든 너는 이 성전의 제도와 구조와 그 출입하는 곳과 그 모든 형상을 보이며 또 그 모든 규례와 그 모든 법도와 그 모든 율례를 알게 하고 그 목전에 그것을 써서 그들로 그 모든 법도와 그 모든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라
12. 성전의 법은 이러하니라 산 꼭대기 지점의 주위는 지극히 거룩하리라 성전의 법은 이러하니라
13. 제단의 크기는 이러하니라 한 자는 팔꿈치에서부터 손가락에 이르고 한 손바닥 넓이가 더한 것이라 제단 밑받침의 높이는 한 척이요 그 사방 가장자리의 너비는 한 척이며 그 가로 둘린 턱의 너비는 한 뼘이니 이는 제단 밑받침이요
14. 이 땅에 닿은 밑받침 면에서 아래층의 높이는 두 척이요 그 가장자리의 너비는 한 척이며 이 아래층 면에서 이 층의 높이는 네 척이요 그 가장자리의 너비는 한 척이며
15. 그 번제단 위층의 높이는 네 척이며 그 번제하는 바닥에서 솟은 뿔이 넷이며
16 그 번제하는 바닥의 길이는 열두 척이요 너비도 열두 척이니 네모 반듯하고
17. 그 아래층의 길이는 열네 척이요 너비는 열네 척이니 네모 반듯하고 그 밑받침에 둘린 턱의 너비는 반 척이며 그 가장자리의 너비는 한 척이니라 그 층계는 동쪽을 향하게 할지니라

 
   
   
 

<인자야 너는 이 성전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여서 그들이 자기의 죄악을 부끄러워하고 그 형상을 측량하게 하라>(10절).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에 대해 과연 어떤 태도를 취해야 옳은가를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죄를 부끄러워하기보다 의로움을 자랑하고 시위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자신의 죄가 부끄러워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고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비유를 마무리 하시며 <바리새인이 아니고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으로 내려갔다>고 하셨습니다.

프랑스의 사상가 루소는 <죄는 부끄러워하라. 그러나 회개는 부끄러워 말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죄는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워해야 옳고 마땅합니다. 그러나 회개는 결코 부끄러워하거나 주저하거나 미룰 일이 아닙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 하겠나이다>(눅 15:21). 이게 탕자의 부끄러움과 회개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세리도 탕자도 다 자신의 죄악에 대한 견딜 수 없는 부끄러움과 가슴을 치며 통회하는 자세를 가졌기에 용서와 새 출발의 은총을 입었습니다.

우리는 다 거듭난 사람들이지만 그렇다고 완전하거나 완벽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여전히 엎어지고 자빠지며 미혹 앞에서 범죄하기 일쑤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죄악에 대해 늘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심 어린 자백과 회개로 주님의 용서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오늘 본문도 <만일 그들이 자기들이 행한 모든 일을 부끄러워하거든 너는 성전의 제도와 구조와 그 출입하는 곳과 그 모든 형상을 보이며 ...>(11절). 그렇습니다. 부디 바리새인과 같은 강퍅한 심령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아는 세리와 같은 심령으로 주님의 사죄의 은총을 비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가장 최근 자신이 지은 죄를 부끄러워하며 회개한 것이 언제입니까?
-바리새인과 세리, 당신은 자신이 어느 쪽이라고 생각합니까?
-요한1서 1:9 말씀을 암기합시다.

 
   
   
 

주님, 저희는 날마다 죄를 지으면서도 이제는 만성이 되어 부끄러움 조차 못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리처럼 가슴을 치며 통회하는 일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저희들의 이 강퍅해진 심령들을 부드럽고 순수한 마음들로 새롭게 하사 염치와 부끄러움을 가지고 늘 회개하며 사죄를 빌며 살게 해주시옵소서.

 
   
     
 

하나님과 원수까지 되었을 때 조차

우리는 주로 스스로 약해서 살기 힘들었던 날들만 기억한다.
내가 먹고 살기 어려워서, 자식을 키우기 힘들어서,
더 이상은 한 순간도 지탱해낼 힘이 없어서
곧 죽을 것 같았던 날들만 기억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그처럼 내가 무능력했던 날들보다는
내가 하나님 앞에서 범죄 했던 때야말로 정말 우리가
죽을 뻔했던 날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께 불평원망을 일삼고 때로는
'하나님과 원수까지 되었을 때'조차
한번 택하신 자를 끝까지 사랑해 주시며
오히려 우리의 인생행로에 '샘물 열둘과 종려 칠십 주'를
예비해 주셨던 은혜를 다시금 되새겨 보아야한다
-석기현 목사의 ‘라암셋에서 모압 평지까지’에서-

 
     
 
   
 


내가 못살겠다고 하나님 앞에서 원망하던 때,
나의 생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지 못하고
오히려 범죄하던 바로 그 때야말로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가장 위험했던,
아니 죽어 마땅했던 날들이 아니었겠습니까?
따지고 보면 그런 날들이 부지기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인애 때문에.

 
     
       
 

마태복음 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If you, then, though you are evil, know how to give good gifts to your children, how much more will your Father in heaven give good gifts to those who ask him!

 
       
 
   
  주신장로교회 황요한 목사
  무조건 선택 2
   
   




6월 22일 (수)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23-33
   
 

23.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24.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25.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6.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
27.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할 때에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8.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29.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30.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여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31.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2.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든 일이 무엇입니까?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믿음으로 사는 것보다,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더 힘들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생각들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이 교회라는 공동체에 속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보다 자기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하려고 교회를 떠나는지도 모릅니다. 주변에 있는 신앙인들 때문에 삶에 간섭을 받고 간섭받지 않고 편안하게 예수님을 믿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마도 사도 바울 시대에도 그런 고민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별히, 시장에서 우상에게 제물로 바쳤던 음식을 먹어도 된다는 사람과 그렇지 않다는 사람으로 나뉘어서 논쟁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우리에게 신앙인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23.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24.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먼저,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시장에서 사먹은 음식이 우상에게 제사 드린 음식인지 몰랐다면 하나님은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를 책망하시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이 주신 것으로 알고, 우리가 그 음식을 먹는다면 우리에게 책임을 묻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28-29절의 말씀처럼, 만일 누군가가 ‘이것은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이라고 말했다면, 그것을 말한 사람과 그 사람의 양심을 위해서 먹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누군가를 신앙의 길에서 시험에 빠지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신앙이란 하나님과 나의 관계만이 아니라, 나와 타인과의 관계를 포함합니다. 어쩌면 이런 부분이 앞에서 말한 것처럼, 신앙생활을 힘들게 하는 요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이 편 한대로, 자신의 의지대로, 자신의 정욕대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스스로 돌아볼 수 없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의 신앙을 말씀으로 격려하거나 돌이킬 수 있는 관계가 없다면, 하나님과 멀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31.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2.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나의 유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서로가 자신의 욕심을 구하는 삶은 결국 모든 사람이 멸망을 당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우리 조금 힘이 들더라도 서로를 바라보면서 함께 신앙의 길을 걸어간다면, 우리가 주님 안에서 온전하게 되는 길로 들어서게 될 것입니다.

 
   
   
 

- 오늘 내가 가진 선입견이나 생각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지 적어봅시다. 동시에 내가 다른 사람을 시험에 빠지게 하는 행동은 하고 있지 않은지 적어봅시다.
- 술, 도박, 제사 등 사람들 간에 생각의 차이가 있는 실질적인 일에 대해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생각해 봅시다.

 
   
   
 

- 하나님! 교회 안에서 서로를 비판하기 보다는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며 격려하는 공동체가 되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 사랑의 하나님! 내 삶의 모든 기준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도록 오른손으로 붙잡아 주옵소서!

 
   
     
 

만족을 모르는 당신

어느 나라에 남편감을 파는 백화점이 문을 열었다.
이 곳에 가면 마음대로 남편감을 골라 살 수 있었는데.
그곳의 규정은 이미 거쳐 왔던 층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것이었다.
두 여성이 꿈에 그리던 남편을 사려고 백화점을 갔는데.
1층에는 직업이 있고, 아이들을 좋아하는 남자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괜찮군. 1층이 이 정도면 한층 더 올라가 보자.”
”2층에는 돈 잘 벌고, 아이 좋아하며, 잘 생긴 남자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 좋아. 더 올라가자.” 3층에는 돈 잘 벌고, 아이 좋아하고,
잘 생겼고, 집안일도 잘 도와주는 남자들이 있었다.
“우와, 여기서 멈출 수 없어.”4층에는 돈 잘 벌고, 아이 좋아하고,
잘 생겼고, 일 도와주고, 아주 로맨틱한 남자들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맙소사! 4층이 이 정도면 5층은 상상을 초월하겠지.”
그러나 5층으로 올라가자, 5층의 안내문은
“5층은 비어 있음. 만족을 모르는 당신, 출구는 왼편에 있으니
계단을 따라 쏜살같이 내려가기 바람.”이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강성찬 목사의 ‘풍성한 은혜에 감사합시다’에서-

 
     
 
   
 


인간의 욕망은 바다 물과 같아서
만족이 없음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이야기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는 풍성한 은혜로 함께 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물질과 돈이 풍족하고 지식이 풍족하며
여러 조건을 갖추어야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욕심을 부릴 때가 아니라
여호와를 의지할 때 풍족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잠 28:25)
이미 받은 은혜에 감사하십시오.
만족한 삶을 얻고자 한다면.

 
     
       
 

고린도후서 1: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Indeed, in our hearts we felt the sentence of death. But this happened that we might not rely on ourselves but on God, who raises the dead.

 
       
 
   
  주신장로교회 황요한 목사
  무조건 선택1
   
   



6월 21일 (화)
참된 지혜란 무엇인가? 약 4:11-17
   
 

11.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12.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16.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17.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성령은 지혜의 영이며, 하나님의 말씀은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며, 말씀을 따라 지혜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지혜로운 삶은 이렇습니다.
첫째, 서로 비방하지 말고, 판단하지 않는 것이 지혜입니다(11). 마태복음 7장에서도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고 헤아림을 받지 않으려면 헤아리지 말라고 권면했습니다. 비방은 남의 명예를 훼손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형제를 사랑하라고 했지, 비방이나 판단을 금하셨습니다. 말씀을 지키고 따라야 할 크리스천이 형제를 비방하거나 판단하는 것은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도전하는 행위입니다. 다윗은 사울 왕으로부터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하였지만, 왕을 비방하거나 헤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중심을 하나님께 두고, 그분이 보시고 들으시고 갚아주신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다윗을 사랑하셨고, 그 분의 뜻을 다윗을 통해 다 이루셨습니다(행13:22). 남을 비방하고 판단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미련한 일이지만, 형제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 사랑이며 지혜로운 삶입니다(잠17:9).
둘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헤아려 보는 것이 지혜입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지만, 성경에서 금한 일은 피해야 합니다. 타인에게 손해를 끼치고, 주님의 일에 방해를 받는다면 좋은 직업이 아닙니다. 본문 13절은 장사를 계획해서 이익을 보려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분의 뜻은 생각하지도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해 보겠다는 것이 교만이며 바벨탑을 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내일 일을 알지 못하면서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삶을 살면서 자기 생각으로 허탄한 자랑을 하는 것은 악한 것입니다(14-16). 계획하고 준비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지만, 하나님을 무시하고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살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계획할지라도 이루시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의 뜻을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지혜입니다(잠16:9). 사람의 생명은 영원하지 못하며, 흙에서 나서 흙에서 나는 음식을 먹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입니다. 내일은 내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의 뜻을 내 삶에 우선순위로 삼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 하루를 주시고 생명 주신 그분을 인정하고 그분과 동행하면서 모든 일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셋째, 선을 알고 행하며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선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일입니다.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15) 주의 뜻을 알았다면 살면서 이것도하고 저것도 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얼마나 빠르냐의 문제보다 목적성과 방향성이 더 중요합니다. 조금 더디더라도 하나님의 일에 집중하며 살아가기로 다짐해야 합니다. 선을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것이 죄이기 때문에 크리스천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면서 나눔을 실천하고, 구제와 돌봄으로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의 인도함 속에 말씀을 따라 지혜롭게 살아가는 복된 크리스천이 되시기 바랍니다.

 
   
   
 

- 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지혜롭게 사는지 생각해보고 지혜를 위해 기도합시다.
- 남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습관을 점검하고, 회개하며 성령님의 도움을 구하십시다.
- 나를 향한 주님의 뜻을 구하고 선을 행하며 살아가기를 결단하십시다.

 
   
   
 

은혜로우신 하나님, 하나님의 자녀로 지혜롭게 살아가지 못한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옵소서. 이제는 비방보다 위하여 기도하고 축복하는 사람으로 살게 하옵소서. 성령님 도우셔서 유한한 존재임을 한시도 잃지 않게 하시고, 오직 주의 뜻을 따라 선을 행하며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자녀들에게 인정의 리더십을

미국에서는 무슨 누가 조금만 하면 Thank you.
Excellent. Perfect. 막. Beautiful. 전부 그 소리만 합니다.
좋은 소리, 듣기 좋은 소리, 아주 복음적인 소리.
힘나는 소리. 그런데. 우리는 자식한테 어떻게 해요?
칭찬은 주로 하지 않고 찍어만 댑니다.
단점만 다 찍어 대. 그게 우리나라 문화에요.
아주 귀신 문화에요. 빨리 고치고 바꿔야 돼요.
지금. 여러분이 시골에서, 지방에서 그야말로 가난하게,
그렇게 피눈물 나게 어렵게 사는 그런 문화하고
지금 아이들과 다르다니까요.
그리고 저들 또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인정의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정은주 목사의 ‘내 어린 양을 먹이라’에서-

 
     
 
   
 


늘 지적하고, 공부 안 한다고 계속 구박하고,
부정적인 말로 힘들게 하지 말고. 소통의 물꼬를 터야 합니다.
부모는 자기가 낳았다고, 자기 자식이라고.
자기 생각의 틀 안에, 자기 습관의 틀 안에,
자기 선입견 안에 딱 가두어 놓으려고 하는데.
그러면 창조적 지혜가 감퇴됩니다.
아이가 마음대로 선택해서 자기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인정하십시오.
나이가 어려도 함부로 말 하거나 감정적으로 하지 마시고
인격적으로 대해주십시오
그들은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기업입니다.

 
     
       
 

시편 119:176

 

잃은 양 같이 내가 방황하오니 주의 종을 찾으소서 내가 주의 계명들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
I have strayed like a lost sheep. Seek your servant, for I have not forgotten your commands.

 
       
 
   
  주는교회 강성현 목사
  우울증 이겨내기
   
   




6월 20일 (월)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 요한계시록 2:1-5
   
 

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소중히 여기십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부르신 분이시며, 형편없이 살아가는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시고 계십니다. 지금도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아시고 회복시키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히11:6).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아름다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분이 우리를 회복시키고자 하실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모든 짐을 져주심을 믿고 맡기기만 하면 쉼을 통한 회복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마11:28-29).
이것은 예배를 통해 실현되는데, 예배는 아이가 어머니의 품에 안겨 쉬듯, 주님의 품에 안겨 쉼을 얻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 연결되는 사람만이 회복되고 열매 맺는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은 나무에 물을 준다고 해서 열매가 맺히는 것은 아닙니다. 가지가 열매를 맺으려면 살아 있는 나무에 연결되어야 합니다(요15장). 내 삶이 열매 맺으려면 생명이신 예수님께 연결되어야 합니다(요14:6). 이것이 나의 신앙의 연수, 직분, 전통, 유명세보다 더욱 중요합니다. 속이 썩고 상해 있다면 껍데기를 소독하고 꾸며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열매는 생명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에베소교회는 본문의 초반부에 칭찬이 쏟아질 정도로 겉보기에 멀쩡한 교회로 주의 일에 수고하고, 거짓 사도들을 구별한 것, 열심을 다한 모습들을 다 안다는 것입니다(2-3). 그러나 한 가지를 책망하는데 그것은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입니다(4). 첫사랑은 내 인생의 모든 것을 걸어도 아깝지 않을 순수하고 진실한 사랑으로 기억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랑이 식어 가는 것도 모두 경험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 신앙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감사와 기쁨과 행복이 넘쳤습니다. 그러나 교회도 다니고 예배도 드리며 헌신도 하지만, 그 기쁨과 사랑, 그 헌신과 열정을 점점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은지 진단해 봐야합니다. 사랑을 잃어 버렸다면 다 잃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처방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5). 첫째,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열정이 식어버린 내 삶, 지금 불신과 분노로 혼탁한 우리 사회가 무엇이 문제인지, 왜 이렇게 되었는지 고민해봐야 할 것입니다. 문제를 밖에서 찾기보다 내 안에서 찾아 근본부터 치료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뉘우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 행동까지 동반 되어야합니다. 원인을 규명하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정리되면 시인하고 회개하는 자는 용기 있는 자입니다. 기독교는 회개의 종교로 예수님도 세례요한도 회개의 복음을 전합니다(마4:17). 회개하고 돌이키면 새롭게 되는 날이 이르게 될 것입니다(행3:19). 셋째, 처음 행위를 가져야합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는 의미입니다. 남녀 간 결혼서약, 정치인의 공약, 교회 직분자의 서약 등은 모두 진지한 의식입니다. 이것을 처음 마음으로 진실하게 지켜나갈 때 사회와 교회는 평안하고 개인도 복을 받아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마음과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7). 처음 사랑을 회복함으로 주님과 함께 행복한 삶을 영위하시길 소원합니다.

 
   
   
 

- 요즘 어떤 열매를 맺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좋은 열매를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회개하며 기도생활은 하시는지요? 지금 말씀 앞에서 진솔하게 고백하고 회개하십시다.
- 처음 주를 만났을 때의 사랑과 지금의 상태를 비교하고 무엇 때문인지 생각해봅시다.

 
   
   
 

하나님, 저의 모든 형편을 아시고 무엇이 잘못되었음도 아시는 주님, 바쁘고 힘들게 살아가느라 소중한 사랑을 잃어버리고 어리석게 살았음을 용서하옵소서. 회개하는 마음과 돌이킬 수 있는 행동하는 믿음 주옵소서. 처음 사랑을 회복시켜 주심으로 주안에서 행복한 삶이 되게 하시옵소서.

 
   
     
 

주님이 맡겨주신 주님의 양이기에

주님을 사랑하다는 베드로에게 주님은 명령을 하신다.
“내 양을 먹이라,.” 많은 말들이 있지만은 정리하면
“내 양의 목자가 되어라”는 명령이다.
. 나의 양, mine 이라는 우리의 것이 아닌 주님의 양이라는 것이다.
소유가 주님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 단어에서 우리는 깊이 깨달아야 한다.
목원이나 자녀, 직장의 모든 직원들
그들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 바로 주님의 소유라는 것이다.
단지 그들은 우리가 돌보아야 할 주님의 양들이라는 것이다.
주님의 것이기에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존재들이다.
그래서 목자의 돌봄은 지시나 권위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으로 되어지는 것이다.
-이동연 목사의 ‘예수님의 질문과 명령’에서-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 3)고 했습니다.
천사의 말이 있어도 사랑으로의 본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예수의 편지요, 중매자요, 사신이요,
향기로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섬기며 돌보아야 할 사람들은
천하보다 귀한 주님이 맡겨주신 주님의 양들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0: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let us draw near to God with a sincere heart in full assurance of faith, having our hearts sprinkled to cleanse us from a guilty conscience and having our bodies washed with pure water.

 
       
 
   
  주는교회 강성현 목사
  미세 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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