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바깥 뜰 외 2

鶴山 徐 仁 2016. 6. 4. 13:19
6월 3일 (금)
바깥 뜰 겔 40:17-27
   
 

17. 그가 나를 데리고 바깥뜰에 들어가니 뜰 삼면에 박석 깔린 땅이 있고 그 박석 깔린 땅 위에 여러 방이 있는데 모두 서른이며
18. 그 박석 깔린 땅의 위치는 각 문간의 좌우편인데 그 너비가 문간 길이와 같으니 이는 아래 박석 땅이며
19. 그가 아래 문간 앞에서부터 안뜰 바깥 문간 앞까지 측량하니 그 너비가 백 척이며 동쪽과 북쪽이 같더라
[북쪽을 향한 문]
20. 그가 바깥뜰 북쪽을 향한 문간의 길이와 너비를 측량하니
21. 길이는 쉰 척이요 너비는 스물다섯 척이며 문지기 방이 이쪽에도 셋이요 저쪽에도 셋이요 그 벽과 그 현관도 먼저 측량한 문간과 같으며
22. 그 창과 현관의 길이와 너비와 종려나무가 다 동쪽을 향한 문간과 같으며 그 문간으로 올라가는 일곱 층계가 있고 그 안에 현관이 있으며
23. 안뜰에도 북쪽 문간과 동쪽 문간과 마주 대한 문간들이 있는데 그가 이 문간에서 맞은쪽 문간까지 측량하니 백 척이더라
24. 그가 또 나를 이끌고 남으로 간즉 남쪽을 향한 문간이 있는데 그 벽과 현관을 측량하니 먼저 측량한 것과 같고
25. 그 문간과 현관 좌우에 있는 창도 먼저 말한 창과 같더라 그 문간의 길이는 쉰 척이요 너비는 스물다섯 척이며
26. 또 그리로 올라가는 일곱 층계가 있고 그 안에 현관이 있으며 또 이쪽 저쪽 문 벽 위에 종려나무를 새겼으며
27. 안뜰에도 남쪽을 향한 문간이 있는데 그가 남쪽을 향한 그 문간에서 맞은쪽 문간까지 측량하니 백 척이더라

 
   
   
 

에스겔이 하나님의 안내에 따라 성전 바깥 뜰로 들어갑니다.
<그가 나를 데리고 바깥 뜰에 들어가니 뜰 삼 면에 박석 깔린 땅이 있고 ...>(17절).
송구스런 말씀이지만 오늘 우리 한국 교회 성도들의 문제도 바로 이 점에 있는 것 같습니다.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엄격히 구분해 놓고 그 양쪽을 넘나들며 교회에서는 이런 모습으로, 또 세상에서는 저런 모습으로 나타나는 그 표리부동 말입니다. 일찍이 주님도 유대인들의 그런 위선과 외식을 간파하셨기 때문에 절대라고 우기는 안식일을 상대화하고 보편화하여 모든 날을 다 거룩한 날로 새롭게 해석하셨던 것이고, 또 예루살렘 <성전을 헐라!>(요 2:19)고 하심으로써 특정한 공간만을 거룩하게 보려는 관념을 비판하신 동시에 모든 삶의 장을 다 거룩하게 하라고 촉구하셨습니다. 물론 오랜 종교적 고정 관념을 개혁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주님으로서도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율법적 사고와 이원론적 고정관념과의 싸움이 결코 만만치 않으셨습니다. 안식일 법을 범하시면서 까지 한 쪽 손이 불구인 장애인을 고쳐주신 일로 유대교 지도자들의 분노를 사 그들이 당장 주님을 죽이기 위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막 3:6)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로서는 당시 주님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그 장애인을 고쳐주시며 실제 무슨 생각, 어떤 각오를 하셨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서는 주님의 그 행위가 바로 그의 죽음의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동시에 주님은 그 행위를 숨어서 하신 게 아니라 마치 거기에 따르는 모든 책임을 홀로 짊어지시려는 듯 백일하에 드러내놓고 했다고도 전합니다. 우리의 이원론적인 신앙과의 싸움도 이렇듯 책임적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늘 무능하고 특히 개혁적인 부분에 대해 한없이 무력한 것은 바로 책임의식이 투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개혁을 내세우면 뭔가가 희생될 게 뻔하기 때문에 그 희생에 따른 책임이 두려워 눈을 감는 겁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성서의 하나님은 결코 원만한 인격을 기르자는 분이 아니십니다. 책임적인 존재이기를 요구하는 분이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웃 앞에서 역사 앞에서 언제나 책임적으로 살아가시는 성도가 되시길 빕니다.

 
   
   
 

-주님의 이원론적 종교 관념과의 싸움은 생각보다 몹시 치열하셨습니다. 이 시대 우리들이 극복해야 할 이원론적 신앙 행태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유대인들이 안식일의 치유 행위를 보고 주님을 죽일 음모를 꾸몄다면 당시 주님은 죽을 각오를 하시고 그 장애인을 고치신 겁니다. 당신도 믿음의 행위, 사랑의 행위에 대해 책임질 각오가 돼 있으십니까?
-현재 한국 교회가 직면한 여러 가지 비판과 선교적 어려움의 상당 부분은 그동안 오직 무책임한 신자만을 양산해 온 결과라는 지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주님, 그렇습니다. 책임질 각오가 돼 있지 않은 사랑은 감상일 뿐 사랑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랑이나 개혁은 희생이나 수난 없이는 결코 가능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주님을 제대로 따라가며 이웃을 진실하게 사랑하고 교회에서 만이 아니라 내 삶의 한복판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관철하려면 반드시 투철한 책임의식이 요구됩니다. 부디 주님처럼 저희도 저희의 선택과 결단에 대해 보다 책임지는 신자로 남기에 부족함이 없게 해주시옵소서. 주님 앞에서 이웃 앞에서 언제나 책임적인 자세와 각오로 살아가게 해주시옵소서.

 
   
     
 

새 족보를 연 둘째 사람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첫 번 아담이 대표자로서 만든 족보를 끝낸 마지막 아담이며
또한 죄인의 대표자였던 첫 사람의 족보를 끝내고
새로운 족보를 연 둘째 사람인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대표원리이다.
우리가 아담과 한 통속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 사실인 것만큼
이제는 그것보다 더 넘치게 예수 그리스도와
한 통속일 수밖에 없다는 것 역시 사실인 것을 알아야 한다.
아담에게 사실인 것은 나에게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실인 것은
또한 우리 믿는 모든 자에게 사실일 수밖에 없다.
-박영선 목사의 ‘대표원리와 구원’에서-

 
     
 
   
 


내가 범죄하지 않았는데도
아담 때문에 내가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으며
내가 죄를 짖지 않았는데도 아담 때문에 죄악 세상에서 살면서
부당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모든 신자는 칭찬과 축복과 약속들을
받을 아무 조건과 이유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 때문에 그것들을 받는다는 것이
사실일 수밖에 없게 된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신자들의 기기묘묘한 축복의 자리입니다.

 
     
       
 

요한1서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This is love: not that we loved God, but that he loved us and sent his Son as an atoning sacrifice for our sins.

 
       
 
   
  신일교회 배석찬 목사
  청결하고 정직해 집시다
   
   



6월 2일 (목)
담과 벽 겔 40:1-16
   
 

1. 우리가 사로잡힌 지 스물다섯째 해, 성이 함락된 후 열넷째 해 첫째 달 열째 날에 곧 그 날에 여호와의 권능이 내게 임하여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시되
2. 하나님의 이상 중에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에 이르러 나를 매우 높은 산 위에 내려놓으시는데 거기에서 남으로 향하여 성읍 형상 같은 것이 있더라
3. 나를 데리시고 거기에 이르시니 모양이 놋 같이 빛난 사람 하나가 손에 삼줄과 측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문에 서 있더니
4. 그 사람이 내게 이르되 인자야 내가 네게 보이는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네 마음으로 생각할지어다 내가 이것을 네게 보이려고 이리로 데리고 왔나니 너는 본 것을 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할지어다 하더라
5. 내가 본즉 집 바깥 사방으로 담이 있더라 그 사람의 손에 측량하는 장대를 잡았는데 그 길이가 팔꿈치에서 손가락에 이르고 한 손바닥 너비가 더한 자로 여섯 척이라 그 담을 측량하니 두께가 한 장대요 높이도 한 장대며
6. 그가 동쪽을 향한 문에 이르러 층계에 올라 그 문의 통로를 측량하니 길이가 한 장대요 그 문 안쪽 통로의 길이도 한 장대며
7. 그 문간에 문지기 방들이 있는데 각기 길이가 한 장대요 너비가 한 장대요 각방 사이 벽이 다섯 척이며 안쪽 문 통로의 길이가 한 장대요 그 앞에 현관이 있고 그 앞에 안 문이 있으며
8. 그가 또 안 문의 현관을 측량하니 한 장대며
9. 안 문의 현관을 또 측량하니 여덟 척이요 그 문 벽은 두 척이라 그 문의 현관이 안으로 향하였으며
10. 그 동문간의 문지기 방은 왼쪽에 셋이 있고 오른쪽에 셋이 있으니 그 셋이 각각 같은 크기요 그 좌우편 벽도 다 같은 크기며
11. 또 그 문 통로를 측량하니 너비가 열 척이요 길이가 열세 척이며
12. 방 앞에 간막이 벽이 있는데 이쪽 간막이 벽도 한 척이요 저쪽 간막이 벽도 한 척이며 그 방은 이쪽도 여섯 척이요 저쪽도 여섯 척이며
13. 그가 그 문간을 측량하니 이 방 지붕 가에서 저 방 지붕 가까지 너비가 스물다섯 척인데 방문은 서로 반대되었으며
14. 그가 또 현관을 측량하니 너비가 스무 척이요 현관 사방에 뜰이 있으며
15. 바깥 문 통로에서부터 안 문 현관 앞까지 쉰 척이며
16. 문지기 방에는 각각 닫힌 창이 있고 문 안 좌우편에 있는 벽 사이에도 창이 있고 그 현관도 그러하고 그 창은 안 좌우편으로 벌여 있으며 각 문 벽 위에는 종려나무를 새겼더라

 
   
   
 

<매우 높은 산>(22절)이란 예루살렘의 시온 산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을 그 높은 산으로 인도하사 성읍처럼 커다란 성전에 대한 이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에스겔이 그 성전을 두루 다니며 처음으로 본 것은 성전 바깥 사방을 높이 둘러싸고 있는 담과 수많은 성전 문지기들의 방, 그리고 각 방 사이의 두꺼운 벽들이었습니다.
<내가 본즉 집 바깥 사방으로 담이 있더라 ... 그 담을 측량하니 한 장대요>(5절).
<그 문간에 문지기 방들이 있는데 ... 각 방 사이 벽이 다섯 척이며>(7절).
성전 사방의 높고 튼튼한 담이나 문지기 방들 사이 벽들은 이를테면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과 세상을 확실히 구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담을 쌓고 벽을 만들어 문지기를 세운 것도 다 세속으로부터 하나님의 거룩한 성역을 지키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그런데 복음서에는 주님의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막 3:4).
주님의 이 질문은 굳이 안식일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삶 전반에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주님은 이 물음으로써 평일과 안식일을 구분하는 전통적인 이원론적 관념을 철폐해 버리셨습니다. 안식일만 거룩하고 성전만 거룩하다면 다른 날, 다른 곳에서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상관없다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반면 주님이 안식일의 특수성을 폐지해 버리신 것은 오히려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날의 의미, 성전의 의미를 모든 날, 모든 삶의 지평으로 확대시키신 것이 됩니다.

주님은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안식일 법의 맹목적인 권위에 대해 그 법 제정의 본래적인 뜻을 되묻음으로써 성전의 모든 담과 벽을 허무시며 안식일과 성전이 거룩하다면 이 세상 모든 날, 모든 삶의 자리도 다 거룩하다고 하시며 언제, 어디서든 거룩하게 살 것을 촉구하신 것입니다. 주일만, 교회에서만 거룩하지 마시고 평일, 세상 한복판에서도 늘 거룩하게 사십시오.

 
   
   
 

-주님은 모든 담과 벽을 허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의 세속화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세상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뜻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유대인들의 삶의 구심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성전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 중심의 세계관 속에서 살았습니다. 오늘 당신의 삶의 구심에는 주님의 몸된 교회가 있습니까?
-성속의 이분법적 개념이 아닌 언제 어디서나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통전적 개념의 <거룩>이 곧 복음적 가르침임을 믿으십니까?

 
   
   
 

주님, 과거 에스겔이 본 이상 속의 성전, 그리고 실제 재건된 예루살렘 성전은 담도 높고 벽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모든 담과 벽을 허셨고, 심지어는 성소의 휘장까지도 가르셨습니다. 따라서 이제 저희는 주님 안에서 모두가 하나일 뿐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성일처럼, 성전처럼 거룩하게 살며 세속 한복판에서도 빛으로 소금으로 복음적인 삶을 살아야 함을 깊이 깨닫게 해주시옵소서.

 
   
     
 

어쩌면 동성애와 이슬람 보다 더

동성애와 이슬람이 한국교회에 심각한 위협임은 틀림없지만,
그보다 더 무섭게 한국교회를 무너트리고 있는 세력은
우리 밖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다.
우리의 죄악과 부패와 위선과 교만과 독선,
그리고 인간에 대한 예의와 사랑 없음에 있다.
동성애는 분명히 죄악시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죄에 빠진 이들에 대해서도
긍휼과 자비의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동성애만이 심각한 죄가 아니라
우리의 독선과 교만, 위선이 훨씬 더 가증한 죄일지도 모른다.
-박영돈목사의 ‘인간에 대한 기본 예의’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상대가 아무리 혐오스럽고 적대적인
사람들일지라도 인간에 대한 기본 예의를 갖추어야합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동성애자들이 끔찍하게 혐오스러운 대상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도 대단히 혐오스러운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하나님의 무궁한 자비와 사랑으로
죄사함을 받았으니 아직 이 은총을 알지 못하는 동료 죄인들을
지극히 겸손함과 온유함과 사랑으로 대하며
그들을 진리의 길로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로마서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If we live, we live to the Lord; and if we die, we die to the Lord. So, whether we live or die, we belong to the Lord.

 
       
 
   
  신일교회 배석찬 목사
  어린이, 미래의 소망
   
   




5월 31일 (화)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 이사야 43:18-21
   
 

18.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20.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우리에게 2016년이라는 큰 도화지를 주신 것이고, 삶을 통해 그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보기에 좋은 그림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을까요?
첫째, 예배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예배가 아니면 우리의 삶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틈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개입이 없는 삶에 어찌 변화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오벧에돔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3개월간 지켰습니다. 언약궤를 만져서 웃사가 죽은 직후였기에 그는 목숨을 걸고 언약궤를 지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록 3개월이었지만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그와 그의 자손이 큰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예배만큼은 목숨을 걸고 지켜야겠다는 의지를 가져야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둘째, 많이 나누며 섬겨야 합니다. 우리가 나누지 못하고 섬기지 못하는 것은 미래를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호와를 기뻐하라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시37:4)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기뻐하고 살아가면 걱정과 불안은 달아납니다. 그러면 진정한 기쁨으로 이웃을 섬길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하듯 사람들 앞에게도 해야 합니다.
셋째, 믿음으로 꿈꾸면서 살아가야합니다. 새해를 향한 기도제목이 아직도 없다면 만들어야 합니다. 미래는 꿈꾸는 자의 것입니다. 요셉의 꿈을 형제들은 조롱했지만, 그 꿈들은 모두 현실이 되었습니다. 상황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꿈을 꾸어야합니다. 우리가 꿈을 꾸고 그것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간섭해주시고 우리가 다시 그것에 반응할 때 우리의 삶에 변화가 찾아올 것입니다.
새해가 오히려 두려운 분이 있으십니까? 하나님께 범죄하여 바벨론에서 종살이하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내가 너를 지었으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사43:1). 어려운 이 시대에 우리가 붙잡을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고 과거의 굴레와 미래의 불안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고, 길이 없는 광야에 길을 내시고 사막에 강이 흘어 하나님의 동산을 만들겠다고 하십니다(19).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하시면 됩니다.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한해가 되시어 놀라운 은혜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 새해의 계획이 무엇인지 점검해 보고, 기도제목은 무엇인지 정리해 봅시다.
- 예배를 통해 나의 삶이 어떻게 변화되어 가는지 생각해봅시다.
- 과거 때문에 절망하고 있지 않나요? 새 일을 행하시는 주님께 기도하세요.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새로운 한해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더 기도하고 바른 예배자로 살아 주님의 기쁨이 되게 하옵소서. 이웃을 섬기며 사랑을 실천하는 한해로 인도하시옵소서. 지나간 일들 다 잊고 주님이 행하시는 새 일을 꿈꾸며 승리하게 하시옵소서.

 
   
     
 

막연히 새 모습이 된 것이 아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것은 죄인의 사망이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을 향해서 죽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해서 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목적을 가지고 새롭게 살게 된 모습이다.
하나님을 향한 새 생명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해서 살라고 새 생명을 주었다는 뜻이다.
우리에게 새 계절이 임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삶의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이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살며
그에게 미쳐서 사는 삶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 것이다.
- 김승욱 목사의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함이니라’에서-

 
     
 
   
 


우리는 막연히 새 모습이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은혜로 구원되는 순간에, 옛 사람이 장사되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며 하나님을 향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로 날마다 새롭게 역사하십니다.
은혜로 인해서, 죽은 내 모습과 다시 살게 된 모습은 .
하나님을 향해서 살게 된 새로운 모습입니다.

 
     
       
 

고린도전서 4: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Therefore judge nothing before the appointed time; wait till the Lord comes. He will bring to light what is hidden in darkness and will expose the motives of men's hearts. At that time each will receive his praise from God.

 
       
 
   
  신일교회 배석찬 목사
  선한 그리스도인이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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