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9.02 16:15
- ▲ 평사포지만 곡사포로도 사용이 가능한 76mm M1942 ZiS-3 사단포.
1941년 초가 되었을 때 유럽은 독일과 소련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미 오스트리아와 체코를 합병한 독일은 1939년 소련과 폴란드를 사이 좋게 나누어 먹고 곧바로 총구를 서쪽으로 돌려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 일대를 점령하였다. 역시 폴란드의 반을 획득한 소련도 발트 3국을 무력으로 병합하고 루마니아 북부와 핀란드의 남부 일대를 강탈하는데 성공하며 독일 못지않게 팽창을 이루었다.
이 와중에 중립을 표방하는 나라들도 있었으나 많은 약소국들은 유고슬라비아, 그리스처럼 침략당하여 망하지 않기 위해 독일이나 소련에 협력하며 생존을 유지하여야 했다. 하지만 절대 강자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다는 현실은 충분히 더 큰 충돌을 예견하도록 만들었다. 필요에 의해 1939년 독일과 소련이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고 동맹국이 되었지만 공공연히 상대의 격멸을 주장하였을 만큼 이 둘은 결코 상생하기 어려운 견원지간이었다.
- ▲ T-34, M42 대전차포와 더불어 신속하게 하천을 건너는 ZiS-3. 흔히 소련에서 T-34와 ZiS-3을 조국을 구한 무기라고 부른다.
영국을 제외한 유럽 대부분을 발 밑에 넣은 독일에게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상대는 소련이었다. 사실 소련도 이런 독일의 야심을 모르던 것은 아니었고 공산주의 세계화를 위해서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부딪힐 상대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1941년 6월 22일, 소련이 예상했던 것보다 빨리 독일의 침공이 개시되었다. 전쟁 개시 넉 달 동안 소련은 역사에 길이 남을 엄청난 참패를 연이어 당하며 멸망이 확실해 보였다. 하지만 소련의 항전 의지는 실로 대단하였다.
독일은 소련의 능력을 폄하하고 전쟁을 개시하였지만 격파한 것보다 더 많은 소련군이 전선에 계속 등장하였고 그들이 들고 나온 무기의 성능도 예상을 빗나갈 만큼 좋았고 갈수록 강력해졌다. 특히 전선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전차와 야포는 독일군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될 정도였다. 소련에서 구국의 전차라고 불리는 T-34처럼 흔히 구국의 포로 불린 M1942 ZiS-3 사단포(이하 ZiS-3)도 그러했던 대표적 무기 중 하나였다.
- ▲ 다양한 종류의 76.2mm 포탄. 대인, 대물, 대전차 공격처럼 상이한 목적에 맞게 사용할 수 있다. <출처 (cc) George Shuklin at Wikimedia.org>
새로운 요구
제정 러시아 당시부터 포병을 중시했던 소련은 다양한 목적에 투입할 여러 종류의 포를 운용하였다. 대구경도 있었지만 76mm(정확히 76.2mm, 3인치) 구경은 전차포, 대전차포, 방어용 산포, 보병 화력지원용 평사포 등으로 널리 애용되었다. 포는 일단 구경이 크고 포신이 길면 화력이 강하지만 무거워서 이동하는데 애를 많이 먹을 수밖에 없다. 특히 교통망이 나쁜 소련에서 이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다.
그런 점에서 볼 때 76mm 구경은 나름대로 충분한 강력한 화력을 발휘할 수 있고 상대적으로 포신(砲身)이 가볍다. 하지만 그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제2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인 1930년대 중반에 제작하여 주력으로 삼던 M1936 F-22 사단포(이하 F-22)나 M1939 USV 사단포(이하 USV3)는 이동하는데 여전히 무거운 편이었다. 또한 복잡하고 많은 부품으로 말미암아 거친 야전에서 정비하고 운용하는데 애로를 겪고는 했다.
- ▲ (좌)M1936 F-22 사단포. 성능은 그럭저럭 쓸만했지만 무겁고 복잡하여 야전에서 운용하는데 애로점이 많았다. <출처 (cc) Сайга20К at Wikimedia.org>
(우)57mm ZiS-2 대전차포. 그라빈은 여기에 사용된 포가에 76mm 포신을 장착하는 방식으로 개발 기간을 단축하였다. <출처 (cc) S. Filatov.>
결국 1939년 폴란드, 핀란드 침공 당시 여러 문제점이 나타나면서 일선에서 새로운 76mm 사단포에 대한 요구가 이어졌다. 이에 따라 개발이 시작되었지만 이는 정책 당국의 지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일선의 애로를 알게 된 ‘포 생산 위원회’ 수석 엔지니어였던 그라빈(Vasiliy Grabin)의 주도로 제92 포공장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 특징이다. 사실 이때만 당장 일선에 배치할 신형포의 제작이 목적이 아니라 단지 실험적인 성격이 컸다.
그래서 일단 기존에 성능이 확인된 여러 포들의 장점을 조합하는 방식으로 개발이 이루어졌다. 무게를 줄이기 위해 일선에서 다루기 쉽다고 평판이 자자한 57mm 구경의 ZiS-2 대전차포의 포가(砲架)에 76mm 포신을 얹었다. 이렇게 해서 구조를 최대한 단순화하고 무게를 줄이는데 성공하였지만, 사격 시 76mm 포의 발사 충격을 ZiS-2에서 사용한 주퇴복좌기(駐退復座機)가 견디지 못하는 문제점이 발생하였다.
- ▲ (좌)ZiS-3의 폐쇄기 부분. 사격 후 탄피가 자동 배출되어 고속 연사가 가능하였다. <출처 (cc) George Shuklin at wikimedia.org>
(우)세바스토폴 사푼 고지 전적지에 전시된 ZiS-3. 소련 76mm 포로 보기 드물게 머즐 브레이크를 장착하여 쉽게 구별이 가능하다. <출처 (cc) Cmapm at Wikimedia.org>
무능한 이가 이끈 비극
이에 따라 ZiS-3의 특징인 머즐 브레이크(Muzzle Brake, 포구 제퇴기)가 포구에 장착되었고 주퇴복좌기를 유압식으로 바꾸어 발사 충격을 30퍼센트 정도 절감하는데 성공하였다. 또한 사격 후 탄피의 자동 배출이 가능한 개량형 폐쇄기가 장착되어 분당 최대 25발의 고속 연사가 가능하였다. 하지만 정작 당국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그렇게 된 데는 무능한 소련 장군의 대명사와 같았던 쿨리크(Grigory Kulik, 1890~1950) 때문이었다.
쿨리크는 군사적으로 문외한과 다름없었지만 뛰어난 처세술로 스탈린의 환심을 사는데 성공하여 1937년 소련군 포병감독관이 되었고 1940년에는 원수로 승진하였다. 그는 불과 5대만 시험 생산한 다포탑전차(Neubaufahrzeug)를 독일이 비밀무기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하자 이에 놀라 76mm 포로 격파가 불가능하다고 보고 ZiS-3의 생산은 물론 기존에 제식화 된 F-22나 USV의 양산도 중지시켜 버렸다.
하지만 곧바로 발발한 독소전쟁 초기에 등장한 독일의 전차들은 76mm 철갑탄으로 충분히 격파가 가능한 수준이었다. 정작 독일의 기습으로 말미암아 일선에 있던 대부분의 F-22나 USV는 격파되거나 노획 당하였고 그나마 남아있던 물량조차도 전쟁 전 포탄 증산을 허락하지 않았던 쿨리크의 지시로 말미암아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당장 대전차용 76mm포의 추가 생산이 절실히 필요하였다.
ZiS-3은 구조가 간단하여 제작비도 F-22 USV의 70퍼센트에 불과하고 생산과 유지보수가 편리하였다. 그러나 쿨리크는 ZiS-3의 양산을 허락하지 않고 기존에 사용하던 F-22 USV의 증산을 지시했다. 그는 흔히 소련을 구한 무기로 언급되는 ZiS-3과 T-34 전차의 양산에 모두 반대하였던 어처구니 없던 인물이었다. 이처럼 당시 소련군 원수의 능력이 이 정도였으니 개전 초기에 있었던 연속된 참패는 어쩌면 당연하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 ▲ 1945년 4월에 벌어진 젤로 고지 전투 당시 포격을 가하는 ZiS-3. 탄생 이후 소련군과 함께 하며 제2차 당시 많은 전과를 올렸다.
스탈린의 극찬
그런데 당장 포를 달라고 절규하는 일선의 요구를 외면할 수 없던 제92 포공장은 명령을 어기고 비밀리에 조금씩 ZiS-3를 제작하였다. 반면 복잡한 포가 구조로 말미암아 생산성이 나빴던 F-22와 USV는 제때 필요 물량을 공급할 수 없었다. 결국 1941년 12월 모스크바 전투로 간신히 독일의 진격을 저지한 소련은 상황의 심각함을 인지하고 당장 생산이 용이한 무기라면 일단 제작하여 전선에 투입하도록 조치하였다.
- ▲ 보병과 함께 이동하며 근접하여 화력을 지원할 목적으로 제작된 SU-76 자주포.
이에 따라 1942년 2월, 심사를 거쳐 마침내 ZiS-3은 소련군 사단포로 공식 채택되었다. 다루기 쉽고 상대적으로 가볍다 보니 최초에는 보병을 따라다니며 근접에서 화력을 지원하는 용도로 주로 사용되었지만 대전차 전투에서도 탁월한 효과를 발휘하였다. 티거(Tiger) 같은 중전차는 격파가 어려웠지만 수적으로 독일군의 주력이던 3, 4호 전차는 충분히 격파가 가능하였다. 독일 전차병에게 ZiS-3은 마치 소련 전차병들이 공포스러워하던 8.8cm FlaK 같은 존재였다.
ZiS-3은 고속의 포구 속도를 바탕으로 관통력이 뛰어난 평사포지만 곡사 사격도 가능하였다. 따라서 다양한 용도로도 사용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보병 지원용으로 애용된 SU-76 자주포다. 한마디로 소련군이 있는 곳이면 항상 같이하며 든든하게 화력 지원을 해주던 마당쇠 같은 존재로 스탈린은 “최고의 걸작”이라 찬사를 보냈을 정도였다. 무엇보다 10만 문이 넘는 어마어마한 생산량으로 모든 것이 설명 될 정도다.
- ▲ (좌)한국전쟁 파괴된 SU-76 자주포. 당시에 북한군 주력 무기 중 하나였다.
(우)월미도 점령 후 노획된 ZiS-3. 한국전쟁 당시에 북한군의 주력 야포였다.
현재도 계속 중인 불쾌한 기억
이처럼 소련에게는 조국을 구한 포라는 찬사를 받지만 우리와 ZiS-3의 관계는 악연이다. 1950년 북한이 공여 받은 ZiS-3와 SU-76을 앞세워 남침을 감행하였기 때문이다. 개전 초 북한군은 ZiS-3을 비롯한 다양한 76mm 포를 장비한 포병연대를 사단마다 편제하여 화력면에서 국군을 압도하였다. 또한 ZiS-3을 탑재한 SU-76은 T-34전차와 함께 침략의 선봉에 서서 방어에 나선 국군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월미도에 해안포 용도로 배치된 ZiS-3의 반격으로 말미암아 미 해군 구축함 콜레트(Collett), 구르크(Gurke), 스웨슨(Swenson) 등이 경미한 피해를 입었다. 이 와중에 발생한 2명의 전사자와 9명의 부상자는 당시 작전 중에 해군 수병이 입은 유일한 인명 피해였다. 또한 분해해서 인력으로도 쉽게 이동이 가능하기에 전쟁 후반 고지전에서도 상당한 위력을 발휘하였다. 이처럼 북한은 ZiS-3을 상당히 애용하였다.
- ▲ 지금도 북한은 상당량의 ZiS-3을 해안포로 사용 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연평도 포격이나 중부전선 포격 사건처럼 여전히 우리의 안보를 위협하는 존재다.
ZiS-3은 개발국 소련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퇴역하였고 우리도 북한군이 보유 중인 물량을 그다지 심각하게 수준으로 보고 있지 않았지만 2010년 11월 23일에 있었던 연평도 포격 사건과 2015년 8월 20일 있었던 중부전선 포격 사건 당시에 북한군이 공격에 사용하면서 그 역할이 새삼스럽게 부각되었다. 그러면서 북한군이 최일선에서 이처럼 오래 된 포를 계속 사용하여 할 만큼 상황이 열악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었다.
하지만 총이나 포는 시간이 흐른다고 사용 목적이나 위력이 감소하지는 아니다. AK-47 소총이나 M2 중기관총처럼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무기가 존재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어쩌면 포가 갖추어야 할 기본에 가장 충실하였던 ZiS-3도 이런 부류에 가장 부합되는 무기다. 물론 최신 포와 비교한다면 성능이 미흡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워낙 처음부터 잘 만들어지다 보니 ZiS-3은 우리에게 여전히 부담을 안겨주는 현재 진행형 무기라 할 수 있다.
제원
구경 76.2mm/ 무게 1,116kg/ 전장 3.931m/ 앙각 +37도/ 발사속도 분당 25발/ 유효사거리 13,290m
글 남도현 | 군사 저술가[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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