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거일의 생각]<10>강력한 노조에
맞설 지도자가 나올 수 있겠는가?
복거일 소설가·사회평론가
입력 2014-09-30 03:00:00 수정 2014-09-30 08:51:40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지도자의 중심적 책무는 그가 이끄는 집단의 목표를 이루는 것이다. 다음 책무는 집단을 유지하는 것이다. 물론 이 둘은 연관되어 있다. 목표를 이루어야 집단이 오래 유지될 수 있고, 집단이 유지되어야 힘들고 오래 걸리는 목표를 이룰 수 있다.
이 점에서 대한민국의 지도자는 운이 좋다. 헌법에 구현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지금까지 사람들이 생각해낸 어떤 이념이나 체제보다 낫기 때문이다. 우리 지도자는 그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이상형에 보다 가깝게 다듬어내려 애쓰기만 하면 된다. 책무를 수행하기가 비교적 쉽고 실패의 위험이 작고 보람이 크다.
사람의 천성을 거스르는 전체주의와 명령경제를 추구한 사회의 지도자들은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을 하는 셈이다. 전체주의 사회는 본질적으로 사악하므로 그런 사회의 지도자는 자신이 먼저 사악해지고 둘레의 경쟁자들보다 더 사악해져야 살아남는다. 레닌과 스탈린, 히틀러, 마오쩌둥, 김일성의 음산한 삶은 우리에게 그 점을 늘 일깨워준다.
대한민국에 필요한 지도력
지금 우리 시민들은 모두 자유민주주의를 지지한다. 적어도 드러내놓고 반대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시장경제는 사정이 다르다. 시장의 본질과 움직임을 이해하는 시민들은 아주 적고 시장경제를 지지하는 시민도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문제가 생기면 으레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라고 요구한다.
따라서 대한민국에 필요한 지도자의 첫 조건은 시장경제에 대한 굳은 믿음이다. 시장경제가 이상에 가까울수록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고 사회가 발전한다고 굳게 믿어야 온갖 어려움들을 헤치면서 우리 사회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
한 나라를 이끄는 데 필요한 덕목들은 물론 여럿이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북한의 급박한 위협을 막아내야 하므로, 우리 지도자는 안보에 대한 식견도 높아야 한다. 강대국들을 이웃으로 두고 미국과의 동맹으로 안정을 유지하는 처지라서 외교적 능력도 뛰어나야 한다. 그래도 시장경제에 대한 이해와 믿음은 우리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가장 두드러진 덕목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시장경제에 호의적이었던 대통령들은 경제에서 치적이 컸고, 비우호적이었던 대통령들은 치적이 예상보다 작았다.
강성노조의 폐해
이런 사정은 시장경제에 상대적으로 비우호적인 좌파 정당으로서는 곤혹스러운 일이다. 세금을 보다 많이 거두고 시장에 대한 규제를 보다 엄격히 하자는 정책을 추구해 온 정당이 단숨에 시장경제에 우호적 태도를 보이기는 어렵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영국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총리가 바로 그 길을 걸었다. 그는 시장경제에 맞는 정책들을 내놓아 보수당으로부터 “노동당이 다 훔쳐가서 우리 것이라고 내놓을 것이 없다”는 불평을 들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런 정책들을 적극적으로 추구해 영국을 오랫동안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근년의 예로는 사회주의 정당의 후보에서 시장경제를 추구하는 대통령으로 변신해 경제를 발전시킨 브라질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가 있다. 동유럽에서 명령경제 체제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 시장경제를 받아들인 김대중 대통령이 기대보다 훨씬 큰 업적을 남긴 것은 더욱 적절한 예다.
그러면 우리 시장경제를 보다 이상형에 가깝게 만드는 방안은 무엇인가? 또 그 방안에서 핵심적인 과제는 무엇인가?
경제학자들은 합의하는 경우가 드물지만, 개혁의 핵심은 늘 노동 시장의 유연화라는 점에 대해선 이내 합의한다. 즉 노동조합의 권한을 줄이는 것이 무엇보다도 긴요하다는 얘기다. 노조가 노동 공급을 독점하도록 한 것은 시장경제의 원리를 근본적으로 어긴 것이니, 노조가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필연적이다.
경제학 교과서에 나온 노조의 폐해들은 열거하기 지루할 정도로 많다. 그것들을 이해하는 데 경제학 지식이 꼭 필요한 것도 아니다. 한때 세계의 자동차 생산 중심지였던 디트로이트가 황폐해진 것을 보는 것만으로 족하다. 전투적인 노조에 눌려 미국 자동차 회사들은 임금과 연금을 올렸고, 마침내 경쟁력을 잃어서 파산했다. 우리 제조 기업들이 외국으로 탈출해 우리 제조업의 속이 텅 비고 일자리가 늘어나지 않는다는 사정도 우리는 알 만큼 안다.
그렇다고 노동자들이 혜택을 입는 것도 아니다. 노조는 자체로 경제를 성장시킬 힘이 없다. 따라서 힘센 노조의 조합원들이 생산성 증가율보다 임금을 많이 받으면, 그들은 힘이 약한 노동자들의 몫을 가져가는 셈이다. 노조에 든 10% 이하의 유복한 노동자들을 위해서 나머지 90% 이상의 약하고 가난한 노동자들이―하청업체의 종업원들, 비정규적 및 외국인 노동자들이―희생되는 셈이다.
일자리 세습
같은 회사의 외국 공장들에 비해 생산성이 반밖에 되지 않아서 회사가 외국에 공장을 증설하면 국내 젊은이들의 일자리가 사라진다. 공장이 쉬어서 생계가 어려우니 제발 파업을 끝내 달라고 파업한 자동차 회사 종업원들에게 호소하는 하청 업체 종업원들의 애처로운 모습이 그런 구조를 잘 드러낸다. 물론 ‘귀족 노조’는 입장이 단호하다. 조지 오웰의 얘기를 조금 바꾸면, 그들의 주장이 된다. “모든 노동자는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노동자들은 다른 노동자들보다 더 평등하다.”
귀족은 세습되는 신분이므로 ‘귀족 노조’의 조합원들은 자식들에게 자신들의 일자리를 물려줄 권한이 있다고 확신하고 실제로 단체협약에서 일자리 세습을 포함시킨다. 기업의 소유와 경영은 바뀌어도 자신들은 바뀌지 않으므로 그들은 자신들이 진정한 주인이라 자부한다. 그래서 기업의 소유가 바뀌면 파는 쪽엔 ‘위로금’을, 사는 쪽엔 상당한 주식을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매매가 안 된다.
외국인들이 ‘독성(toxic)’이라고 평하는 우리 노동 시장에서 노조의 횡포와 폐해를 줄일 길이 있는가? 시장경제에 대한 믿음이 굳더라도 강력한 노조에 맞서 시장경제의 원리를 관철시킬 지도자가 나올 수 있겠는가? 우리 사회의 지식인들이 조건반사적으로 노조를 지지하는데, 우리 노동시장을 유연하게 만들려는 지도자의 노력이 과연 시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까?
노조의 근거와 힘은 노동 공급에 대한 독점을 노조에 부여한 헌법 규정이다. 당연히 적법한 노조 활동은 보장된다. 그러나 지금 우리 경제에 해를 끼치는 노조 활동들은 대부분 불법이다. 요즈음엔 경영자의 권리와 주주들의 재산권을 침해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런 불법 행위들을 엄격히 벌하는 것만으로도 노동 시장은 적잖이 유연해지고 경제는 건강해질 것이다.
노동 시장의 유연화를 생각한 지도자 하면 자연스럽게 마거릿 대처 총리가 떠오를 것이다. 대처가 단호하게 맞서서 이긴 것이 노조의 불법 행위들이라는 사실과 당시 영국 지식인들 모두 대처를 비난했다는 사실은 우리 지도자의 앞길이 험난함을 말해준다. 그래도 대처는 끝내 이겼다. 헌법에 구현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다듬는 것이 바로 우리나라를 잘살게 만드는 길이라는 믿음은 우리 지도자의 마음을 든든하게 할 것이다.
(지도자는 추종자들을 전제로 하므로 지도력(leadership)은 추종력(followership)과 함께 고려되어야 합니다. 이 시리즈의 마지막이 될 다음 글에선 시민들의 추종력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복거일 소설가·사회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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