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관계가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정권 출범 1주년을 맞은 26일 오전 야스쿠니(靖國) 신사를 전격 참배했다. 일본 현직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2006년 8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당시 총리 이후 7년4개월 만이다.
야스쿠니 신사는 태평양전쟁 A급 전범의 위패가 합사된 곳이다. 총리의 신사 참배는 일본 평화헌법을 정면으로 거스르겠다는 의지가 담겼다는 게 외교 전문가들의 평가다. 평화헌법은 침략 전쟁을 반성하고 전쟁을 다시 일으키지 않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전쟁 피해국인 주변국을 도외시한 안하무인(眼下無人)격 도발이라고도 한다. 가뜩이나 어려운 한·일 관계가 급속히 경직될 것은 물론 중국의 반발도 만만찮아 동북아 정세도 격랑에 휩싸일 전망이다. 정부 대변인 격인 유진룡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성명을 통해 “아베 총리의 신사 참배에 대해 정부는 개탄과 분노를 금할 수 없다”고 비난했다. 중국 외교부도 “역사 정의와 인류 양식에 공공연히 도전하는 행위로 강력한 분노를 표시한다”고 성토했다.
아베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딜레마에 빠져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한·일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지난해 이명박 전 대통령의 독도 방문으로 격화되기 시작된 양국 관계는 올 초 박근혜정부와 아베 내각의 출범을 계기로 새 국면을 맞는 듯했다. 그러나 과거사 문제를 놓고 간극을 좁히지 못했다. 박 대통령은 취임 이후 일본 지도부에 대해 “적극적인 변화와 책임 있는 행동을 해야 할 것”(3·1절 기념사), “퇴행적인 발언을 하고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과는커녕 계속 모욕하고 있다”(9월 30일 척 헤이글 미 국방장관 예방)며 비판의 날을 세워 왔다. 지난 11월 브뤼셀 순방에선 한·일 정상회담에 대해 “뭔가 전향적인 모습을 보일 때 두 정상이 만나는 것”이라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아베 총리 역시 초강경 입장을 견지해 왔다. 특히 지난 7월 참의원 선거 승리 이후 일본판 NSC(국가안전보장회의) 창설 법안과 특정비밀보호법안을 통과시키며 ‘집단적 자위권 도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사과한 고노(河野) 담화 무력화를 시도하는 등 위안부·독도 문제에서 퇴행적인 모습을 보이며 한국을 자극했다. 아베 총리는 말로는 “박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원한다”면서도 “전향적 모습을 보여 달라”는 박 대통령의 제안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난 7월 선거에서 승리한 후 한·일 정상회담을 희망한다는 메시지를 보내놓고선 다음 달 1일에 일본 정부가 주도한 독도 관련 여론조사를 발표하는 등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을 보여 왔다.
양국 지도자의 강경한 입장이 충돌하면서 양국에서 모두 “대화로 관계를 풀어야 한다”는 온건파의 입지는 위축됐다. 박 대통령의 신념이 강하다 보니 정작 물밑 대화에 나서야 할 윤병세 외교부 장관 등 한·일 외교당국 간 대화가 주춤해졌고, 대화의 문이 닫히는 상황을 초래했다. 여기에 최근 남수단 한빛부대가 실탄 1만 발을 일본 육상자위대로부터 빌린 게 발단이 돼 양국 간 감정이 격해지면서 그나마 싹트려던 대화 분위기는 물거품이 됐다.
한·일 관계 경색은 장기화할 전망이다. 권철현(전 주일대사) 세종재단 이사장은 “아베 총리가 과거 침략을 정당한 것으로 몰아가는 상황에서 냉각기가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권 이사장은 그러면서 “한·일 관계에선 미국의 역할이 중요하고, 최근에는 미국이 일본 편향 정책으로 가는 기미가 보이는 만큼 대미·대일 외교의 틀을 다시 짜야 한다” 고 덧붙였다.
신용호·정원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