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근 기자의 경제정책 막전막후
이창용 IMF 아태국장 내정자 "삼성·현대차 외의 대기업들, 부실이 상당하다"
입력 : 2013.12.24 03:58
하버드대 경제학 박사,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금융위원회 부위원장, G20 정상회의 기획단장, 아시아개발은행 수석이코노미스트….
한가지 타이틀 만으로도 남들의 부러움을 살만한 데, 이게 다 한 사람이 지나온 경력이다. 이 스펙의 주인공은 급기야 지난달말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국제통화기금(IMF)의 아시아ㆍ태평양 국장 자리를 꿰찼다. 요즘 언론의 조명을 받고 있는 이창용 IMF국장 내정자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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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창용 IMF국장 내정자
기자는 지난 11일 필리핀 마닐라에 들러 이 내정자와 ADB 임원 식당에서 오찬 겸 인터뷰를 할 기회가 있었다. 금융위 부위원장과 G20 기획단장 시절에도 간헐적으로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2년여 만에 ADB 수석 이코노미스트로 마주 앉은 그에게선 또 한차례 격을 높인 분위기가 저절로 배어나왔다. 지나가던 ADB 임원들 중에 자처해 그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는 사람이 많았고, 일 때문에 식사 중에도 잠시 대화를 나누자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평소 교류가 많지 않고서는 하기 힘든 네트워크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 우리나라에서 파견된 ADB 인사들과는 달랐다.
그와 일하는 ADB의 한 외국인 스태프는 “리(Rhee)가 와서 연구팀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과거에는 좋은게 좋은 것이라는 분위기가 많았는데 성과와 효율을 중시하는 시스템을 도입해 긴장감이 돌고 있다. 처음에는 불만을 터트리던 사람들도 연구팀 위상이 높아지자 반기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나가오 다케히코 ADB 총재는 그를 부총재단 회의에 항상 배석시키고, 경제 현안이 있을 때마다 그를 찾아 긴장감 도는 한일관계와 무관하게 신임을 주고 있다. “이 내정자가 IMF로 간다고 하자 총재가 실망하는 분위기”라는게 우리 정부 고위관계자의 귀띔이다.
한국의 위기극복과 함께한 이 내정자의 ‘글로벌 스펙’
이창용 내정자가 내정된 IMF 아ㆍ태 국장 자리는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우리나라의 구제금융과 경제개혁 조치를 관리했던 자리다. 당시 오스트리아인 휴버트 나이스 씨가 이 자리를 맡았는데, 고금리와 재정긴축을 요구하며 우리 정부를 혹독하게 몰아부쳤다. 그랬던 자리를 16년만에 우리나라 사람이 맡게 됐으니 경제부처 관료와 금융계 인사들은 물론, 당시를 기억하는 일반 국민들도 마치 자기 일처럼 좋아하고 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IMF 총재는 내정 사실을 이 내정자에게 전하면서 “후보자 3명 중에 아ㆍ태 국장 자리에 가장 적당한 경력을 갖췄더라”는 말로 그를 점찍은 이유를 밝혔다고 한다. 쉽게 말해 스펙이 마음에 들었다는 것인데, 관가에선 우리나라가 IMF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선진경제국가로 우뚝 선 과정의 궤적이 이 내정자와 고스란히 겹친다고 평가한다.
외환위기 당시 이 내정자는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였다. 그는 “국난(國難)이 닥쳤는데 아무 것도 못하는 교수라는 자리가 그렇게 무력하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이후 현실참여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이후 채권연구원 등을 만들어 구체적인 기업 구조조정 방향에 대한 제언이나, 부실채권 처리방안 등을 고민하기도 한 그는 이런 활동을 인정받아 2008년 이명박 정부 초대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다. 곽승준 전 미래기획위원장과 친구 사이인 그는 전 정부가 추진했던 산업은행 민영화와 정책금융공사 설치방안을 처음 설계하기도 했다. 이 내정자는 “산은 민영화가 결국 무산됐는데 아쉽지만 그 것도 교훈이라고 생각한다”며 “우리나라의 기업 구조조정 방식이 하루 빨리 개선돼야 하는데 안타깝다”고 말했다.
박사 학위 지도교수가 로런스 서머스 전 미 재무장관인 그는 2009년 G20 준비 기획단장을 맡아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넓힐 기회를 잡았다. 그는 “직접 수인사할 급은 아니었지만 당시 윤증현 장관 등을 수행하며 라가르드 총재(당시 프랑스 재무장관)를 자주 볼 기회를 가졌다”고 말했다. 2010년 우리나라에 개최된 G20 정상회의에서 그는 유창한 영어와 경제, 금융현안에 대한 풍부한 지식으로 전세계 인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이 경력은 그가 아시아개발은행으로 옮기는데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이번 IMF국장 내정 인사가 나기 전까지 정부 안팎에선 그가 조금만 더 ADB에 머문다면 부총재에 도전할 만하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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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10월 21일 오후 청와대에서 스트로스 칸 IMF총재(왼쪽)가 이명박 대통령을 기다리며 최중경 경제수석 및 이창용 G20 기획조정단장(오른쪽)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조선일보DB
이 내정자 “한국경제, 3가지 숙제 해결못하면 비관적”
그는 인터뷰에서 “아직도 하고 싶은 일이 많다”고 했다. 특히 IMF에서 우리나라와 아시아를 대표해 일하면서도 “한국경제가 3~4년안에 고비를 맞을 것”이라며 걱정이 많았다. 그는 우리나라 경제가 당장 해결해야 할 과제로 3가지를 꼽았다.
그가 말한 한국 경제의 첫째 숙제는 대기업 구조조정이다. 그는 “우리 경제의 성장이 대기업 주도라고 하지만 속을 뜯어보면 삼성과 현대자동차만 선전하고 있을 뿐 나머지 대기업은 부실이 상당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STX, 동양그룹 같은 사태가 반복되는 것을 막으려면 정부가 당장 별도의 모니터링 체제를 만들어 대응에 나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내정자는 청와대 경제수석실과 이미 이 문제를 깊이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회계장부만 들여다봐서는 부실이나 위험 징후를 가려내기 힘들다”며 “정부가 과거처럼 기업 경영에 간섭할 수는 없지만 바람직한 신사업 모델을 제시하고 부실한 사업에 대해서는 구조조정을 유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둘째 숙제는 교육 시스템의 정비다. 이 내정자는 특히 외국어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중·고등학교부터 영어 등 외국어 교육을 대폭 강화하고, 교육에도 다양성을 불어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내정자는 “한국에서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어로 우리나라 역사를 가르치는 외국어 학교를 못 만들 이유가 없다. 그렇게 키운 인재가 아시아권으로 진출해 새로운 일자리를 얻고, 유망한 사업 기회를 개척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걱정한 마지막 숙제는 첫째와 둘째를 아우르는 문제이다. 바로 ‘고성장 시대에 맞춰진 사회시스템의 개혁’이다. 이 내정자는 “경제가 매년 7%씩 성장하면 대기업이 매년 수천명씩 고용을 하는 것이 무리가 없고, 성과급을 주지 않는다고 불평해도 들어줄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우리경제는 이제 3~4% 성장만으로도 ‘잘했다’는 평가를 받을만한 선진국형 경제로 바뀌었고 임금과 노사관계, 사회서비스도 이런 구조에 맞게 전환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 2010년 10월 21일 오후 청와대에서 스트로스 칸 IMF총재(왼쪽)가 이명박 대통령을 기다리며 최중경 경제수석 및 이창용 G20 기획조정단장(오른쪽)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조선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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