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하나님 사랑과 겨레사랑을 평생토록 실천하려 하였던 선각자는 도산 안창호( 島山 安昌浩 ) 선생이다. 도산 선생은 신앙과 인격의 힘으로 자주독립 국가를 세우고자 하는 일에 평생을 헌신하였다. 1878년 평안남도 한 섬에서 태어난 선생은 청일전쟁이 일어났던 1894년, 16세 되던 해에 서울 새문안교회 안에 세워진 구세학당( 救世學堂, 후에 경신학교 )에 입학하면서 크리스천이 되었다. 1902년 24세에 결혼을 한 후 교육을 배워 조국을 교육으로 새롭게 하겠노라는 < 교육입국 >에의 뜻을 품고 교육선진국인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샌프란시스코 항에 내려 숙소를 정한 후 시내를 구경하던 중에 길거리에서 조선인 둘이 서로 상투를 잡고 닭싸움하듯이 싸우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서양인들이 박수를 치며 싸움구경을 즐기는 모습을 보고는 민족적 수치심을 느껴 싸움을 말리며 물었다. "동포님들 조국은 일본제국주의 침략에 흔들리고 있는 때에 멀고 먼 타향까지 와서 왜 동포들끼리 싸우고 있습니까?" 싸움의 원인을 알고 보니 인삼장수들인데 구역침입 때문에 일어난 싸움이었다. 선생은 동포들을 위하여 하여야 할 일이 동포들의 정신을 깨우치는 국민교육이 먼저임을 깨닫고, 동포들 한 가정 한 가정을 방문하며 섬기고 설득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선생은 각 가정을 돌아보며 잔디를 깎아주고 커튼을 달아주며 페인트칠을 하는 등으로 집단장을 해주며 무질서한 동포들의 생활을 고치려 힘썼다. 하루는 아편중독자들의 소굴을 방문하던 중에 한 조선인 동포가 중독되어 아편굴에서 죽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선생은 그를 업고 집으로 데려와 부부가 지극정성으로 돌봐 주면서 날마다 그를 위하여 기도 드렸다. 도산 선생 부부의 정성에 감동된 그는 마침내 아편을 끊고 건강한 인격으로 다시 태어나 평생토록 도산선생의 독립운동을 뒷바라지하는 협력자가 되었다. 러일전쟁이 일어났던 1904년, 26세 되던 해에 영어와 신학을 공부하며 한인친목회인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이 되었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지진으로 로스앤젤레스 부근인 오클랜드로 옮겨온 선생은 오렌지 농장에서 노동하고 있는 동포들의 무질서하고 무절제한 생활을 접하고는 안타까워하며, 동포노동자들 한 명 한 명에게 오렌지 하나 따는 것도 독립 운동하는 마음으로 하자고 설득하였다. 지금도 오클랜드 시 중심가에는 시 정부에서 세운 도산기념관이 세워져 있고 선생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
'Faith - Hymn'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 사랑과 겨레사랑(8)] 김진홍의 아침묵상 (0) | 2013.10.18 |
---|---|
신앙공동체는 회심의 중재자 (0) | 2013.10.17 |
기도는 잘못을 회칠하는 것이 아니다 (0) | 2013.10.16 |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날 때 (0) | 2013.10.15 |
[너는 전략으로 싸우라.(4)] 김진홍의 아침묵상 (0) | 2013.10.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