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軍事 資料 綜合

[스크랩] 6.25의 주요전투들

鶴山 徐 仁 2013. 5. 13. 00:15

6.255를 기억할 수 있는 거의 마지막 세대(전쟁 발발시 6 세)인 필자는 6.25 날자가 다가오면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괜스레 흥분되고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있지를 못하고 시내를 쏘다닌다. 그래봐야 내가 갈 데라곤 전쟁기념관 뿐이다.

해마다 전쟁기념관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숫자가 현저하게 줄어드는 것같다. 교육 목적으로 초등학교 학생인 자녀들을 데리고 오는 부모들을 제외하면 성인 방문객들은 줄어드는 편이다. 오히려 외국인들의 숫자가 눈에 띄게 늘어난 것 같다.

전쟁 기념관 측은 해마다, 6.25 기념일이 다가오면, 좀 특별난 전시를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해마다 특별전시실을 꾸며 그날을 기념하고 있다. 그러나 해마다 특별실을 꾸미니, 아무리 특별난 전시를 기획했다 해도, 별로 눈에 두드러진 것은 없고, 그것이 그것이다.

나는 6.25를 기억하는 마지막 세대로서의 의무감같은 것이 있어서 일까, 이 전쟁을 소재로 하는 장편 소설을 두 편이나 썼다. - 두 아내<상, 하>(찬섬 출판사)-, -바람의 여인(실천문학사)-이 그것이다.

<두 아내>는 전쟁의 수행 중 참전과 포로 그리고 자유방면의 역정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남과 북에 각각 하나의 아내를 둔 사내의 통한의 슬픔을 행동으로 그려본 것이고, <바람의 여인>은 만주로 독립투쟁을 위해 이주해간 집안 출신의 후예로서 북의 대남공작대원이 되어 6.25 때 남파된 한 여인의 기구한 운명을 그린 것이다.

최근에 발간된 졸작 장편소설 <설향>에서도 그것이 젊은이들의 순수 연애소설인데도, 군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나는 선천적으로 군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같다. 어떤 독자는 이 소설의 내용 중에서도 군 이야기가 가장 재미있고, 압권인 것같다는 전화를 한 적이 있다.

이들 소설들로 인해 이 전쟁에 대한 문학적 갈증이 상당히 가신 듯하지만, 나는 해마다 6.25 기념일이 오면 정신없이 전쟁기념관을 찾고 좀더 나은 6.25 소설을 쓸 수 없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올해도 나는 연 이틀이나 연달아 전쟁 기념관을 찾았다. 마침 24일이 일요일이라, 오후에 집사람과 함께 기념관을 찾았고, 25일에는 혼자서 찾아갔다. 누구인지 알 수 없는 호국영령들의 이름을 멍하니 헤아려보고, 3만 6천명이나 되는 6.25 미군 참전전사자들의 이름도 하나 하나 짚어본다.

올해는 특히, 인천상륙작전 체험실이라는 것을 만들어, 비행기와 배를 타고 인천의 적색해안으로 쳐들어가는 시물레이션 체험을 하게 해 주었다. 7분간의 짤막한 시간이었지만, 전신을 훑고 지나가는 전율같은 것을 느꼈다.몇 차례 체험해본 실제 전투체험실도 새삼스러워 다시 한 번 들어가 보았다.

 

흐려지는 기억을 붙잡아 매기 위해, 이 전쟁의 중요 전투들의 이름을 연대순으로 적어본다.

 

1)옹진지구 전투...옹진지구는 무엇보다도, 당시 38선으로 분단되어 있던 지형으로 보아, 한국정부의 땅과 전혀 연결이 되어 있지 않았다. 뱃길도 원만하지 않아 한반도와는 근 9시간이 걸려서야만 도달할 수 있었다. 이런 지역을 북은 공격 제일지점으로 삼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적 주력은 제3경비여단과 6사단 연대로 병력은 15000을 넘어서고 있었다. 사령관은 김일성의 빨치산 동료인 최현이 맡고 있었다.

한국군은 백인엽대령의 17연대가 맡고 있었는데, 3개 대대를 운영하고 있었고, 경찰 일개 대대가 같이 수비병력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병력은 도합 3000 명을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백인엽 대령은 50 km에 달하는 넓은 방어지역에도 불구하고 3개 대대를 적절히 운영하여, 적에게 심각한 타격을 가하고(적 사살 580명, 아군 전사자 장교 12명 병사 101명) 연평도를 거쳐 인천으로 무사히 철수한 작전으로 평가되고 있다. 17연대는 그후 대전으로 후퇴한 정부 수호 부대로 임무를 수행했으며, 가장 막강한 전투력을 가진 연대로 평가되어 인천상륙작전에도 참가하였다. 일개 연대 병력이지만, 전투력은 사단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위급한 전투에는 언제나 차출되는 연대이다.

 

2)개성, 문산 지구 전투...적 주력은 소장 최광이 지휘하는 1 사단과, 중공군으로 조직된 6사단이었다.  6사단은 용맹성이 소문난 방호산이 지휘하고 있었다.전선은 동측에서는 고량포에서 서측으로는 황해도 청단에 이르는 약 100킬로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이었다. 그리고 이 지역 내에는 예성강과 임진강이 흐르고 있어서, 강 북쪽에 포진하고 있던 사단본부로서는 개성과 서울을 방어하는데 암적인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다. 특히 개성은(당시로는 한국영토) 적의 영토였던 송악산으로부터 직접적으로 감제될 수 있는 지역적 특징 탓으로 심각한 위험지역으로 분류되고 있었다.

아 병력은 1사단으로 사단장은 백선엽대령이었고, 예하 11, 12, 13 삼개 연대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사단장은 시흥의 육군보병학교 고급지휘관 과정에 들어가 있었고, 사단장 대려였던 최경록 대령과 13연대장 김익렬 대령도 서울로 외출중이었다.

채병덕 참모총장의 허락을 득하여, 사단 본부를 임진강 이남으로 옮겨 포진한 탓으로 지형적인 유리를 견지하고 있던 1사단은 절대적인 병력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잘 싸웠고, 서울 수호의 마지노선인 금촌 봉일천 전선을 지켜내는데 성공하고 있었다.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고, 육균본부가 수원으로 이동한 것도 모르는 채 방어공격를 해서, 금촌 북방 1.2 킬로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전 전선에 맞추어 후퇴하기 시작했다.

 

3)의정부 지구 전투...38선 지역에서 동두천, 포천을 거쳐, 의정부를 지나, 창동과 미아리까지의 두 개의 양호한 도로는 그 사이의 평야지역을 포함하여 적 전차부대가 횡으로 전열하여 서울까지 들이닥칠 수 있는 지형적인 특징이 있다. 이 지역의 이런 전략적인 유리한 점을 간파하고 있는 적은, 적의 주력인 3사단(사단장 이영호 소장)과 4사단(사단장 이권무 소장)을 이 지역에 투입하였다. 그리고 이 두 사단의 공격을 돕게 적의 최강부대인 105전차여단을 투입하였다.

한국 측은 7사단(사단장 유재흥준장)이었는데, 통상적으로 하나의 사단이 거느리는 3개 연대도 아니고, 다만  2개 연대만을 거느리고 있었다.

병력과 장비 면에서도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적은 3사단이 12000 명, 4사단이 12000 명, 105 기갑여단 병력이 4000 명이었는데, 반해 7사단은 1연대와 9연대의 병력을 다 합쳐봐야 6000 명 정도였다. 게다가 적은 아군이 단 한대도 보유하지 못한 전차를 156대나 보유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적의 전차는 2차 대전 때 소련군이 독일 군을 깨는데 가장 수훈을 세워 그 화력과 견고성이 입증된 T-34 전차였다.

적은 피난민을 가장한 편의대를 투입하여, 아 측의 병의 배치상황을 미리 파악하였고, 후방교란에 적극적이었다. 적은 병의 무장이 약한 경찰대를 미리 부셨고, 의기에 찬 육사생도를 말살하였다. 전쟁은 의기와 용기만으로 되지 않는다.

그러나 서울을 사수하여야 한다는 참모총장의 엄명에 의해 이 지역을 담당한 아군의 적극적인 응전으로 밀리면서도 2700 여명에 달하는 적을 사살하였으며, 아측 손상도 전사 2800 여명과 실종 3000 명을 기록하고 있다. 그야말로 혈전의 연속이었다. 

 

4)서울방어 전투...북쪽에서 서울에 이르는 공격로는 통상 4개의 노선으로 말한다. 주 공격선 2개와 보조 공격선 2개가 바로 그것이다. 주공격선은 먼저 개성 문산 선이다. 다른 공격선은 동두천 포천을 거셔 의정부에 이르고 이어서 창동 미아리에 이르는 선이 그것이다.

보조공격선으로는 먼저, 김포반도를 통하여 서울의 서쪽으로의 침략을 말하고, 다른 하나는 홍천과 춘천 방향으로 침투를 말한다.

의정부가 쉽게 적의 수중으로 넘어간 지점에서 적 3사단과 4사단은 서울 함락의 공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참모총장은 2사단을 7사단에 합류하여 창동방어선을 설정하고 서울 사수의 엄명을 내렸다. 그러나 27일 오전 11시쯤에 창동방어선은 무너지고, 미아리 방어선이 그어졌다.

 

5)춘천 지구 전투...춘천지역은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중앙부분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서쪽으로 서울로 진출하고, 남쪽으로는 홍천 원주로 내리 뻗을 수 있는 교통의 요지이다. 그래서 적은 춘천을 서울 우회공격의 주요지점으로 선택하여 대량의 병력을 투입하였다.

적 2군단 예하의 2사단(사단장 이청송 소장)을 춘천, 7사단(사단장 김우 소장)을 홍천, 5사단(사단장 마상철 소장)을 동해안에 투입하고, 15사단(사단장 박상철 소장)은 군단예비로 두어 화천에 주둔하게 했다.

이와 대치했던 아군은 6사단(사단장 김종오 대령)으로, 사단 사령부를 원주에 두고 있었다. 6사단은 전방에 2개 연대를 배치하여 경기도 가평군 적목리에서 강원도 인제군 현리 동북방 10 킬로지점까지 160 KM를 담당하게 했다. 다른 1개 연대는 예비로 두어 원주에 주둔케 했다.

적 2사단은 1945년에 창설되었으며, 사단급의 공지훈련까지 받은 최정예부대였고, 7 사단은 중공출신 한인들로 구성된 막강한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특히 적은 남한 출신 게릴리부대 500명을 사전에 침투시키는 노련함을 보였다.

그러나 6사단은 사단장의 노련한 임전작전으로 사흘간이나 춘천을 지켜냈으며, 적의 서울로의 침공을 5일간이나 저지시키는 수훈을 세웠다. 그래서 7월 1일 사단의 편제를 유지한 채, 홍천, 횡성, 원주, 제천을 거쳐 충주까지 후퇴할 수 있었다.

적은 공격지체의 책임을 물어 2사단장과 7사단장을 경질했으며, 2군단장 김광협 소장을 해임하고, 김무정 중장을 임명했다.

 

6) 동해안 지구전투...남북으로 길게 달리고 있는 태백산맥의 지형적 특색으로 이 지역은 국토의 내부의 전세와는 동떨어져서 작전이 전개되는 지역적 특징이 있었다.양양, 주문진, 강릉, 삼척으로 치닫는 단일 해안 접근로 상에서, 대관령을 통하여 국토의 내부와 연결되는 강릉의 확보가 이 지역 전투의 핵심사항이다.

적은 2군단 예하의 5사단(사단장 마상철 소장)과 오진우 총좌(대령)가 지휘하는 766부대와 육전대인 549부대였다. 양양에 사령부를 둔 5사단은 원래 종공군 164 사단 출신 한국인 10000 명으로 창설된 사단으로 5년 이상의 실전 경험을 가지고 있는 최강부대의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회령에 위치한 적 제3군관학교 출신으로 짜여져 있는 766 게릴라부대와 육전대는 원래가 남한의 동해안 침공을 목적으로 하고 있어서 작전과 침투에 능숙하였다.

이에 맞서는 아군 8사단은 강릉에서 창설되었으며 사단장은 이정일대령(후에 이성가로 개명)이었으며,2개 보병연대와 18포병대대 야전공병대대를 가지고 있었다.

이성가 사단장은, 10 연대에게 38선 경비 및 오대산 일대의 공비토벌의 임무를 주었고, 삼척에 본부를 둔 21 연대에게는 광활한 산악지역의 공비토벌 및 공비의 침투로를 토벌하도록 하는 임무를 맡겼다.

적은 5사단과 766 부대 그리고 549부대를 합쳐 2 만명이 넘는 병력을 소유하고 있었으나, 아 8사단은 7천명 정도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단 주력이 38선 경계와 오대산 공비토벌, 그리고 강릉지구 공비침투로 경계로 양분되어 있던 아 8사단은, 적 주공 5사단의 강릉 침공시 하나로 뭉쳐 적의 공격을 분쇄했으며, 한 때 강릉을 아 소속으로 유지했다. 육본의 명령으로 원주로 후퇴했다.

 

7)한강교 조기 폭파...한강교 조기 폭파를 두고 말이 많으나, 군사적으로 보아, 한강교의 조기폭파는 적의 한강 도하를 6일간 지연시킨 것은 사실이다.다만 전국민에게 군을 믿고 안심하라던 이승만 대통령과 이시영 부통령 그리고 채병덕 참모총장을 통과 시킨 후에 폭파를 하여 전국민의 큰 원성을 샀다. 다리가 폭파되기 전 육본에 긴급 도착한 이응준 미아리지구 사령관과 2사단장 이형근 준장이 다리의 조기폭파를 강력 반대했으나, 당시 육본이 시흥으로 떠나고 강북의 군사적 상황조치를 전담하고 있던 김백일 대령은 그들의 분노에 질려 다리 폭파를 중지시키려 했으나 다리는 이미 폭파된 후였다.

 

8)한강선 방위 전투...6월 28일 서울이 적의 수중으로 떨어진 이후, 적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아군이 수행한 영등포-노량진 지역에서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옹진반도와 개성지구에서 아군의 상황이 불리하여 1950년 6월 25일 아 17연대가 옹진에서 철수하고, 아 1사단이 청단지역을 포기하자, 김포반도는 위기에 봉착했다. 적이 옹진반도와 개성을 점령하고 난 후, 언제든지 한강하구를 도하하여 김포반도를 점령하고 서울의 서남쪽을 공격할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수도경비사령부는 즉시 예하 병력을 김포로 급파하였다.

서울을 적에게 내어준 이후에 창설된 시흥지구 사령부는 김포지구의 방어도 통합지휘하게 되었다.

 

9)평택-충주- 울진선 지연작전...북은 서울을 점령하면 남한의 불순세력이 일제히 봉기, 호응하리라고 기대하였으나, 기대가 무산되자, 미군이 증원되기 전에 전생을 끝내겠다는 계획 아래 전선사령부를 7월 초에 설치한다. 아 측은 최소한 평택-충주-울진선까지만 적의 전진을 허용하겠다는 작전 지침을 수립한다.

 

10) 오산전투...미국이 해.공군은 물론 드디어 지상군 투입을 결정하자, 구주에 주둔하고 있던 24사단을 참전사단으로 지정했다. 먼저 24사단 21연대 제1대대를 득수임무 부대로 지정 참천케 했다. 부대장 스미스 중령은 2개 중대 406명을 이끌고 공수로 부산 수영비행장에 도착한 이들은 곧 오산 지역 죽미령에 포진했다. 적 최강 4사단과 맞부딪친 것이다. 결과적으로 미 측의 540명의 보병 중, 150명이 전사하고, 장교 5명 사병 26명이 실종되는 참패를 당하였다.

 

11) 중서부전선전투...7월 5일 국군은 제1군단(군단장 김홍일 소장)을 창설하고, 예하에 수도사단(사단장 김석원 준장)과 1사단 (사단장 백선엽 대령)을 둔다. 청주에 진입하려던 적은 제1군단의 기습 공격을 받고 순식간에 800명이 전사한다.

 

12)중동부전선 전투...음성지구 동락리-무극리전투에서 아 6사단 7연대는 적 15사단과의 전투에서 적 사살 1000명,포로 97명을 해서 개전 이후 최고의 전과를 올린다.

 

13)대전 전투...미 24사단과 적 3사단, 4사단과의 대결. 적공격 사흘만에 미 24사단은 큰 피해를 보고 패전했다.금강방어선 붕괴

 

14)화령장지구 전투...적 15사단 48연대와 아 17연대와의 대결. 아 17연대 1대대는 보은에서 함창으로 이동중 적 일개 대대가 화령장을 통과하는 것을 포착한다. 적 통신장교를 납치 정확한 정보를 수집한 아군은 적을 기습공격하여 적 사살 250명, 포로 30병의 전과를 올렸다. 아군의 화령장지구 전투은 적이 상주로 진출, 국군  제 6사단의 퇴로를 차단하려는 기도를 무산시켰다.

 

15)영동전투...미 제일 기병사단이 드디어 참전하게 되었다. 게이 소장이 이끄는 미 제일 기병사단은 요꼬하마에서 승선 7월 18일 영일만에 도착했다. 8군 사령관 워커의 첫 명령은 영동을 고수하라는 것이었다. 대전을 수중에 넣은 적 3사단은 하루를 쉰 뒤 곧 남하하여, 미 8기병연대와 접전했다.

미제8기병연대 제1대대대는 3.5 인치 로케트포로 족 T-34 전차 3대를 파괴하고 포병의 지원사격으로 적을 수차 격퇴했다. 그러나 적은 이튿날 아침, 특유의 우회전술로 미군을 포위하려 했다. 미 제1대대는 빠져나올 수 있었으나, 2대대는 포위되고 말았다.

미 제5기병연대는 구출작전에 나서서,적 2000명을 사살했다.

그러나 끈질기고 집요한 북한군의 사격으로 영동을 점령했다. 이 전투의 미 패배는 북한군의 너무나 비인간적인 전술에 의한 것이었다. 그들은 미군이 쳐놓은 지뢰지대로 한국피난민들을 몰아넣어 미군들의 사격을 불가능하게 하고나서 미군을 향해 집중사격을 가했던 것이다. 남한 피난민들을 인간방패로 삼은 것이다. 미 제일 기병 사단도 이 전투에서 916명의 인적 손실을 입었다. 우습게 보았던 북한군의 저력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16)상주전투...적 2사단과 미 25사단의 대결. 미 8군 사령관 워커는 미 25사단으로 하여금 적 2사단의 상주 침공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35연대를 문경-함창-상주를 잇는 가도에, 24연대를 보은-황간 가도에 배치하였다. 

6일간 전투가 계속되었는데, 미 27연대는 323명의 인명 손실을 입었으며, 적 2사단은 4000-5000명의 전사자를 냈다. 사단 자체가 괘멸될 지경이었고, 이 결과로 적 2사단은 낙동강 전투에 참가할 수 없었다.

 

17)영덕전투...영덕전투가 유명한 것은 남한 측으로 볼 때, 동해안 최대의 병참기지인 포항이 배후에 있기 때문이었다. 아 3사단과 적 5사단의 피말리는 대결이었다. 결과적으로 세번이나 영덕을 재탈환하는 우여곡절 끝에 결국 적은 5사단 병력이 60%로로 줄었고, 국군 3사단도 절반정도로 병력이 줄었다. 영덕은 결국 적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18)서남부전선 전투...개전 되고 약 한달이 흘렀다. 7월 23일부터 25일 사이에, 미 제일 기병사단이 영동에, 미 25사단이 상주에 포진함으로써, 영동-상주간 160 킬로의 전선이 형성되어 국군과 함께 지연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동 서측방에는 국군 7사단 잔여 병력 7000 명 정도 이외에는 거의 텅빈 상태였다.

이 지역을 석권하던 방호산의 적 6사단은 남원-광주-순천 축선으로 매일 30 킬로미터씩 전진하면서 전선을 좁혀왔다.

적 4사단은 전주에서 남진, 안의-진주를 점령하고 있었다.

낙동강 북부 전선이 아니라, 낙동강 서부 전선이 위급해진 것이다. 워커는 이 위급을 타계하기 위해, 상주-왜관 전선에 배치했던 미 25사단을 긴급 차출하여 마산으로 가게 했다. 상주로부터 마산까지 240 킬로를 36시간만에 주파하도록 했다. 든든한 마산 방어선이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미25사단이 주둔하고 있던 상주-왜관 전선 56 킬로 미터가 뻥 뚫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 전선 담당 적 15사단이 화령장전투에서 너무나 심각한 손실을 입었기 때문에 지체하고 있는 사이, 국군 1 사단이 적의 본격적인 공격 개시 전에 방어진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 

미 8군 예비로 편재되어 있던 미 25사단 27연대는, 사단 주력보다 2일 먼저인 7월 31 마산전선에 투입되어, 미 24사단 19연대 및 국군 민부대와 연합하여, 마산 서쪽 부계리와 진동리에서 적 6사단과 유명한 진동리 전투를 치뤘다. 전사에서는 이 전투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미 27연대장 마이켈리스 대령의 탁월한 지휘 덕택이라고 한다.

만약 적 6사단이 호남의 서해안 항구를 다 점령하느라 지체하지 않고 직접 마산 전선으로 들이닥쳤더라면 한국 미군 방어선은 상주 왜관 전선이 아니라, 마산 부산 전선에서 무너졌을 것이라고 한다.

 

19)다부동 전투...적의 8월 공세에서 주공부대의 목표는 대구였다. 대구는 당시 임시수도였고,부산교두보의 전략적 요충이었다. 대구가 무너지면 사실상 전쟁은 종전을 고하고 패전하게 되는 것이다.

적은 제1사단, 제13사단, 제15사단을과 그들이 자랑하는 제 105전차사단을 투입했다.

아 측은 미군사단 포함 3개 사단을 포진시켰다. 중앙에 국군 제 1사단을 왜관-낙정리간에, 우측에는 제 6사단을 낙정리- 의성 북쪽에, 그리고 촤측방에 미 제1기병사단(사단장 게이 소장)을 배치했다. 아 1사단은 9일간에 걸친 낙동강 연안지구 방어전투에서 적 6867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대구방어 전투는 구체적으로 다부동 전투로 이어졌다. 대북 북방 22킬로미터 지점의 다부동은 그 지역을 중심으로 유학산과 가산 일대의 고지를 주 방어진지로 설정 결전을 시도했다. 중앙에 박기병 대령의 12연대로 유학산 일대의 9.5 킬로를 담당케 하고, 좌측 328고지 3 킬로미터 정면에 최영희 대령의 15연대를 포진시켰으며, 우측은 김동 대령의 11연대를 북방 7.5 키로 미터를 담당하도록 했다. 

27일간 처절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드디어 적은 아군의 방어전선을 뚫을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전선을 옮기기 시작했다. 미군의 적 지역에 투하된 융단폭격도 승리의 주요 원인의 하나이다. B-29 98대가 450-900 킬로 그램 폭탄을 900 돈을 쏟아부었다.

미 8군 사령관 워커의 전략이 적중한 전투였다.워커는 미군의 월등한 제공권을 이용하여 적을 괘멸시키기 위해서는 전선을 축소하여 융단폭격의 지역적인 범위를 축소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래서 계속해서 한국군과 미군의 방위선을 낙동강 연안으로 축소시켰던 것이다.

 

20) 동해안 지구 전투...낙동강 방어선의 동쪽 즉 의성에서 영덕에 이르는 정면 80 킬로에 해당하는 동부전선은 태백산 줄기의 끝부분으로 험준한 산악이 남북으로 달리고 있기 때문에 방어에는 불리한 지역이었다. 이 지역에서 남북으로 통하는 가도는 동해안 도로와 안동-의성-영천으로 뚫린 도로 뿐이었다. 그래서 이 지역을 담당하고 있던 국군 1군단은 이 두 도로만 장악하고 있으면 적의 남하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국군 일군단(군단장 김백일 소장) 예하 제8사단(사단장 이성가 대령), 수도사단(사단장 백인엽대령)이  의성과 영덕을 방어하고, 제3사단(사단장 김석원준장)은 영덕을 장악하고 있었다.

적 2군단은 8사단으로 하여금 의성을, 5사단으로 하여금 영덕을 공격케 하고 있었다. 12사단을 별도로 태백산으로 진출시켜 일거에 포항을 장악할 전략을 짜고 있었다.

그리고 막강한 기동력을 갖춘 766 유격대를 울진에서 분리시켜 안강의 교량과 청도터널을 파괴시켰다. 

 

21)영덕지구 전투...8월 5일, 적은 공격을 퍼부어 영덕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요충지인 오십천 남안 환산지구를 공격했다. 아 3사단 22연대가 적의 공격을 받아 혼란상태에 빠졌고, 얼떨결에 강구하 다리를 폭파하고 말았다. 이 때 오십천 대안에 아 보병 350 명이 진을 치고 있었는데, 다리의 폭파로 말미암아 보급이 끊어졌다. 병사들은 강으로 뛰어들어 헤엄쳐 내려오려 했으나 적의 집중사격을 받아 많은 병사들이 전사했다. 그래서 어이없이 영덕은 적의 수중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적 5 사단의 영덕 함락은 곧바로 포항과 영일비행장에의 위협으로 나타났다. 국군 일군단은 즉시 25연대를 인근 비학산지역으로 급파했으나, 적 5사단 주력에게 괘멸되고 말았다. 8월 9일 밤에는 적의 일부가 영일 북쪽 경비병이 없는 지역에 출현하여 영일 비행장을 위협했다.

영일비행장은 한국에서 유일한 공군기지로 F-51 전폭기 2 개 편대가 작전에 임하고 있었다. 영일 비행장이 적에게 유린되면 절대적인 제공권을 잃게 되어 아 병사들의 작전에 크나큰 차질을 빚을 가능성이 있었다.

미 5공군은 비행장의 중장비 철수를 명령했다.

담당 3사단은 괘멸의 직전까지 갔으나, 김석원 사단장이 부임해 옴으로써 활기를 되찾고 전투욕을 회복했다.

육본은 포항지구전투사령부를 긴급 설치하고 병력을 증강했으며, 미군은 브래들리 특수임무부대를 투입하여 위기를 모면했다.

그러나 위기가 가시지않자 워커는 역전의 국군 17연대를 이 지역에 파견하여 전세를 뒤집게 했다. 마침 부산항에 도착한 미군 73 전차대대의 신형 M-26 퍼싱전차의 화력 지원을 받아 아슬아슬한 위기를 넘기고 영일비행장을 지키는데 성공했다. 

 

22)포항지구 전투... 어느 전투나 다 그야말로 혈전이지만 포항지구 전투도 예외가 아니다.특히 이 지역 전투에서는 71명의 학도호국단 병사들이 전원 전사하는 기록을 남기고 있어서 세인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포항지구 전투는 적 12사단과 아 3사단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였다.

적 12 사단은 ‘안동사단’이라는 별칭을 하사받은 바와 같이, 안동 함락을 주도한 사단이다. 그러나 안동 함락과정에서 아 8사단의 집중사격을 받아 많은 전사자를 내어 사단 공격력이 많이 위축되어 있었다.

그래서 적 12 사단은, 아군의 집결력이 떨어지는 산악지대를 주로 야간에 진주하여 포항함락의 공격을 늦추지 않았다. 적 2군단은 원래 적 8사단으로 하여금 포항공격의 선봉을 맡길 작정이었으나, 적 8사단은 의성 부근에서 아 8사단 21연대의 기습 공격을 받아, 1개 대대가 전멸되는 손상을 받아 12사단으로 교체되었던 것이다. 적 8사단은 포항공격을 의흥, 신녕 공격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당시 포항에는 아 3사단 후방지휘소가 포항여자중학교에 진을 치고 지원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단 후방지휘소에는 수도사단에 종군한 바 있는 학도병71명의 비무장병력이 의성으로부터 8월 9일 남하하여 대기하고 있었다.

이 학도병들은 원래 안강전투 당시, 수도사단장 김석원 준장의 명장으로서의 명성에 존경심을 가지고 참전한 어린 학생들이었다. 그러나 김석원 사단장이 3사단 장으로 전임되자 수도사단에서 3사단으로 옮겨온 학도병들이었다. 수도사단에서는 그들의 원을 들어 주었다.

학도병들은 김용섭 중대장의 지휘 하에 포항으로 김석원 사단장을 찾아온 것이다.

제1소대장에는 유명옥(서울배재중학교), 제2소대장에는 김일호(중앙대)가 맡고 있었다. 3사단 후방지휘소에서는 이들을 받아들이고, 영일비행장에 있는 미해병대에서 M1 소총을 수령하여 이들에게 지급하였다.

8월 11일 자정에 사단 후방지휘소 뒷산에서 6발의 예광탄이 터지면서 적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학도병 2개 소대는 지휘소 외각에 포진하고 있었는데, 밤새 적과 교전하였다. 새벽이 오고 어둠이 물러가자 시야가 트였다. 학교 정문 쪽으로 적의 일부 병력이 다가오는 것이 시야에 잡혔다. 밤새 교전으로 아 측의 괘멸을 짐작한 것이다. 숨죽이고 있던 학도병력은 적의 50M 전까지의 접근을 허용했다가, 일제히 사격하여 적 200 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적은 잠시 후, 장갑차 5대를 앞세우고 재침범했다. 학도병들은 실탄이 떨어져 더 대적하지 못하고 적이 던지는 방망이수류탄을 다시 집어 던지는 혈전을 전개한 끝에 47명이 전사하였다.

전투는 정오까지 계속되었고, 포항은 적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포항의 중요성을 감안한 미8군의 강력한 폭격과 미해군 함대의 함포사격으로 적은 주력은 포항을 철수하고, 정찰대만 남겨두고 있었다.

그러나 적은 8월 13일 포항에 재진입하였고 경주 침공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전에 아 3사단의 완전 괘멸을 위해 포위망을 압축하고 있었다. 워커는 아 수도사단을 의성으로부터 빼내 포항전선에 투입하고, 역시 아 17연대를 투입했다.

8월 15일, 수도사단 포항지구사령부 민 부대 그리고 17연대의 집중 사격으로 적을 포항에서 격퇴할 수 있었다. 고군분투하던 아 3사단 병력 9000명은 8월 16일 밤부터 사지에서 벗어나, 구룡포로 해상 후퇴를 할 수 있었다. 부대를 재정비한 다음 18일 다시 포항전투에 재투입되었다.

포항재진입 성공 이후, 민부대는 북으로 진출하고, 해군 포항경비부 육전대는 감포로 귀대하고, 수도사단과 포항지구전투사령부는 기계 안강 전투에 재투입되었다. 패전을 거듭한 적 12사단의 잔졸들은 인근 비학산으로 은거하였다. 이로서 포항전선이 안정을 찾았다.

 

23)창녕, 영산 전투...적 6사단, 7사단, 9사단, 10사단과 미 24사단, 미 25사단, 미 2사단이 맞붙은 경남 중서부 전선의 전투이다.

8월 31일, 적 6사단의 공격이 치열하여 미 25사단은 종심 4 킬로가 돌파당하는 수모를 겪고 있었다. 미 2사단도 적 7사단(사단장 이익성 소장)의해 정면 10킬로, 종심 13킬로를 돌파당하고 있었다. 적 7사단은 남지교-마산 선을 장악하고, 불가능해보이던 도하를 4개소에서 감행하여 성공시킴으로써 이 지역을 수중에 넣었다.

그러나 현풍에 주둔하던 적 10 사단이 움직이지 않아 전면적인 점령은 면하고 있었다.

미 2사단은 두 개의 특수부대를 긴급 편성하여 적의 돌파를 막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미 25 사단지역에서는 적 7사단이 창원까지 진출하여 부산 함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전연패를 계속하던 미 사단들이었으나, 오직 마이켈리스 연대장 지휘의 미 27연대만이 승리를 계속하여 적의 전진 속도를 줄이고 있었다.

9월 2일, 창녕 영산 지구는 위기감이 최고조에 달했다. 무엇보다도 피난민들을 위장한 적의 위장 침입은, 사복한 남한군과 북한군이 같은 한국어를 사용함으로써 이들을 구별하지 못하는 미군은 작전과 전투에 큰 차질을 빚었다. 적들은 최후의 승리를 장담하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죽자 살자 식으로 덤볐다.

위기감을 실감한 미8군 사령관 워커는 미제1해병여단과 미제5해병여단을 긴급 투입하여, 적의 전진을 막고 군단 예비인 24사단을 밀양 서남 12킬로 지점에 전진 배치시켰다. 미 두 개 해병여단은 보병, 전차, 공군 공격을 합동으로 실시하여 적의 전진을 분쇄하고, 영산 서편 전선을 회복하였다. 9월 4일에는 적 9사단의 지휘소를 붕괴시켰다.

기진맥진해진 적은 주춤했다. 그 틈을 이용해 미해병 여단은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전선을 미 24사단에게 넘기고 경남 서부전선을 떠났다. 미 8군의 일대 반격작전이 시작될 때까지 전선은 잠시의 소강상태를 빚고 있었다. 적도 기진하여 더 이상의 전진을 위한 공격을 할 여력이 없었다.

 

24) 영천전투...하나의 국가가 다른 국가와 전쟁을 할 때, 전투 하나 하나는 곧바로 나라의 흥망과 직결된다. 그러나 전투 하나 하나에는 경중이 있어서 그것의 패전이 국가의 흥망에 직결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큰 전투는 그야말로 국가의 흥망 그 자체이다. 그 전투에 지면 나라는 곧바로 망하는 것이다. 한국전쟁 중에서도 다부동 전투나, 영천 전투는 곧바로 한국정부의 존재 자체를 가늠하는 대회전이었다.

적 제2군단 예하 8사단 15사단과, 한국군 2군단 예하 국군 8사단 6사단과 영천 점령을 두고 싸운 전쟁이다. 적들은 영천을 점령한 후 한국의 임시정부가 있는 대구를 칠 작정이었다.

영천은 양군에게 있어서 전략적 요충이었다. 적은 영천을 점령한 후, 대구와 경주 포항을 갈라놓음으로 해서 한국군의 제1군단과 제2군단의 연결점을 끊어 놓을 수 있으며, 포항을 통해 들어오던 미군 보급물자를 차단하고 아의 전력을 절반으로 갈라놓을 작전이었다. 영천은 대구, 경주, 포항, 안동, 청송에 이르는 교통의 중심지였고, 한국군의 전력이 대구와 경주 포항을 연결해주는 연결지점이었다.

영천만 점령하면, 대구를 설령 함락시키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쉽게 경주 포항을 함락시킬 수 있으며 그 공격력의 확산으로 아의 큰 방어력이 배치되어 있지 않는 남측 방향으로 부산을 직공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적 8사단이 영천 전투에서 승리하면, 경주로 진출 적 12사단 15사단과 합세하여 부산 공격에 나설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국군 1군단 예하 8사단은 9월 4일 18킬로미터의 방어정면에 예하 2개 연대를 비치함으로써 적 15사단과 대치하고 있었다. 사단 좌측에는 6사단, 우측에는 수도사단이 진을 치고 있었다. 당시 1군단 사령부는 경주에, 2군단 사령부는 하양에 설치되어 있었다. 육본은 7사단 8연대를 영천으로 이동시켜 아 8사단 예비부대로 있게 했다.

적 15사단은 9월 밤 1시에, 억수처럼 쏟아지는 칠흑의 밤에 기습 공격을 감행해, 아 8사단을 구축하고 영천을 점령했다.

낙동강전선은 공방전이 개시된 이후 최고의 위기감이 고조했다. 아 8사단은 직할부대를 영천 서쪽 금호강변에 배치하고, 적이 하양 대구로 진격할 것에 대비했다.

적은, 대구로의 침공로에 저항선이 강화되자 대구침공을 잠시 뒤로 미루고 우선에 경주침공에 나섰다.

2군단은 함락된 영천 주변에, 국군 7사단과 제1사단 11연대, 6사단 19연대를 증원하고, 포항전선에 투입된 8사단 10연대를 원대복귀시켰다. 8사단 21연대는 특수임무를 띠고 적 후방을 차단하여 적의 보급로를 끊었다.

6일 아침 이들 부대들의 일제 사격으로 영천을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9월 12일에는 영천 함락 전의 방어선을 회복했다.

9월 5일부터 13일까지 계속된 영천전투는 한국전쟁의 전환점을 이룬 큰 전투로서 적과 아측 모두 인근 2 개 사단을 증강하여 전투에 임한 일대 대회전이었다.

만일 적 15사단이 대구함락보다 수월하리라 믿고 경주 포항 선으로 주공격선을 잡아 성공했다면 당시 이 지역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던 적 12사단과 통합하여 당시 고전하고 있던 이 지역 아 1군단을 유린하고 대구 경산 방면으로 진로를 틀어 부산 공략에 나섰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게 되면, 대구 북방의 1사단과 6사단도 흔들렸을 것이고, 서부전선의 미국 전선도 안정을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밀양을 중심으로 그어졌던 데이비드 선으로의 후퇴가 실현되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이상으로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기 전의 전쟁상황을 개괄할 수 있는 전투를 일별해 보았다. 인천 상륙작전에 성공하고 난 후의 파죽지세로 북으로 밀고 올라가던 전투 현황이나, 중공군 개입 이후의 전투 상황은 뒤로 미룰 수밖에 없다.



 

출처 : 경대사대 부중고1215회 동기회
글쓴이 : 정소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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