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제18대 대통령 당선인]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 기자회견 全文
“튼튼한 安保와 신뢰외교를 통해 새로운 한반도 시대를 열겠다는 국민 여러분과의 약속, 꼭
지키겠습니다”
朴槿惠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국민
여러분의 성원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가 오늘 제18대 대통령 당선자로 이 영광스런 자리에 서게 된 것은 오로지 국민 여러분의 성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저는 우리 대한민국의 위대한 국민들이 자랑스럽습니다.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고자 하는 국민 여러분의 마음과 힘, 그 애국의
정신이 우리 국민과 후손들 마음에 깊이 새겨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한 비전을 가지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신 문재인 후보님과 지지자 여러분께도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나 문재인 후보님 모두 우리 대한민국을 위하고, 대한민국의 주인이신
국민 여러분을 위한 마음만은 같았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의 國政(국정)운영에서 국민을 위한 이 마음을 늘 되새기겠습니다.
저에 대한 贊反(찬반)을 떠나 국민여러분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나가겠습니다. 과거 반세기동안 극한 분열과 갈등을 빚어
왔던 역사의 고리를 화해와 대탕평책으로 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모든 지역과 성별과 세대의 사람들을 골고루 등용하여 대한민국의 숨은 능력을 최대한
올려서 국민 한 분 한 분의 행복과 100퍼센트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이 저의 꿈이자 소망입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우리
대한민국은 아직 어렵습니다. 1960년대 초 1인당 국민소득이 100불에도 미치지 못한 나라에서, 2012년 지금은 그 200배가 넘는 2만
불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부님들의 장바구니 물가와 젊은이들의 일자리에 대한 고민과 고통은 여전히 큽니다. 저는 다시 한 번 ‘잘
살아보세’의 신화를 만들어 국민 모두가 먹고사는 것 걱정하지 않고, 청년들이 즐겁게 출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이 추운
겨울에 따뜻하고 편안한 잠자리에 드실 수 있도록 국민 한 분 한 분의 생활을 챙기겠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소외되는 분 없이 경제성장의
果實(과실)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국민대통합이고, 경제민주화이고, 국민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국민 여러분, 저에게 힘이 되어 주십시오. 한마음이 되어주십시오. 5000년 역사의 우리 대한민국은 선조로부터 강인한
정신을 물려받은 찬란한 전통을 자랑하는 문명국가입니다. 우리는 예부터 평화를 사랑하고 전쟁을 싫어하였으며, 화합을 좋아하고 갈등을 싫어하는
국민이었습니다. 우리 국민은 예로부터 두레와 같은 상부상조의 미덕을 가지고 나라를 지켜왔습니다,
혼자만 잘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잘 사는 相生(상생)과 共生(공생)의 정신이 선조가 우리에게 물려준 훌륭한 자산입니다. 이제 상생과 공생의 정신이 정치, 경제,
사회 곳곳에 스며들도록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여러분께서 이러한 마음을 함께 나누어 주시고 훈훈하고 따뜻한 나라가 될 수 있도록 함께 하여주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현재 우리가 직면한 어려움을 이겨내고 새로운 미래의 문을 여는 열쇠라고 확신합니다. 5000년 역사의 유산을 이어가고,
5000만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새로운 미래를 펼쳐나가겠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이번 선거는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가 급변하는 가운데 치러졌습니다.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는 우리가 처한 안보현실이 얼마나 엄중한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동북아
역내 갈등과 세계 경제위기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께서 제게 주신 소명은 바로 이런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 나가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튼튼한 安保(안보)와 신뢰외교를 통해 새로운 한반도 시대를 열겠다는 국민 여러분과의 약속, 꼭 지키겠습니다. 올바른 역사인식을
토대로 동북아의 화해·협력과 평화가 확대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희망을 잃지 말고 일어서 주십시오!
국민 한 분 한 분이 새로운 꿈을 그리고,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나라, 국민과 함께 국민 행복 시대를 열어 나가겠습니다.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서 새로운 변화와 개혁을 국민 여러분과 함께 반드시 이뤄내겠습니다. 그 길에 국민 여러분들이 늘 함께 해 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 번
국민 여러분의 성원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2012-12-20, 11:54 ]
[박근혜 대통령 당선] 청와대서 부모 모두 총탄에 잃고… 33년전 동생 둘 데리고 떠나 고독의 세월 18년 끝에
정치 결심… 대통령 돼 청와대로 귀환
김봉기 기자입력 : 2012.12.20 03:02 | 수정 : 2012.12.20 18:15 [박근혜가 걸어온 길] 中2때 청와대 들어가 전차통학, 어머니 저격당해 숨진 뒤 22세부터 퍼스트레이디 역할 10·26 뒤
신당동 집에 돌아와 아버지 10주기 맞춰 기념사업 2년 3개월간 당대표 지내며 사실상 모든 선거 승리 이끌어, 유세 중 면도칼 테러
당하기도 올해 박前대통령 추모 행사서 "이제 아버지 놓아드렸으면…"
박근혜 18대 대통령 당선인은 내년 2월 청와대에 돌아간다. 33년 3개월 만이다. 신분은 대통령의 딸에서
대통령으로 바뀌게 된다.
◇학창 시절
그는 1952년 2월 2일 대구시 삼덕동 셋집에서 대령 박정희와 육영수의 첫딸로 태어났다. 1961년 5·16 때 서울 장충초등학교 4학년생이었던 그는 다음 해 아버지가
제5대 대통령에 선출됐지만 서울 신당동 외할머니 집에서 학교를 다녔다. 자식들이 특권 의식을 갖게 될 것을 염려한 어머니의
결정이었다.
성심여중 2학년 때 학교 기숙사가 폐쇄되면서 청와대로 들어가 전차로 통학했다. 생활기록부를 보면 성심여중과 성심여고
재학 시절 6년 내내 반에서 1등을 했다. 중학교 1학년 2학기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반장을 맡았다.
- 1960년대 중반
청와대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가족이 둘러앉아 놀이를 하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을 기준으로 시계 방향으로 박 당선인, 동생 근령·지만씨, 육영수
여사. /박근혜 당선인 측 제공
1970년 "산업 역군이 돼 나라에 기여하고 싶다"며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진학했다. 대학 3학년 때 박 전 대통령이 '10월
유신(維新)'을 추진하면서 대학가에 반(反)정부 분위기가 고조됐다. 박 당선인은 "점점 학과 공부에 매달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고
했다. 졸업 때 이공계 수석이었다.
◇퍼스트레이디 시절
1974년 8·15 경축 행사에서 어머니가
문세광에게 저격당해 숨지자 그는 프랑스 유학 생활을 접고 귀국했다. 22세 때부터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맡았다. 당시 심정을 "소탈한 생활, 한
인간으로서의 나의 꿈, 이 모든 것을 집어던지기로 했다"(1974. 11.10. 일기)고 적었다. 아버지가 기업체를 방문하거나 국토 시찰에 나설
때 수행했다. 거의 매일 아버지와 둘이 아침식사를 했다. 그때 아버지와 국정 전반에 관해 나눈 대화를 "누에고치에서 깨어나 나비가 되는
일"이라고 했다.
그는 1970년대 말 구국봉사단을 운영했던 고(故) 최태민 목사(1912 ~1994)를 만났다. 검증 때마다 최
목사 얘기가 빠지지 않았으나 그는 "내가 어려운 시절에 도운 분"이라고 했다.
- (사진 왼쪽)중학교
2학년 때 산정호수로 소풍 갔을 때 반 친구들과 촬영한 단체 사진. 하얀 점선으로 표시된 여학생이 박 당선인. (사진 오른쪽)고교 시절인
1960년대 말 야외에서 기타를 치고 있는 박 당선인.“노래 부르는 것보다는 기타 치는 게 더 좋았다”고 했다. /박근혜 당선인 측 제공
1979년 10월 27일 새벽 1시 30분쯤 그는 아버지가 저격당해 사망했다는 보고를 받고 "전방에는 이상이 없습니까"라고 물었다.
장례식을 치른 뒤 아버지의 피 묻은 넥타이와 와이셔츠를 빨면서 오열했다. "5년 전 어머니의 피 묻은 한복을 빨던 기억이 겹쳤다"고
했다.
◇인고의 18년
그는 1979년 11월 21일 두 동생 근령·지만을 데리고 청와대에서 서울 신당동
사저로 돌아왔다. 1982년 8월 경남기업 신기수 회장이 마련해준 서울 성북동 주택으로 이사했다. 신당동 집이 부모님의 유품을 보관하기엔
비좁았는데, 마침 박 전 대통령과 인연이 있었던 신 회장이 집을 지어줬다는 것이다. 한때 신 회장과 약혼설이 나돌기도 했으나, 박 당선인은
"전혀 그런 사실이 없다"고 했다. 1980년 4월 영남대 이사장으로 취임했지만, 재학생들의 반발 등으로 7개월 만에 물러난 뒤 이사직을
유지하다 1988년 11월 이사직에서도 사퇴했다.
제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박 전 대통령 격하(格下) 운동이 벌어졌다. 지인들은
"차라리 외국에 가서 사는 게 어떠냐"고 권유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 1981년 한 학기 동안 예장신학대학원을 다녔고
법구경·금강경 등 불교 경전을 읽었다. 일기도 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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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1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례 절차를 모두 마친 박 당선인이 그동안 살던 청와대를 떠나기 위해 승용차를 타고 있다.
박 당선인은
아버지 10주기인 1989년을 1년 앞둔 1988년부터 아버지의 공을 기리는 내용의 본격적인 언론 인터뷰를 했고,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사업회도
발족했다. 박 당선인은 "1989년은 수년간 맺혔던 한을 풀었다고 해도 좋을 한 해"(1989.12. 30. 일기)라고
적었다. 1990년 동생 근령을 지지하는 '숭모회'가 육영재단 이사장인 자신의 퇴진 운동을 벌이자 1992년 자리를 물려주었다.
이후 청바지 차림으로 산과 문화 유적지를 찾아 다녔다. 그는 자서전에서 "퍼스트레이디로 있을 땐 결코 누려보지 못한 평화로움이었다"고 했다.
40대가 되면서 여러 차례 '정치권의 러브콜'을 받았지만 사양했다.
◇정치 입문
그는 1997년 대선 직전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가 지원을 요청하자 아버지의 고향인
경북 구미 지구당에 입당 원서를 제출했다. "IMF 위기를 맞아 지난 세대가 이뤄놓은 많은 것이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아찔함 때문에 정치인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 (사진 왼쪽)박
당선인의 20대(代) 모습. 지금처럼 올림머리 스타일이 아니라 머리를 내린 채 머리띠를 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박 당선인이 한나라당 대표였던
2004년 3월 당 현판을 떼어낸 뒤 천막 당사로 옮기는 모습. /박근혜 당선인 측 제공
이듬해 4월 재·보선에서 대구 달성에 출마해 당선됐다. 한나라당 부총재가 된 그는 2002년 2월 이회창 총재의 1인 체제를 비판하며
당권·대권 분리와 국민참여경선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탈당했다.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해 사실상 대선 준비를 했으나 여의치 않자 대선을 한
달 앞두고 복당했다. 이회창 후보가 또 패배하자, 2004년 총선을 앞두고 당대표로 선출됐다. 한나라당의 '차떼기(정치자금 수수) 파문'과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전망이 어둡던 총선에서 '천막 당사'를 발판으로 121석을 얻었다. 그 뒤 2006년 6월 대표를 물러날 때까지
2년 3개월 동안 사실상 모든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다. 2006년 5·31 지방선거 유세 도중 면도칼 테러를 당했다. 의사는 "1㎝만 깊었어도
목숨이 위험했다"고 했다. 병상에서 선거 상황을 보고받자 그는 "대전은요?" 하고 말했다.
◇2007년 실패 후
재도전
그는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 출마했지만 이명박 전 서울시장에게 패했다. "저 박근혜, 경선 결과에 깨끗하게 승복합니다"고 했다. 이명박 후보는 그를
'국정의 동반자'라고 했으나,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부터 두 사람의 갈등은 고조됐다. '박근혜 총리 카드'를 둘러싸고 혼선을 빚더니, 2008년
4월 총선 때 김무성 의원 등 친박(親朴)계 인사가 대거 공천 탈락하자 그는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고 했다. 공천에서 탈락한 친박은 무소속
또는 '친박연대'로 출마해 상당수 국회로 재입성했다. 이 대통령과 박 당선인의 갈등은 2009 ~2010년 세종시 수정안 논란에서 폭발했다.
그는 정치 시작 후 처음으로 국회에서 반대 연설까지 하며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을 부결시켰다. 하지만 두 사람은 2010년 8월 만나 정권
재창출을 위한 공동 노력에 합의했다.
그는 2011년 가을 한나라당이 서울시장 보궐선거 패배 후 흔들리자 2011년 12월 비상대책위원장에 취임,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바꾸면서
당 개혁을 주도했다. 4·11 총선에서 국회 과반 의석을 확보했고, 8월 20일 전당대회에서 득표율 84%로 당 대선 후보로
선출됐다.
그는 이어 과거사 문제로 야권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9월 24일 기자회견에서 "5·16과 유신, 인혁당 사건 등은 헌법
가치가 훼손되고 정치 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했다. 10월 22일에는 정수장학회의 명칭 변경과 이사진 사퇴를 우회적으로 촉구했다.
10월 26일 박 전 대통령의 33주기 추모 행사에선 "그 시대의 아픔과 상처는 제가 안고 가겠다. 이제 (사람들이) 아버지를 놓아 드렸으면
한다"고 했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가 중도 사퇴한 안철수 전 서울대 교수, 심상정 진보정의당 의원의 지원과 이정희 통합진보당 후보의 사퇴를 발판으로 막판까지 추격했지만, 박 당선인은 국민 대통합과 '준비된 여성
대통령'을 내세우며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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