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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은 부어지는 사랑입니다. 부어진다고 하는 것은 흐르는 것과는 다릅니다. 이것이 얼마나 은혜가 되는지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흔히 하듯이 한두 방울 흘리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만두는 것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원치 않는 곳에 흘리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곳에 계속적으로 부어지는 것입니다. -장경철의 [축복을 유통하는 삶] 중에서-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아무 것도 아니라고 여길 그때, 주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부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 사랑으로 다시 살 소망을 얻기까지 부어주셨습니다. 그 사랑이 내 삶 속에 와 닿으면, 우리 안에 고인 사랑이 세상 가운데로 흘러갑니다. 주님으로부터 먼저 충분한 사랑을 받고, 그 사랑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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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이재학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 웨스터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선교학)박사학위(Ph.D) 수료 하늘땅교회 담임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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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고의 노래 |
나는 한때 잘나가던 착고입니다. 대제국이 나라들을 점령할 때, 악독한 권력자가 사람들을 억압할 때, 나는 번뜩이며 겁에질린 사람들을 위협했습니다. 나의 이 무시무시한 자태에 사람들은 겁먹었고, 내가 붙잡은 그 사람들은 피흘리며 꼼짝도 할 수 없었죠. 도망같은 건 생각도 할 수 없었답니다. 하지만, 그 옛날 바울과 실라라는 이들은 내가 위협해도 내가 짓눌러도 노래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했습니다. 사람들을 떨게 하던 나는 두려움에 떨며 바울과 실라를 풀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지금은 이렇게 녹슬었지만, 사람들은 나를 보며 바울과 실라를 생각하네요.두려움을 이기게 하시고 영광중에 일하셨던 하나님을 생각하네요. 빛나는 나일 때보다 낡아버린 지금, 더 행복한 나는 착고입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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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상동 우물네트워크 대표 기독이미지사이트 피콕 picok.co.kr 운영 기독묵상사이트 씨노트 cnote.kr 운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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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워야단의 두려움 - 욥 41:8-11 |
8 네 손을 그것에게 얹어 보라 다시는 싸울 생각을 못하리라 9 참으로 잡으려는 그의 희망은 헛된 것이니라 그것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그는 기가 꺾이리라 10 아무도 그것을 격동시킬 만큼 담대하지 못하거든 누가 내게 감히 대항할 수 있겠느냐 11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하여금 갚게 하겠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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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는 살지 않지만 성경에는 가끔 등장하는 전설의 동물들이 있습니다. 가장 여러 번 언급되는 동물은 <탄닌>인데 총 8번 나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말 성경에 <큰 바다 짐승>(창 1:21), <악어>(겔 39:3), <용>(사 27:1), <승냥이>(시 44:19)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었습니다. <리워야단>도 마찬가집니다. 무시무시한 동물로 묘사되고 있으며 과거에는 주로 악어로 번역했지만 최근에는 원어의 표음을 그대로 사용하는 추세입니다. 이 욥기 41장은 그 리워야단을 가장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어서 읽는 이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합니다.
싸울 생각을 못하리라 <네 손을 그것에게 얹어 보라 다시는 싸울 생각을 못하리라>(8절). 누구나 그 짐승에 손을 대 본다면 결코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라는 겁니다. 노끈으로 맬 수도 없고, 밧줄로 코를 꿸 수도 없고 갈고리로 그 아가미를 꿸 수도 없는 짐승, <입에서는 횃불이 나오고 콧구멍에서는 연기가 나오고 입김은 숯불을 지필 듯한> 기세의 괴물, 누가 감히 그 짐승과 맞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리워야단 보다 천 배 만 배 더 두려우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와 심판은 리워야단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무섭습니다. 하나님의 정죄와 불의한 자들이 당할 저주는 누구도 감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공포스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욥에게 리워야단의 두려움을 통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에게 내려질 무시무시한 심판과 징계의 두려움을 느끼게 하고 계십니다.
기가 꺾이리라 <참으로 잡으려는 그의 희망은 헛된 것이니라 그것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그는 기가 꺾이리라>(9절). 사람이 하나님과 겨루겠다고 벼르거나 팔 걷고 나서는 일은 큰 불경일 뿐 아니라 뻔뻔스러움의 극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리워야단을 잡으려는 사람들의 희망이 무모하고 헛되듯 하나님과 접전하여 이기고자 하는 사람들이야 말로 어리석음의 극치입니다. 그럼에도 갈수록 안티 세력들이 늘고 있습니다. 더욱 조직화되고 나름대로 치밀한 이론으로 무장하여 점점 그 세를 불리고 있습니다. 인터넷의 보급으로 이제는 국제적인 연대를 통해 기독교를 음해하고 있으며 최근 한국 교회가 처한 슬럼프 국면을 이용하여 더욱 기승을 부리며 공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바다 괴물 리워야단에 맞서려는 인간들의 허세나 만용과도 같은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인간들의 그런 하나님 대적은 한 번도 성공한 예가 없으며 모두가 제 바람에 기가 꺾여 지리멸렬하고 말았습니다.
대항하지 못하리라 <아무도 그것을 격동시킬 만큼 담대하지 못하거든 누가 내게 감히 대항할 수 있겠느냐>(10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창조하셔서 사람의 발 아래 두시고 정복하고 다스리라 명하신 열등한 피조물들이 사람을 이렇게까지 두렵게 하고 기가 꺾이게 한다면 우리 인생들에 대한 주권과 통치권을 가지신 하나님의 위엄이야말로 얼마나 크고 또 무섭겠습니까? 누가 감히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을 비난하고 공격하겠으며 그의 진노의 칼날에 맞설 수 있겠습니까? <주께서 한 번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시 76:7). 아무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능히 나를 당할 자가 누구냐?>고 묻고 계십니다. 바울은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느니라>(고후 3:5)고 했습니다. 이렇듯 인생을 사는 바른 비결은 우리의 연약함과 무력함을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위대하심과 능력은 오히려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진다>(고후 12:9)는 진리를 온 몸으로 체득하는 것입니다. 부디 본성적으로 교만하여 하나님을 반역하는 못된 자아를 누르시고 하나님 앞에서 더욱 겸허한 모습으로 사십시오.그게 가장 복되고 아름답고 건강한 삶임을 다시한번 진심으로 시인하며 고백하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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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조성노 독일 본(Bonn) 대학교 신학부 졸업 뮌헨(Muenchen) 대학교 신학부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역임 푸른교회(분당 소재) 담임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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