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2.09.24 09:42
주인 잃은 집들은 서럽다. 당대 최고 상류층의 위세를 떨치며 문턱깨나 닳았을 조선시대 말의 한옥들이 임자를 잃은 채 피난살이 하듯 남산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을 보면 애처로운 마음마저 든다. 한적한 어느 지방 마을에 위치했더라면 누구 고택입네 하고 처마를 번쩍추켜올린 채 그곳의 명소가 되어 있었을지 모를 이 번듯한 가옥들이 이곳에 와서 난옥촌(?)을 형성한 것은 드높은 빌딩들이 들어서야 했을 한양 한복판에 자리했었기 때문이리라. 외국의 오래된 도시 한복판에는 지금도‘음악가 누가 태어난 집’또는‘미술가 누가 살았던 집’이라며 민간주택이 보존되어 있다는데, 경제발전과 개발추세에 부응하여 부동산으로서 토지의 가치를 드높였던 서울의 고택들은 이곳으로 밀려나 그나마 형태라도 갖추고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것일까. 이곳 남산골에 있는 한옥들의 원위치를 살펴보면 종로구 삼청동,관훈동, 옥인동 등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서울 도심엔 궁궐과 종묘 정도가 문화재청의 비호 아래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서울시가 관리하게 된 이 다섯 채의 고택들은 이곳에 모여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하기야 정부청사부터 서울시청에 이르는 길에 위치했던 관청들마저 흔적을 잃었으니 이까짓 한옥 몇 채쯤 별 것 아닐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건축이란 원래 있었던 곳에 있어야 그 의미가 온전히 기억되는 듯하다. 태릉 육군사관학교로 옮겨진 삼군부 청헌당이 선명한 단청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이곳의 한옥들도 어울리지 않게 청사초롱을 죽 달고 있긴 하지만 휘황찬란한 조명보단 낫다.
가끔 남산골 한옥마을을 찾아 이 고택들이 지녔던 과거의 위상을 떠올리며 툇마루를 쓰다듬을 때 생겨나는 애처로운 마음은 독거노인이 된 애국지사를 찾아 위로할 때의 그것과 비슷하다. 구한말 일본과의 병합조약에 날인하려는 어전회의를 병풍 뒤에서 엿듣고 있다가 치마 속에 국새를 숨겼던 조선의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로부터 국새를 빼앗았던 큰아버지 윤덕영의 위세 높은 가옥은 그래서 죗값을 치르느라 여기 이렇게 옮겨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궁궐도 없고 근대에 지은 성당건축 외에 이렇다 할 건축물이 없어서 였는지 지방도시인 대구를 찾았을 때 수십 층의 높은 빌딩 숲 사이에 이상화 시인 등 문인들의 생가가 있는 골목을‘근대로近代路’라 이름짓고 그대로 살려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때 옛집들이 의미를 부여받고 도심 속에 살아있는 느낌을 가졌다면, 남산골에 모인 서울 한옥들의 현재 모습은 이름조차 잃은 채 죽어 있는 느낌이었다. 한옥의 아름다움은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고 있는 상식적인 것이라 생각할 테지만, 그나마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본다는 이유로 외국인이 감탄해 마지않는 한옥의 아름다움을 잊고 있다. 우리 한옥의 미학적 가치는 동양의 건축 가운데 하늘을 찌를 듯이 얄밉게 처마를 들어 올린 중국의 건축이나 직선으로 딱딱하기 이를 데 없는 일본의 건축과는 같은 선상에서 놓고 볼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남산골 한옥마을에는 경복궁 중건공사에 참여했던 도편수 이승업 가옥의 경회루 누마루처럼 돌기둥으로 받쳐 올린 사랑채에서 최고의 건축기술과 세련된 솜씨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를 느낄 수 있다.
우리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황제가 처갓집 제사를 지내기 위해 처갓집을 찾을 때의 편의를 위해 동대문구 제기동에 지었던 해풍부원군 윤택영의 재실도 한옥마을 뒤쪽에 복원되어 있지만, 한옥마을에서 마음이 더 쓰이는 것은 사람이 살았던 집이다. 궁궐처럼 화려한 단청을 칠하지는 않았어도 조선시대 말 한 시대를 풍미했던 민영휘의 저택이나 오위장 김춘영의 가옥을 보면 들어가 살았으면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런데 각 가옥의 대청마루에는 여지없이‘들어가지 마시오’라는 팻말이 놓여있다. 한옥은 오래도록 사람이 살면서 손때를 묻히지 않으면 부식된다는데, 차라리‘여기 들어온 사람은 걸레질을 치시오’라는 팻말과 함께 걸레를 비치해놓는 것이 합리적인 관리방법이 아닐까라고 쓸데없는 생각을 해본다.
문화재로 지정 받지도 못한 고택들을 찾아 남산골 한옥마을을 찾을때면, 사랑채 높은 대청마루에 올라앉아 손님을 맞는 대감마님과 안채 툇마루에서 놀고 있는 어린 아씨에 대한 생각을 빈방에 채워 넣곤한다. 문화재를 대하는 부담감 없이 이처럼 채워 넣을 수 있는 한옥의 여백과 배롱나무 꽃 핀 담장너머로 보이는 이웃집 마당에서 느끼는 여유로움 때문에 텅 빈 한옥마을을 찾곤 한다. 이번 주말에도 높은 가을 하늘을 찌르고 서 있는 남산타워 아래 빽빽한 빌딩 숲을 살짝 비껴 널따란 마당을 차지한 한옥을 보러 갈 생각이다.
글·사진 임은경 코레일 수도권동부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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