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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로] 한국에서 살아 다행이다/ 조선일보

鶴山 徐 仁 2011. 11. 10. 13:25

 

사설

[태평로] 한국에서 살아 다행이다

  • 박정훈 기사기획 에디터
  • 입력 : 2011.11.07 23:10

    박정훈 기사기획 에디터

    이스탄불에서 아테네로 들어가는 터키항공은 출발 예정 시각을 1시간 반이나 넘겼다. 체크인할 때만 해도 창구 직원은 정시에 떠난다고 했었다. 왜 지연되는지 설명도, 안내방송도 없었다.

    아테네공항에 도착해서야 이유를 알게 됐다. 마중 나온 현지 관계자는 공항 관제탑 노조가 임금 삭감에 항의해 태업(怠業) 중이라고 알려주었다. 관광으로 먹고사는 나라가 자기 땅을 찾은 외국인들을 처음부터 짜증 나게 하고 있었다.

    다음날, 취재 일정이 빈 틈을 타 파르테논 신전을 보러 갔다. 관광객이 가장 붐빌 일요일인데도 입구는 굳게 닫혀 있었다. 몰려드는 관광객들이 실망한 표정으로 발길을 돌렸다. 세계 10대 박물관이라는 아테네 고고학박물관 역시 문을 닫아걸었다. 각국에서 왔을 관광객들은 가는 곳마다 허탕치며 금쪽같은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그리스 양대 노조가 총파업에 나서던 날, 호텔방에 영자(英字)신문이 들어오지 않았다. 호텔 측에 물어보니 기자 파업으로 모든 신문이 하루 휴간이라고 했다. TV 뉴스 역시 24시간 중단되고, 축구 중계는 해설 없이 화면만 내보냈다. 뉴스 없는 일상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현지 가이드는 종종 있는 일이라고 했다.

    그리스 국민은 예고 없이 벌어지는 파업에 익숙해진 듯했다. 현지에서 만난 사람들은 내가 좀 불편하더라도 타인의 의사표현을 존중한다고 했다. 고대 아크로폴리스 정치를 꽃피운 민주주의의 원조(元祖)다웠다. 그러나 그 속에서 생활하는 소비자 입장에선 참으로 불편했다.

    이날 밤 한·그리스 수교 50주년을 기념하는 한국예술단 공연이 열렸다. 택시는 없었다. 공연이 열리는 콘서트홀까지 지하철을 타기로 했다. 그런데 계산이 빗나갔다. 다른 노선으로 갈아타야 할 환승역에서 열차가 서지 않았다. 역 주변의 시위가 격렬해지자 열차를 무정차 통과시킨 것이었다.

    지하철을 내려 무작정 걸었다. 시위대가 휩쓸고 지나간 거리는 폐허 같았다. 최루탄 냄새가 지독했지만 도심을 피해 갈 도리가 없었다. 우회하려면 샛길로 빠져야 하나, 으슥한 골목엔 불법체류자 풍의 인적이 눈에 띄었다.

    택시도, 버스도, 어떤 차량도 없었다. 모든 교통수단이 완벽하게 차단된 순도 100%의 총파업이었다. 시민을 불편하게 만들겠다는 게 파업의 목적이라면, 목적은 훌륭하게 달성되고 있었다.

    심리적 공황(恐慌)을 뜻하는 패닉(panic)은 그리스가 단어 원산지다. 판(Pan)이란 반인반수(半人半獸)의 신(神)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는 신화에서 비롯됐다. 아테네 도심 한복판에서 기자는 눈물·콧물 흘리며 패닉에 얽힌 그리스 신화를 떠올렸다.

    노조와 좌파 운동가에게 그리스는 이상향(理想鄕)일 것이다. 소수의 행동권이 보장되고, 노조와 이익집단의 목소리가 존중받는다. 덕분에 사회적 약자가 최대한 보호받을 수 있다. 한국처럼 노동자의 생존권 탄압 논란이 빚어질 일도, 대형할인점 때문에 동네 수퍼가 망하는 일도 없다.

    대신 소비자의 생활편의는 희생될 수밖에 없다. 약자 보호를 위해 사회 전체가 공급자 위주로 짜였기 때문이다. 그리스는 그들 나름의 이유에 따라 자기 방식을 선택했을 것이다. 어느 쪽이 옳은지 정답은 없다.

    취재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오며 생수를 사기 위해 가게를 찾았다. 한국에선 그렇게 흔하던 편의점이 한 곳도 없었다. 영세상인 보호를 위해 심야영업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기자는 호텔방 냉장고에서 5.5유로(약 8500원)짜리 생수병을 꺼내 갈증을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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