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일에 충청도 부여, 공주에서 백제문화제가 열렸다.
근 10개월간 끙끙거리며 고심하며 써오던 장편소설을 탈고하여, 출판사에 넘긴 후 홀가분한 마음으로 아내가 살고 있는 공주로 내려갔다. 이번 소설은 내가 평생 써오던 소설 중에서 가장 많이 추고를 하였다. 자그마치 6번이나 추고를 하여, 소설의 전문을 거의 외울 정도였다. 그러나 한번 더 고치고 싶은 욕망을 누르고 출판사(실천문학사)로 넘겼다. 너무 고심하다보니 무리를 하였는지 몇번이나 코피를 쏟곤했다.
이번 백제 문화제가 57회라고 하니 해방 되고나서 6년째부터 시작했다는 뜻이다.
나는 공산성 남동편에 작은 적벽돌 집을 지어서 살고 있지만, 나는 어쩐 일인지 공주에 자주 내려가지 못한다. 서울에서 아파트에서 주로 살고 글도 쓰고 독서도 한다.
아내는 아들놈들이 두놈 다 미국으로 유학을 간 후, 혼자 자기가 무섭다고 하여, 이 집을 놔두고, 학교(공주대학교)에서 금강이 내려다보이고 공산성이 건너다보이는 곳에 지은 오피스텔을 세 얻어 살고 있다. 물론 아내는 주말이면 서울집으로 올라오곤 한다. 내가 내려가는 주일도 있다.
몇 차례나 이 백제문화제에 참가하여보았지만, 언제나 실망 투성이었다. 경청해볼만한 문화행사는 없고, 공주에 금강변이나 부여의 구드래 변에 수백개의 천막을 쳐놓고 행사를 한답시고 하지만, 대부분이 음식점들이고, 지방물산들을 파는 가게들이었다.
이번 주, 내가 공주로 내려간 날은 유난스레 한국의 가을이 무르익은 날이었다. 구름 한점 없는 하늘이 한없이 높게 펼쳐져 있었다. 나는 행사 안내서를 구해 행사 내용을 다시한번 잘 살폈다. 그래서 서너가지 행사만 찾아가 보기로 하였다.
1)공주대학교에서 하는 백제역사에 관한 국제세미나
2)공산성 안의 마을이었던 성안마을의 발굴현장
3)공산성 안에 복원되어진 임류각의 원래 유지
4)부여 백마강 건너편에 조성되어진 사비성 안의 박물관
5)백마강 건너편에 진행중인 왕흥사의 발굴현장
이상 다섯가지를 선정하여 찾아다녀 보기로 했다.
1)번은 직접 세미나 장으로 가지 않고, 아내에게 부탁하여 책자를 받아서 읽어보았다.
모두 여섯편의 논문이 발표되었는데, 이 논문들을 다 정독하였다. 김상현(동국대), 중국인교수, 일본인 교수, 최연식교수(목포대), 이남석 교수(공주대)교수, 이도학교수(부여전통문화학교)의 논문을 읽었다. 이분들은 그야말로 백제사의 전문교수들로 백제사세미나들의 단골 학자들이다. 논문들을 일독하고 나서 느낀점은, 논문의 논지가 이분들이 기왕에 책자로 혹은 다른 논문집에 발표한 것과 별로 진전되지 않았다는 사실의 인식이었다. 삼국시대, 특히 신라불교사에 대해 광대한 저서를 가지고 있는 김상현교수의 백제 불교사 논문은 그리 독창적이지 않은 듯했다. 기왕에 흔히 볼 수 있는 학설의 새로운 정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차분한 논지의 전개는 기조논문으로서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이남석 교수의 논문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오는 삼국의 불교유적을 총망라하여 도표를 만든 것은 비전문 독자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이 도학 교수의 논문은 백제사 전문의 교수의 논문으로서의 무게를 가지는 것이었다. 특히 이 분이 다른 지면에 발표한 백제 부흥운동에 대한 논문의 독창성이 지금도 머리에 남아 있다. 즉 그는 의자왕이 무조건 항복한 것이 아니고, 당 나라와 협상을 하면서 나라를 구하려는 입장에서 항복하였다는 논지는 지금도 머리에 남아 있다.
그리고 이번 백제불교사 세미나의 압권은 일본학자의 논문이 아닌가 한다. 그는 백제에서 일본으로 불교등 문화가 전해져온 것이 아니라, 중국의 문화가 일본으로 건너오는데, 잠시 백제를 거쳤을 뿐이라는 논지를 견지하고 있어서 눈길을 끌었다. 논문의 논지는 상당한 논리적인 근거가 있었고, 서책의 섭렵의 정도가 한국학자들의 시계를 벗어나는 것이었다.
2)성안마을은 공산성 북안, 금강 변에 세워진 공북루 남쪽에 조성되어진 민간인 마을을 말한다.
공산성의 지형을 살피건데, 왕궁지나 기타 중요 성벽터 등으로 추정되기에 가장 적당한 지대인데, 자연부락이 조성되어 있었다. 몇해 전부터 공주시는 이 자연부락을 막대한 철거비용을 지불하고 철거하고, 이 지역을 공주대학박물관등에 의뢰하여 발굴하기 시작하였다. 과연 여기에서 어제 보도된데로, 삼국시대에 유일하게 백제장군의 가죽 갑옷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이 성안 마을의 지표면에서 지하로 5.5 미터 되는 지점에서 백제시대의 성벽의 흔적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백제시대 마을의 유구를 찾아냈다. 그 유구의 전면이 공개되었는데 깊은 감동을 주었다. 백제인들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것 같았다.
3)동성왕이 임류각을 공산성 정상에 조성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있어서 임류각을 복원하였다. 그러나 복원되어진 임류각은 임류각의 원래 유구 위에 조성되어진 것이 아니고, 몇 미터 북쪽 산의 정상 부분에 조성되었다. 나는 이 원 유지를 확인해 보았다. 주춧돌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그야말로 백제인들의 숨결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4)작년인가 백제문화제를 대대적으로 거행하였다. 나당 연합군으로 망한 백제의 주궁인 사비성을 복원하는 기념일이었다. 20년이상의 세월에, 6000 억원의 예산을 들여 사비성이 백마강(금강)북안에 복원되었다. 수많은 서울사람들이 여기를 방문하였다. 삼국시대의 궁궐치고는 유일하게 복원되었다. 복원된 사비성을 제외하고는, 삼국시대의 궁궐은 남북한 어디에도 없다.
작년에 두번이나 이 사비성을 찾았더랬으나, 언제나 여러 사람들하고 같이 갔었기 때문에 차분하게 살펴볼 여유가 없었는데, 이번에는 좀 찬찬히 살펴보고자 했다.
백제사(bc 18- ad 660)의 미스테리는, 웅진시대 60여년과 사비시대 120여년 도합 180여년을 제외하고 근 500년에 해당하는 하남위례성의 유적이 너무나 없는 것이다. 역사학자가 아닌 나로서는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다. 하나의 왕조가 500년간 지속된 흔적이 이렇게도 없단 말인가. 왕성의 위치도 확실한 것이 없는 실정이라고 한다. 몽촌토성인가, 풍남토성인가도 확정되지 않았다.
이번 사비성의 복원시 하남위례성의 주궁을 복원하였는데, 주궁의 지붕을 초가로 하여 이채로웠다.
하남 위례성의 주궁이 초가집인지 기와집인지 어떤 기록도 없을 것이다. 추측에 의해 아마도 초가였으리라 생각한 것 같다. 나의 생각으로는 온조가 처음 여기 하남에 위례성을 조성할 때는 일시적으로 초가로 했을지 모르겠으나, 500년 역사가 지속되면서 당연히 기와집으로 바뀌었으리라 추측한다. 고구려의 안학궁이나 신라의 안압지가 있는데, 하남 위례성이 초가집이었겠는가.
그리고 복원되어진 사비성이 어떤 근거도 없을 것이다. 일본에 건축술을 전해준 백제인들이니 일본에 남아 있는 궁궐들의 모습을 전용했다는 설명서가 서 있기는 했다. 어쩐지 백제시대의 궁궐같지가 않고 천 년 이후에 세워진 조선시대의 궁궐같은 느낌을 받았다. 단적으로 말해 너무 화려하다는 생각이었다. 아마도 이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근정전처럼 화려하고 거대하지는 않았으리라.
반면에 계백장군과 사택지적의 사가가 너무나 광대한 기와집이라 조금 어울리지 않는 듯했다. 조선시대 제상들의 집도 99칸을 넘지 않았는데, 이 두 사람의 집은 내가 보건데 조선시대 99칸 집을 능가하는 것 같았다.
이런 점을 비교하면서 복원된 사비성을 한바퀴 돌고, 박물관을 방문하였다. 작년 개관시에는 문을 열지 않았었다. 별 내용은 없었으나 백제를 제건하고자 하는 공주 부여인들의 열정을 느꼈다.
백제사의 특이점의 하나는 왕국이 망하고, 왕국을 부흥하려는 부흥 운동이 삼년 이상 불붙었다는 사실이다. 한반도에 그렇게 많은 왕조가 서고 망한 것은 아니지만, 백제를 제외한다면 어떤 왕조도 망하고 나서 백제처럼 치열하게 부흥전쟁을 치른 경우는 없었다. 정식으로 왕이 등극하고, 당군과 신라군과 치열한 전쟁을 치뤄 그 때만다 승리하여 200여성을 회복하고 정식으로 왕을 추대하였다. 특히 예산에 위치한 임존성은, 사비성을 함락한 당군을 막아냈고, 문무왕과 김유신의 대군을 막아냈다. 두 차례나 승리함으로써 백제의 부흥이 가능하다는 자신감을 망국 백제인들의 가슴에 불붙게 했다.
망국 백제에는 두 개의 정권이 성립되어 있었다. 세자였던 부여융의 정권과, 부흥군의 핵심이던 복신과 도침이 일본에서 모셔온 부여풍의 정권이었다. 부여융의 정권은 당군의 괴뢰정권이었다. 부흥군의 본거지였던 임존성에 웅거한 부여풍의 정권은 사비성정권을 무너뜨린 당군과 신라군을 연속 격파함으로써 패망 백제를 다시 세우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실력으로 백제인들에게 인식시켰다. 부흥군의 기세가 워낙 치렬하니 소정방과 문무왕은 임존성을 포기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그러나 꾀가 많았던 유장 유인궤가 항복해온 용맹하고 전략에 천재였던 흑치상지를 이용해, 초창기 흑치가 임존성을 지켰던 점을 이용해 당군을 주어서 임존성을 치게 했다. 드디어 임존성는 무너졌다.
나는 그때의 부흥군의 기개가 이어져 조선 선조시 임진왜란 직전에 전국을 피로 물들인 정여립의 반란이 일어났으며,이 지역에서 동학란이 일어나고 의병이 속출했다고 생각한다.
천년 역사를 이어옴으로써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찬란한 왕조사을 엮어온 신라의 전혀 천도가 없었던 왕도였던 경주에 궁궐조각 하난 복원된 적이 없는데, 이번 거대한 사비성이 복원된 것도 어딘가 조금은 생각을 하게 한다.
5) 백마강 북안, 복원 사비성의 서편에 발굴중인 왕흥사는 백제의 무왕 시(600년)에 시작하여 34년간 동안 지었다는 말이 전해져 온다. 익산의 미륵사지, 부여의 정림사지, 그리고 보령의 성주사지와 더부러 부여 왕흥사지는 백제가 남긴 4대 자지로 일컬어진다. 고대국가인 신라 백제 고구려의 경우, 불교는 호국종교였다 왕의 이름 자체가 불교적이었다. 성왕이니 위덕왕이니 무왕의 자신의 이름 자체도 불교식이다.
마침 낙화암 아래부분에서 강 건너까지 왕흥사 유지까지 부교가 설정되어 있어서 걸어서 건너갈 수 있었다. 그러나 부교를 건너가 발굴지로 가보았더니 일반인 접근금지라는 큰 표지판이 나그네의 발길을 막았다.
하는 수 없이 강의 북안에 있는 왕흥사의 유지에서 한 2킬로 북쪽연안으로 사비성이 복원되어 있는 지역이라 금강 연안을 따라서 걸어서 사비성까지 갔다.
유유히 흐르는 금강과 공산성
공주시 전경과 공산성 안의 성안마을과 성안마을 발굴 도
지하 5 킬로 밑에서 발굴 되어진 백제인들의 마을
복원되어진 공산성의 서문 금서루 앞에서
복원되어진 사비성
시비성의 뒷편에서 찍은 모습
복원되어진 하남위례성
복원되어진 백제마을 앞부분이 계백장군의 집
하남위례성의 주궁
하남위례성의 성책
복원되어진 임류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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