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리(유동숙)는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친다. ‘서른 중반에 상아탑의 선생 자리를 꿰찬 여자’의 우아한 삶 같은 건 그녀에게 없다. 학생들 앞에 선 직업인으로서의 모습은 그나마 낫다. 혼자 지내는 숙소에서 그녀가 때우는 밤의 풍경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포르노를 보며 독신의 쓸쓸함과 무료함을 달랜다. 그러다 자위를 통해 끓어오르는 욕망을 해결한다. 어느 날 그녀는 포르노를 보다 비슷한 처지의 여자를 발견한다. 처진 가슴과 늘어진 뱃살의 여자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주리는 문득 자신이 포르노에 출연하면 어떨까, 상상해 본다. 마침 그 포르노의 제작사는 동창 명숙이 운영하는 곳. 주리는 그녀에게 떼를 쓰기로 한다. 그리고 명숙을 찾아간 주리는 심장이 뛰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주리의 궁색한 처지는 과장된 감이 있다. 아무리 중년에 가까운 여자라 해도 교수라는 직업을 가진 여자가 ‘자자고 하는 사람도 없고, 남자 살 돈도 없다.’고 푸념하는 데는 현실감이 모자란다. 주리는 차라리 비루한 일상을 은유하는 인물에 더 가까우며, 다른 인물들의 삶도 주제에 맞춰 정형화되어 있다. 지난달 28일 개봉한 ‘심장이 뛰네’의 인물들은 모두 욕망을 배신하는 현실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 자질구레한 문제들을 해결하느라 지친 선배 여교수는 제자와 은밀한 관계를 나누다 화를 입는다. 학창 시절 멋진 영화인이 되기를 희망했던 명숙은 꿈과 반대로 포르노그래피를 만들어 돈을 번다. 밥벌이로 포르노그래피를 찍는 감독은 너저분한 현장을 떠나지 못해 괴롭다. 현재가 미래를 망칠까봐 걱정하는 포르노 배우는 얼굴을 가리고 목소리를 숨긴 채 연기한다.
주리의 욕망은 멋진 남자와 육체적 관계를 나누는 것이지만, ‘심장이 뛰네’는 그녀가 진입한 쾌락의 현장을 시시덕대며 바라보는 영화는 아니다. 적나라한 촬영 현장도 관객의 호기심 만족과는 무관하게 묘사된다. ‘심장이 뛰네’는 주리의 육체적 경험보다 그녀가 맺는 타인과의 관계에 주목한다. 주리에게 계약서를 내놓으며 명숙은 “사인하는 순간부터 나는 네 친구가 아니야, 너는 내가 고용한 한 점의 살덩이야.”라고 잘라 말한다.
명숙의 말은 극 중 인물들의 관계를 대변한다. 인물들이 하나같이 쓸쓸해 보였다면, 그건 그들이 계약적 관계 위에서만 움직이기 때문이다. 주리가 친구의 옛정을 확인하려는 명숙을 차갑게 대하는 것처럼, 극 중 본질적인 관계를 향한 몸짓들은 거부당한다. 공적인 약속인 계약은, 어쩔 수 없이 그것에 동의한 인간을 억압하고 병들게 한다.
소박한 외양을 지닌 ‘심장이 뛰네’는 거창해 보이는 주제에 대해서도 수수하게 접근한다. 주리는 현실을 타파하고자 날뛰지 않으며, 육체적 욕망은 허무하다는 헛소리를 늘어놓지도 않는다. 욕망은 현실의 결핍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죽음에 이르지 않는 한 인간은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욕망을 완벽하게 충족시키거나 욕망에서 벗어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는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주리는 지금까지와 다른 시선으로 욕망을 바라보게 된다.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소 자유에 한 발짝 다가서는 것이다. 영화의 짧은 클라이맥스에서 주리는 처음으로 과감하게 행동하는데, 그 장면은 평범한 성적 상황을 과감하게 비튼다. 통쾌한 웃음으로 응원하고 싶은 장면이다.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