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임민혁 워싱턴 특파원
최근 워싱턴포스트(WP)는 조금 특이한 기사를 1면 톱기사로 실었다. "워싱턴 시내 조지워싱턴대 인근의 포기바텀 메트로(지하철)역(驛)에 새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됐다"는 내용이다. 이 기사를 보고 처음 든 생각은 "지역소식지 한구석이 어울릴 법한 뉴스를 WP는 왜 1면에 이렇게 크게 다뤘을까"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기사를 읽어내려가다 보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메트로역 에스컬레이터는 '빚더미' 미국 경제가 처한 현실의 한 단면을 상징처럼 보여주고 있었다.
"워싱턴에서 신설 메트로역이 아닌 기존 역에 새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된 것은 근 1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그동안 워싱턴 메트로역은 노화(老化)로 인해 수많은 에스컬레이터가 고장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번 주에는 588개 에스컬레이터 중 110개가 멈춰 있다. 이를 이용하는 시민들도 이미 에스컬레이터를 '계단'으로 인식하고 있는 지 오래다. 하지만 시(市)는 이를 방치하고 있다. 이유는? 물론 돈(예산)이 없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지하철역에 새로 들어선 에스컬레이터 한 개가 워싱턴포스트의 '주요 뉴스'가 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기사에는 "새 에스컬레이터가 움직이는 것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는 시민의 반응까지 곁들여졌다.
'세계 최고의 경제대국' '유일한 수퍼파워' 미국의 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고는 상상하기 쉽지 않지만, 실제로 미국이 현재 처해 있는 모습이 이러하다. 미국은 연방정부나 주정부 할 것 없이 막대한 부채에 짓눌려 있다. 지난 경제위기 후의 경기부양책, 급증하는 의료보험·연금 지출, 부유층에 대한 감세 혜택 등으로 세수(稅收)가 세출(歲出)을 도저히 쫓아가지 못하면서 이미 14조3000억달러(약 1경5000조원)의 정부부채 한도를 모두 소진한 상태다. 미국 재정적자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지금은 정부가 빚을 내서 빚을 갚는 지경이 돼버렸다. 미국 언론들은 연일 부채한도를 둘러싼 암울한 전망으로 지면을 도배하고 있다.
정부의 부채규모는 너무나 천문학적이어서 감(感)을 잘 잡지 못하는 미국인들도 일상생활을 통해 이런 현실을 체감하고 있다. 워싱턴뿐 아니라 인근 지역의 도로는 제때 보수를 하지 못해 땜질과 균열로 만신창이가 돼 있고, 주정부들은 부족한 세수를 보충하기 위해 주차·속도 위반 등에 전례 없이 공격적으로 벌금을 부과하고 있다. 또 미국 전역의 주립대들은 주정부가 교육예산을 대폭 삭감함에 따라 앞다퉈 등록금을 올리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이 4만7275달러로 우리나라(2만759달러)의 두 배를 훨씬 넘는 미국인들이 '돈 없는 정부'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더구나 지금은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한 정치권의 이견(異見) 때문에 '미국 정부 디폴트(채무불이행)'라는 초유의 상황까지 거론되고 있다. 물론 미국 정부가 국가부도까지 가는 상황을 방치하지는 않겠지만, 그런 가능성이 언급되는 것만으로도 미국은 이미 체면을 구길 대로 구겼다. 확실히 예전의 미국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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