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박은주 문화부장
얼마 전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대규모 제조업 기반이 있어야 경제번영이 가능한가'를 두고 3회에 걸쳐 '토론 배틀'을 벌였다.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주장을 폈고, 자그디시 바그와티 컬럼비아대 교수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다. 토론을 지켜본 네티즌의 76%가 장하준 교수가 옳다고 했다. 압승이었다.
우아한 양복이 아니라 땀내 나는 작업복이 나라 경제를 강하게 만든다는 게 장 교수의 지론이다. 저서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도 장 교수는 제조업의 미덕과 힘을 강조했다. 제조업은 빠른 시간 내 생산성이 증가해 나날이 공산품 가격이 떨어지고 있기 때문에 제조업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낮은 것처럼 보이는 착시 현상이 일어나지만 첨단 서비스업이라는 것도 실은 제조업에 뿌리를 두고 있으므로 제조업이 없으면 다른 것도 없다는 게 그의 논리다.
물론 장 교수의 논리가 힘이 있기도 했지만 최근 금융업·서비스업을 보는 눈초리는 꽤 많이 달라졌다. 빚도 재산이라며 '파생금융상품'을 무작정 팔아댄 미국 월가 금융맨들의 논리가 얼마나 위험한가를 깨달은 사람들은 "정말 3차 산업이 우월한가" 하는 의심에 빠져들었다. '금융업 종사자'라 쓰고, '잔머리꾼'이라 읽는 것이 더 맞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됐다.
이런 주장이 처음이거나 이례적인 것은 아니다. 지난 1990년대 초에도 일본 최고 경제연구소인 미쓰비시종합연구소는 미국의 무역적자 증가와 3차산업 증가가 상관관계가 있으며 이것이 바로 미국 경제의 문제점이라고 분석한 책을 내놨다. 책 제목이 '제조업은 영원하다'였다. 당시 일본 경제는 미국 흉내내기에 빠져 있는데, 이러면 큰일 난다는 걱정을 담은 책이었다. 비슷한 시기 일본의 거품경제가 깨졌고, 이후 일본은 20년째 불황을 겪고 있다.
"몸 쓰는 것은 천박하고 머리를 쓰는 게 우월하다"는 건 우리의 오랜 상식이었다. 양반처럼 사는 게 멋있다는 유교적 관습, '3차 산업일수록 고부가가치'라는 사회적 인식, "무인공장 시스템이 도입돼 노동하는 인간은 필요 없어진다"는 성급한 미래예측이 더해져, 자식에게 "너 기름밥 먹어라" 하는 말은 저주의 유사어가 됐다.
그런데 이건 사적인 문제로만 끝나는 게 아니다. 요즘 우리나라 재벌 2·3세들이 자존심 대결을 벌이는 분야는 거의 다 서비스업이다. 창업자들이 땀 흘려 노동으로 일군 기업일수록 손자나 손녀들은 금융업, 재테크, 외식(外食)이나 명품·명차 수입업에 눈독을 들인다. 개인이 장사하는 시장에 아버지 기업의 후광을 입고 들어선 젊은 사장들은 빵빵한 건물을 짓고 화려한 인테리어에 돈을 붓고, 외국서 배워 온 요리사를 초빙한다. 요즘 강남의 식당 컨설턴트들이나 인테리어 디자이너들을 먹여 살리는 건 주로 이런 꼬마 재벌들이다. 작은 성공이라도 거두면 잘했다고 박수를 받는다. 망하면 또 차려준다. 대기업의 '젊은 실장님'으로 묘사되던 드라마 속 재벌 후손들이 요즘은 '레스토랑 사장'으로 설정되는 것도 이런 추세를 반영한다.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공장 돌려 재벌이 된 사람들조차 그 공장을 어떻게 발전시킬까 하는 대신 땀내 안 나고 우아한 쪽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몸뚱이'로 밥을 버는 사람들이 대접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공장이 영원할 것이란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적잖은 학자들은 제조업을 멸시하는 습관이 국가적 비극을 불러온다고 경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