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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빛
하나님 없는 우리의 삶은 어둠이다. 우리의 삶을 비출 등과 빛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의 빛을 주셔서 우리 삶의 길을 밝혀주신다.
-정영순의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길 위에 서 있다’ 중에서-
말씀은 그 어떤 훌륭한 말보다 힘이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 모두 실제 일어난 사실이자 현재도 살아 움직이는 능력의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그 사실을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주의 말씀은 곧 삶의 빛이 됩니다. 역사의 기록이 아닌 그의 삶을 주장하고 움직이는, 살아있는 힘이 있는 메시지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스스로 길을 찾으려 어둔 세상가운데 방황치 말고 먼저 주의 말씀으로 우리의 발등을 환히 비추고 주님과 함께 은혜의 길을 걸어가십시오. 세상을 이기고 주의 영광을 드러낼 말씀의 빛을 비출 때 우리는 주의 강한 용사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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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휴식 |
이 세상 어디에도 일시적인 쉼은 있겠지만 진정한 안식은 예수님 뿐 입니다 온전한 평안과 쉼은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태복음 11:29)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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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임효식 2002년 좋은생각 디지털 사진전 입상 2007년 조선일보 사이버 신춘문예 디카에세이 부문 입상 다음 카페 '♥독서클럽♥ 책으로만나는세상' 서평단 활동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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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북 - 잠언 17:16~28 |
16. 미련한 자는 무지하거늘 손에 값을 가지고 지혜를 사려 함은 어찜인고 17. 친구는 사랑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났느니라 18. 지혜 없는 자는 남의 손을 잡고 그의 이웃 앞에서 보증이 되느니라 19.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죄과를 좋아하는 자요 자기 문을 높이는 자는 파괴를 구하는 자니라 20. 마음이 굽은 자는 복을 얻지 못하고 혀가 패역한 자는 재앙에 빠지느니라 21. 미련한 자를 낳는 자는 근심을 당하나니 미련한 자의 아비는 낙이 없느니라 22.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23. 악인은 사람의 품에서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느니라 24. 지혜는 명철한 자 앞에 있거늘 미련한 자는 눈을 땅 끝에 두느니라 25. 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근심이 되고 그 어미의 고통이 되느니라 26. 의인을 벌하는 것과 귀인을 정직하다고 때리는 것은 선하지 못하니라 27.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냉철한 자는 명철하니라 28.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겨지고 그의 입술을 닫으면 슬기로운 자로 여겨지느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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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6ㆍ25 61돌입니다. 신록 짙은 6월은 우리 민족사에 가장 비극적인 6ㆍ25가 있어 늘 가슴을 아리게 합니다. 그 한 맺힌 전쟁이 산자와 죽은 자의 가슴에 분단의 경계선을 긋고 유린 당한 세월의 흔적만 얘기하고 있을 뿐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도 남북 간에는 아무것도 변한 게 없습니다. 다시 한 번 호국선열들을 생각하며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기도해야 겠습니다.
친구와 형제 <친구는 사랑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났느니라>(17절). 친구도 그 사랑이 변하지 않아야 한다고 합니다. 변하고 쉽게 끊어지는 우정은 결코 친구가 아닙니다.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사귄 친구라면 이해관계에 따라 변할 것이고 내게 덕이 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배신할 것입니다. 그건 장삿속이지 우정이 아닙니다. 또한 혈육은 형제 가운데 누군가가 곤경에 처하거나 위기에 몰렸을 때 지켜주고 구해주기 위해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형제에 대한 본능적인 애정과 남다른 연민이 있습니다. 따라서 혈육에 대한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우리의 남과 북은 친구라면 가장 가까운 친구요, 혈육이라면 다 이산한 형제자매들입니다. 그럼에도 동족상잔의 전쟁과 반세기도 훨씬 더된 분단 시대를 살면서도 어째서 우정과 형제애를 전혀 발동하지 못하고 있는 걸까요? <위급한 때를 위한 형제>는커녕 서로를 위급하게 하는 원수지간이 된 것은 왜 일까요?
다툼을 좋아하는 자와 문턱을 높이는 자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죄과를 좋아는 자요 자기 문을 높이는 자는 파괴를 구하는 자니라>(19절). <북>은 다툼을 좋아하고, <남>은 문턱을 너무 높인 것은 아닐까요? 반세기가 넘도록 화해와 통일에 아무런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면 이는 남북 모두의 책임이지 결코 어느 일방의 탓만은 아닙니다.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죄과를 좋아한다>는 말씀은 다툼을 통해 얻은 악한 결과물을 즐긴다는 뜻입니다. 북한의 지배층이 긴장을 조장해 통일을 지연시키고 분단을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에 이용한다면 이는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남한 역시 대화의 문턱, 교류의 문턱, 인도적 지원의 문턱을 필요이상으로 높여 북한과의 관계를 더욱 어렵게 했다면 그 책임 또한 막중할 것입니다. <자기 문을 높이는 자는 파괴를 구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문턱을 높이면 결국 물리적인 충돌과 싸움뿐이라는 것입니다.
명철한 자와 미련한 자 <지혜는 명철한 자 앞에 있거늘 미련한 자는 눈을 땅 끝에 두느니라>(24절). 명철한 자는 늘 <지혜롭게>생각하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미련한 자는 늘 사태를 <땅 끝>으로 몰아갑니다. 극단한 생각을 하며 막장 드라마를 연출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북한의 선택을 <벼랑 끝 전술>이라고 합니다. 실제 그들은 지금까지 그렇게 <땅 끝>전술을 구사해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 아니라 지혜로 깊이 생각하고 명철로 바르게 판단하여 민족의 평화와 남북 상생의 길이 무엇인지를 모색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음 세대들에게 반드시 통일과 평화가 이룩된 나라를 물려 줘야 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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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조성노 독일 본(Bonn) 대학교 신학부 졸업 뮌헨(Muenchen) 대학교 신학부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역임 푸른교회(분당 소재) 담임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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