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신정록 도쿄특파원
얼마 전 송년 모임 자리에서 옆 자리에 앉은 한 일본 기자가 물어왔다. "일본도 대통령제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주저 없이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일본에 살다 보면 이런 내용의 문답을 가끔 경험한다. 일본 정치인들, 지식인들의 대다수는 내각책임제가 일본의 리더십 위기의 주범이라고 생각한다. 1년 만에 총리(내각)가 교체되고, 교체된 총리는 불과 3~4개월 만에 내각 지지율 20~30%대로 곤두박질친다. 일상적 나라 살림을 할 뿐, 국가적으로 중요한 큰일은 건드리지도 못한다.
요즘 일본인들은 한국 경제가 잘나가자, 남의 떡이 커 보인다고 한국 정치체제에 대해서도 부러워하는 경향이 있다. 대통령이라는 강력한 리더가 빗자루로 마당 쓸듯이 나라를 이끌어가는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대통령제가 한국 사회의 갈등을 부르는 부작용도 있다'라고 설명해도 별 소용이 없다. "그래도 내각제였더라면 지금의 한국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일본 정치학자도 만나봤다.
일본인들은 그러면서도 누구도 헌법 개정이라는 핵폭탄을 건드리지 못한다. 현재의 양원제를 단원제로 바꿔 집권당의 리더십을 부분적으로 강화하자거나, 아예 총리를 직선으로 선출하자든가 같은 아이디어는 많다. 국회 내에 '단원제 실현 의원연맹'이라는 것도 있다. 하지만 일본 사회 어디에도 그걸 밀고 갈 동력은 없다.
기자는 2년여 전 일본에 올 때만 해도 한국에 권력분산형 개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정치부 기자 생활 10년 동안 지긋지긋하게 봐온 사생결단의 정치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이 바뀌었다. 내각제에 태생적으로 따라다니는 리더십 약화라는 문제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일본 정치인들의 행태가 생각을 바꾸게 했다.
일본의 정치인들은 선거가 끝나는 다음 날부터 다음 선거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한국도 그렇지만 일본은 훨씬 심했다. 하원(下院)에 해당하는 중의원은 현 헌법 아래 63년 동안 무려 24차례의 총선거를 치렀다. 2년 6개월에 한 번에 해당한다. 이러니 잠자다가도 선거만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또 그 중간 중간 3년마다 참의원 선거를 통해 중간평가를 받아야 하고, 집권당은 여러 파벌로 갈라져 흔들거린다. 리더십이란 것이 존재하기도 어려운 체제다.
지금 일본에는 국가의 진로와 관련된 거대 이슈 두 가지가 도사리고 있다. 소비세(부가가치세)를 두 배로 올려 한계에 달한 복지비용을 조달할 것이냐는 문제, 미국 주도의 환태평양 FTA에 가입할 것이냐의 문제다. 두 문제 다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 민주당 정권이 이 일을 돌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을 단 한 사람도 만나보지 못했다.
한국에서도 철만 되면 개헌론이 나온다. 내각제 각서 파동도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일본에 살면서 '정말 이건 아니다'는 생각이 점점 깊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