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데, 웬 눈이 금년에 이렇게 많이 오나.
詩情을 안겨주는 겨울의 선물이 천덕꾸러기가 되어버린 듯..
때아닌 雪景이지만, 그 현란함에
매료되어 몇 컷 담아보았다.
눈은 이렇게 세상을 축복해주는구나! 더럽혀진 거리도,
보기싫던 흉물도, 모두 흰 옷으로 갈아입히고, 新婦의
웨딩 드레스처럼 순결한 모습으로 가슴을 설레게 하는구나.
마음의 상처도, 세파에 일그러진 삶의 고랑도
눈이여, 모두 덮어다오! 감추고 싶은 부끄러웠던
내 가슴도 눈이여, 모두 덮어줄 수는 없는가.
성격탓도 있겠지만, 단순한 것이 내 눈엔 그렇게 아름답다.
美學을 공부한 일도 없고, 더구나 사진학에 감히 무엇을
말하랴마는, 화룡점정의 기개랄까, 천지의 정적을 깨는
그 일 점을 나는 사랑한다. 사랑도, 인생도, 생각해보면
그 한 점을 찾아가는 여정이 아니었던가. 빛나는
그 일 점이 없었더라면 삶이 얼마나 허망했을까.
눈부시게 아름다운 이 설경을 잡으려는 카메라 맨들이 곳곳에
진을 치고 있다. 한짐씩 짊어진 장비도 늠름하고,
긴 망원 렌즈로 앵글을 잡는 모습들이 진지하다.
그 틈에 디카를 들고 끼어드는 내가 스스로 생각해도
초라하지만, 어차피 인생은 제 멋에 겨워 사는 것.
렌즈를 통해 들어오는 은세계가 과연 별천지다.
이렇게 찬란한 삼라만상인 것을, 세상엔
왜 그렇게 싸움이 그치지 않을까.
정갱이까지 푹푹 빠지는 눈을 헤치며
능선을 오르는 사나이들의 모습이
눈길을 끈다. 비록 동산일망정 전인미답의
신비경으로 도전하는 그 기백이야말로 분출하는 삶의
에너지 아닌가. 위험부담이 없는 도전이 어디 있으며,
도전이 없는 성취가 어디 있으랴.
몽촌토성의 목책이 흰 눈 속에 더 아름답다.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전략용이지만 지금은 사진 매니아의 반가운
포토 존. 아예 그런 생각으로 처음부터 예쁘장하게
복원해 놓았나보다. 허긴 聖殿에 모신 예수님의 십자가
상이 고난은 커녕 멋만 생각해 디자인된 것을 보고
탄식했던 일에 비하면, 저 정도는 애교일 수밖에.
가자, 새해 희망의 세계로!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먹고, 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먹고, 이글이글 앳된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애장품 수석 옆에서, 서예를 즐기시던
혜산 선생님의 잔잔한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천지를 하얗게 덮은 백설의 향연. 백년만의 폭설은
백년만의 교통대란을 일으켰지만, 백년만에나
볼 수 있는 비경을 연출해주는 것 아닌가.
발목 깊숙이 눈속에 빠지고, 언 손이 곱아 샷을
제대로 누를 수도 없었지만 평생에
다시 만날 수 없는 이 절호의 기회를 어찌
놓칠 수 있으랴. 만사 제치고
디카를 둘러메고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눈꽃열차가 있으면 눈꽃호수도 있지 않겠나. 눈이 내린지
이틀이나 지난 뒤였지만,백설의 석촌호수는
가히 환상적이었다. 그러나, 나뭇가지가
시야를 가리고, 발을 디딜 수 없이 눈 속에 푹푹 빠져
카메라 앵글을 잡기가 힘들어서 이 신비한
풍광을 제대로 찍을 수 없는 것이 안타카웠다.
엊그제 가곡의 밤
에서 불렀던 김효근의 눈
을 입 속으로
흥얼거리며, 카메라의 창을 통해 나타나는
아름다운 영상을 잡으면서 산책하는 이 기분을 누가 알랴.
디카를 잡은 손이 감각이 없을 만큼
얼얼하지만 기분은 만점,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은 이렇게 행복하다.
이 아름다운 석촌호수, 환상의 눈길을 디카에 담으며
두어시간이나 도는 동안, 카메라 맨들을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한 것이 신기했다. 기분좋았던 석촌호의
여세를 몰아 인근에 있는 올림픽 공원으로
갔더니, 거기엔 카메라 맨들이 곳곳에 있다.
석촌호수의 비경을 나 혼자 담고 온 듯해
미안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문자 그대로
눈녹듯 녹아 버릴 비경이 아깝기만 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