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ree Opinion

[넷향기] 박영택 교수의 "다각적 안목의 창조적 접근"

鶴山 徐 仁 2010. 11. 25. 12:47

다각적 안목의 창조적 접근
박영택

김동유라는 작가입니다.
이 작가는요. 제가 90년대 중반에 대전에 가서 이작가를 만난 기억이 있습니다.
이 작가는 대전에 목원대학교를 나오고 대전에서 조금 떨어진 교회의 허름한 비닐 하우스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던 때 제가 찾아갔었습니다.
굉장히 열심히 작업을 하고 있었었었는데요. 그 이후에 제가 근무하던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했었고, 그 후로 오랫동안 오랫동안 지속적인 만남을 갖고 있는 작가인데
최근에 최근에 이작가가 외국의 옥션에 나가서 경의적인 가격을 받은 작품으로 유명해졌습니다. 속된말로 가장 잘나가는 작가입니다.


아트 페어라든가 해외 미술 시장에 아주 주목받고 있는 작가가 됐습니다. 여러분 오늘의 현대미술에서 어떤것이 좋은 작품이고 어떤 작품이 비싼 가격에 팔릴까요
많은 분들이 저한테 묻습니다. 현대미술의 질을 판별할수 있는가? 어떤게 나쁘고 좋다고 말할수 있는가? 작업이라고 하는게 그 작가가 좋아서 하는 건데 이건 좋고, 저건 나쁘다고 쉽게 말할수 있는가?
혹은 미술 시장에서 도대체 어떤 작품이 왜? 무슨 이유때문에 팔리는가? 라고 질문 합니다.
한국 미술계에서 작품이 팔리는 경우들은 물론 작품이 좋아야 되겠지만 그것보다는 사실은 작품 외적인 요소들이 굉장히 큽니다.

 

어느 대학을 나왔는가? 유학은 갔다 왔는가? 무슨 대학에 교수로 있는가? 어디에서 수상을 했는가? 또는 그 작가의 집안이 어떤가? 집안이 좋은가?
그 집안 사람들이 이 작가의 작품을 사둘수 있는 경제적인 능력이 있는가 없는가란걸 따져서 화랑들이 대게 작가를 선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혹은 또는 화랑들이 화상들이 좋아하는 작가는 우리나라의 경우는 아주 달콤하고 장식적인 그림들. 걸어서 보기 좋은 것들, 꽃그림들, 풍경들 뭐 그런거라고 생각 됩니다.
아니면 아주 정교하게 그린 극사실적인 그림들 또는 놀라운 연금술사적인 솜씨를 발휘해서 물질을 매력적으로 만들어 놓은것, 그러한 인테리어적인 측면들이 한국 화단에서
주로 잘팔리는 작업의 목록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외국의 경우는 외국의 중요한 아트 페어라든가 미술 시장에 나갔을때는 사정이 달라집니다.
작가의 경력이나 이력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작품의 질이겠죠. 퀄리티겠죠. 질에 대한 엄격한 논의와 분별속에서 한 작가의 작품은 논의가 됩니다.
외국 미술시장에서 좋은 작품이라고 규정되는걸 이 작품이 지금까지 우리가 이해했었던 미술에 대한 생각을 얼마나 새롭게 혁신 시키고 있는가
얼마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가 이작의 테크닉은 어떤것인가? 이런 것입니다. 현대 미술에서 중요한 작품으로 논의되는 것은 그 작가가 하나의 작품을 통해서
지금까지 있어 왔었던 미술에 대한 생각과는 다른 어떤 흥미로운 생각을 전개해 줬을때 그리고 그것을 가장 매력적인 물질의 상태로 보여 줬을때 의미를 부여 받습니다.
그런 작품이 좋은 작품으로 논의가 되겠죠.

 
이작품은 여러분 보시면 알겠지만 점망으로 되있거나 칸칸히 쪼개져있는 것인데 많은 이미지가 있는것 같죠?
그러나 겉으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얼굴입니다. 그러나 박정희 전 대통령 얼굴의 초상이라고 보기엔 약간 픽셀 이미지화 되어있죠
오늘날 디지털 영상 시대의 보편적인 이미지가 픽셀 이미지죠. 근데 박정희 전 대통령 얼굴의 칸칸이 그려진 부분을 자세히 보시면 그안은 수없이 많은 김일성입니다.
이 그림은요 겉으로 봐서는 박정희지만, 조금 가까이 가서 보시면 박정희는 다 사라져 버리고 수없이 많은 김일성만 나타나겠죠.
다시 뒷걸음질 쳐서 보면 김일성은 사라져 버리고 박정희만 나타나겠죠. 둘다 공통점은 죽은이들입니다.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누구나 다 대번에 알수있는 대표적인 아이콘들이겠죠
한편으로는 6,70년대의 박정희와 김일성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했었을거 같습니다. 북한이라는 체제를 지배하는 김일성과 남한 사회를 지배했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관계들은
묘하고 묘하게 아이러니컬한 관계라고 생각됩니다. 박정희 속의 김일성, 김일성 속의 박정희겠죠
그와 동시에 이 이미지는 한눈에 척 알수 있는것이 아니라 이것이 였다가 저것이 였다가 합니다.

 

여태까지 여러분 회화라고 하는건 대게 한눈에 탁 보면 한눈에 알수 있잖아요 그러나 이 그림은 절대 그렇게 알수 없다는겁니다.
박정희라고 보는 순간 김일성은 지워져 버리고 김일성을 보는 순간 박정희는 지워져 버리는 순간 순간 기억 상실증 속에서 이것이였다가 저것이 였다 즉 어떤 하나의 결정론적 이미지로
국한되지 않는 그런 회화, 이런걸 더블 이미지라고 말해 볼수 있겠죠. 이 그림을 감상하실때는 불가피하게 시간과 거리 속에서 이것이 였다가 저것이 였다를 체감하게 됩니다.
그림을 감상하는데 불가피하게 시간과 거리를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먼 거리에서 한눈에 척하고 걸러낼수가 없다는 얘깁니다.


그렇게 흥미로운 회화에 대한 얘기를 해주고 있기 때문에 이 작품이 해외 미술 시장에서 그토록 3억이나 4억이나 이렇게 어마어마한 가격에 팔리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단지 뭔가를 사실적으로 잘그리거나 실험적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냥 습관적으로 이해했던 그 틀들이 벗어나서 새로운 시각으로 미술에 대해서 이야기 해주는 감동
그와 동시에 우리 한국 사회에서 박정희와 김일성으로 대변되는 한 때의 시간대가 무엇이였는가를 보여주는 그런 중요한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