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 입구 외환은행 본점 건물을 왼쪽으로 끼고 명동성당쪽으로 비스듬히 뻗어 간 명동길을 걷다보면 세월의 이끼가 낡고 앙상하게 묻어나는 3층 건물이 나타난다.이 건물의 2층에는 놀랍게도 딜레탕트 박인환의 흔적을 기억이라도 하듯 「세월이 가면」이라는 간판을 내건 카페가 들어서 있다. 바로 이곳이 6.25 전쟁후 명동 에서 문인들의 사랑방 노릇을 하던 「명동싸롱」이었다.
박인환은 이곳에서 문우들과 어울리다가 계단을 내려와 죽음이 휩쓸고 간 세월의 쓸쓸함을 술로 달래기 위해 맞은편 대폿집 (은성: 당시 새로 생긴 술집이었다.)으로 향했다.
동석했던 가수이자 배우인 나애심에게 노래를 청하자 끝내 빼는 바람에 역시 같은 자리에 있었던 박인환의 친구 이진섭이 제안을 했다.
인환이 니가 시를 쓰면 내가 곡을 붙이겠다고, 그리고 시가 나오자 이진섭은 즉석에서 샹송풍의 곡을 붙여 흥얼겨렸다. 이렇게 「세월이 가면」은 명동의 허름한 대폿집에서 누구나의 가슴속에 있지만 미처 명확한 단어로 규명하지 못한 "그 눈동자와 입술"을 발굴했냈다. 이 시에 대하여 강계순은 평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 박인환, 문학예술사, 1983. pp. 168-171) 1956년 이른 봄 저녁 경상도집에 모여 앉은 박인환, 이진섭, 송지영, 영화 배우 나애심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이 몇 차례 돌아가자 그들은 나애심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졸랐지만 그녀는 좀체 부르지 않았다.
그 때 갑자기 박인환이 즉석에서 시를 쓰기 시작햇다.
그 시를 넘겨다 보고 있던 이진섭도 그 즉석에서 작곡을 하고 나애심은 흥얼 흥얼 콧노래로 그 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깨어진 유리창과 목로주점과도 같은 초라한 술집에서 즉흥적으로 탄생한 것이 오늘까지너무나도 유명하게 불려지고 있는「세월이 가면」이다.
한 두 시간 후 나애심과 송지영은 돌아가고 임만섭, 이봉구 등이 합석을 했다. 테너 임만섭이 그 우렁찬 성량과 미성으로 이 노래를 정식으로 다듬어서 불러, 길 가는 행인들이 모두 이 술집 문 앞으로 모여드는 기상천외의 리사이틀이 열렸다. 마른 명태를 앞에다 놓고 대포잔을 기울이면서 아름다운 시를 쓰고 작곡을 하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며 박수를 보내는 많은 행인들―. 그것은 마치 낭만적인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했다.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은 순식간에 명동에 퍼졌다. 그들은 이 노래를 명동 엘리지라고 불렀고 마치 명동의 골목마다 스며 있는 외로움과 회상을 상징하는 듯 이곳 저곳에서 이 노래는 불리어졌다.
이「세월이 가면」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애절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이 시를 쓰기 전날 박인환은 십년이 넘도록 방치해 두었던 그의 첫사랑의 애인이 묻혀 있는 망우리 묘지에 다녀왔다... 그는 인생을 정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랑도, 시도, 생활도.. 차근 차근 정리하면서 그의 가슴에 남아 있는 먼 애인의 눈동자와 입술이 나뭇잎에 덮여서 흙이 된 그의 사랑을 마지막으로 돌아보았다... 순결한 꿈으로 부풀었던 그의 청년기에 아름다운 무지개처럼 떠서 영원히 가슴에 남아있는 것, 어떤 고통으로도 퇴색되지 않고 있던 젊은 날의 추억은 그가 막 세상을 하직하려고 했을 때 다시 한번 그 아름다운 빛깔로 그의 가슴을 채웠으리라. 그는 마지막으로, 영원히 마지막이 될 길을 가면서 이미 오래 전에 그의 곁에서 떠나간 연인의 무덤에 작별을 고하고 은밀히 얘기하고 싶었다...
박인환은 '세월이 가면'을 쓰고나서 한동안 흥분으로 세월을 보냈다.. 부지런히 원고도 써서 몇 푼 원고료를 받지만 집에 떨어진 쌀을 살만큼 넉넉한 것은 아니었다. 하염없이 쓸쓸한 얼굴로 명동 백작으로 불리던 이봉구와 ‘신라의 달밤’을 잘 부르는 임궁재 등과 함께 국수 한 그릇에 술잔을 비우곤 했다.
불후의 명곡 '세월이 가면'이 완성 되던 날 이진섭과 함께 어디서 그렇게 낮술을 많이 마셨는지얼굴이 붉어가지고 당시 단성사에서 상영 중인 롯사노 브릿지와 케서린 햅번 주연의 '여정'을보고 싶었으나 돈이 없어 못 가고.. '세월이 가면'을 애처롭게 술집에 앉아 불렀다. 그리고 사흘 후 친구인 김훈 한테 자장면 한 그릇을 얻어먹은 박인환은 술에 만취되어 집에 와 잠을 자다가 31세로 아까운 인생을 마감했다. 세탁소에 맡긴 봄 외투도 돈이 없어 못 찾고 두꺼운 겨울 외투를 그대로 입은 채 였다.
무슨 이유에선지 눈을 감지못하여 부음을 듣고 맨 먼저 달려온 친구 송지영이 감겨주었다. 생전에 그렇게 좋아하던 술을 못 사주었다면서 김은성이 조니워커 한 병을 죽어 누워 있는 박인환의 입에 부었고 다들 울었다. 그의 상여 뒤로 수많은 선후배들이 따랐고 공동묘지까지 따라온
친구 정영교가 담배와 조니워커를 그의 관 위에 부어 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