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중하대의 왕통 계승의 이해는 왜 필요한가?
총 56명의 왕이 존재했던 신라는 왕통 계승에 어
떤 나라보다 치열한 난맥상을 보인다. 그것은 이 나라를 세운 사람의 성씨가 김씨와 박씨와 그리고 석씨 세 개이기 때문이다.
초대 박혁거세로부터 21대 소지왕까지는 사실 왕 이라는 칭호를 쓰지 않았다. 거서간이니 차차웅이나 마립간같은 칭호를 썼다.22 대 지증왕부터 <왕>이라는 칭호를 쓰기 시작하였다.
초기 21왕의 칭호가 어디서 왔는가 하면 바로 신라의 토착 부족의 부족장의 호칭에서 왔다고 한다. 그만큼 신라는 당 나라와의 교류가 두절되어 있었다
김춘추의 무열왕(29대) 등극은 비교적 순조로왔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적으로 치루어져야 하는 순서는 아니었다.
신라 삼국통일의 바탕을 마련한 24대 진흥왕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으니 맏 아들은 은륜이었고, 두째 아들은 사륜이었다. 진흥왕은 아버지 법흥왕과 더부러 불교에 너무나 탐닉하여 자신과 아들들의 이름을 불교식으로 지었다. 은륜이니 사륜이니 할 때 <륜>은 불교의 핵심사상인 윤회에서 따온 것이다.
당연히 은륜이 세자가 되었으나, 그는 일찍 죽어 버렸다. 진흥왕의 사후, 세자의 아들인 진평왕이 승계하지 못하고 진흥왕의 두째 아들인 사륜이 등극하여 25대 진지왕이 되었다.
진지왕이 재위 4년째 접어들 무렵 진흥왕의 맏아들 즉 죽은 은륜의 아들이 쿠데타를 일으며 삼촌을 내
쫓고 등극하니 이 사람이 26대 진평왕이다.
그래서 무열 계 내에 두 파벌이 생겼다. 진평 계와 진지 계가 그것이다. 진지는 권좌에서 물러 났으나, 아들이 영특하였다. 그가 대장군 김용춘이다. 진평왕은 두째 딸을 용춘에게 주어 아들을 낳게 했는데, 그가 바로 김춘추이다. 용춘은 신라군의 백제 진공 때 선봉장을 맡았던 역전의 용장이었고, 상대등 병부령 시중을 겸임한 막강한 실력자였다.
진평왕의 맏딸이 선덕여왕이 되고 사촌 조카가 진덕여왕으로 되었으나 역시 아들이 없어서 후계자가 없었다. 그러나 선듯 김춘추를 왕으로 옹립할 수는 없었다.
당시 조정에는 이사부, 거칠부, 알천 등 대단한 세력을 가진 역대 상대등들이 있었다. 이들의 세력과 권력은 막강한 것이었다.
여러 지방 호족들이 모여 세운 나라가 신라였다. 28대 진덕여왕이 죽었을 때 차기 왕으로 제일 먼저 거론된 사람은 상대등 알천이었다. 알천의 말에 누구든 반대를 개진할 사람이 조정에는 없었다.
그러나 다행이도 알천은 "자신은 이미 늙었으니 연부역강한 춘추공을 왕으로 세워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춘추는 알천의 추천을 받고서도 세번이나 왕위 계승을 사양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있다.
용춘, 춘추 부자가 삼국통일 전지작업에 끼친 영향은 당시 조정에서는 누구도 부인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진흥왕 은륜 진평 선덕 진덕으로 이어지는 진평계에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삼국통일 이전 벌써 백제와의 수십차례 항전에서 연승을 거두고 있던 대장군 김유신 계의 지원도 있어서, 춘추는 드디어 29대 무열왕으로 등극하였다.
신라 후대의 정치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통일의 영웅들인 무열왕(29대)과 문무왕(30)의 혈통이 끊어지고,무열계의 마지막 왕인 혜공왕(36대)이 피살된 후, 상대등 김경신에 의해 추대되어진 선덕왕(37대, 선덕여왕이 아님)이 무열계인 김주원에게 양위하려 하다가 김경신에게 피실되고 경신이 즉위하여 원성왕(38)이 되었음을 잘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무열계를 회복시키려는 김주원, 김헌창, 김범문 3대에 걸친 반란은 잔인하게 진압되었다. 진압된 김헌창의 난으로 참형에 처해진 사람이 250명이 넘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있다.이후 무열계는 신라왕통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56대 마지막왕까지 왕을 한 명도 내지 못한다.
38대 원성왕은, 17대 내물왕의 두 째 아들로서, 성골에서 밀려 왕통과 멀어진지 근 200년만에 무열계를 제치고, 힘에 의해 왕위에 등극하였다. 그의 어머니가 혁거세 집안인 박씨 계열이라, 원성왕 이후 무열 계 보다 오히려 혁거세 계가 재기하는(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55대 경애왕등) 계기가 되었다.
왕통계승이라는 관점에서 성골만이 가능하다. 성골이라 함은 왕의 직계 아들과 딸을 말함이다. 조카라든가 삼촌은 벌써 진골로 밀려 왕위 계승의 자격이 없다. 진평왕의 자식으로는 딸인 선덕밖에 없었으니 그녀만이 성골이었다. 이것이 선덕이 왕위에 오른 이유이다.
원성왕 계의 잔인한 무열 계 박멸정책은 그후 철저하게 추진되었다. 그러나 무열계인 김주원 김헌창의 반란 이후 무열계의 왕위복귀 작전도 치열히게 추진되었다.
이런 왕위 쟁탈전 양상에서 희생된 사람이 장보고 이다.
장보고 희생의 과정을 보면 원성왕 계의 분파된 인겸 계와 예영계의 다툼이라기 보다도, 오히려 범 원성계와 무열계 잔존 세력과의 다툼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원성왕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인겸과 예영이었다. 두 아들 다 왕이 되지는 못했으나, 이들의 아들들이 대거 즉위하였다. 인겸 계에서는 39대 소성왕,40대 애장왕, 41대 헌덕왕, 42대 흥덕왕이 그들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왕을 내지 못했던 두째 아들 예영 계의 제륭이 42대 흥덕왕(수종)을 죽이고 등극하니 이 사람이 43대 희강왕이다.
그러다가 인겸계인 김명이 희강왕을 죽이고 등극하니 이 사람이 44대 민애왕이다.
김명과 대결했던 김양(무열계)이, 장보고에게 도망쳐 도움을 요청하였다. 김양의 도움을 받았던 장보고가 민애왕을 죽이고 세운 사람이 예영계인 45대 신무왕이다.
왕권은 다시 예영계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장보고는 신무왕을 추대하면서 자신의 딸을 왕비로 삼을 것을 약속받았고, 그럴 경우 그는 6두품에서 벗어나 진골이 되면 왕으로 등극할 수도 있었다. 그는 왕위에 야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무왕은 자신의 아들인 문성왕(46대)에게 양위하였고, 문성왕은 자객을 보내 장보고를 제거해 버렸다. 성골이 아닐 뿐만 아니라, 진골도 아니고, 가장 경계하는 김양 등 무열계 잔존 세력과 가까운 장보고를 살려둘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45대 신무왕(김우징) 이후 예영 계는 다시는 인겸계에게 왕위를 빼앗기지 않고,46대 문성왕, 47대 헌안왕, 48대 경문왕으로 이어지며, 경문왕의 세 아들이 계속 등극하여 49대 헌강왕, 50대 정강왕, 51대 진성여왕까지 온다.
진성여왕에서 대가 끊어진 예영계는 진성여왕의 오라비인 49대 헌강왕의 아들인 52대 효공왕을 옹립하고, 다시 대가 끊어진 예영계는, 자신들 계보의 원조인 원성왕의 어머니인 박혁거세 집안에서 53대 신덕왕을 옹립한다. 54대 경명왕과 55대 경애왕은 계속해서 박혁거세 계며, 마지막 왕인 경순왕은 다시금 예영계 원조세력인 45대 신무왕의 아들인 46대 문성왕의 아들이다.
결국 신라의 왕통은 삼국통일의 초석을 놓은 진흥왕의 두 계보 진평왕 계와 진지왕 계의 싸움에서 결국 진지왕 계의 승리로 무열계가 탄생했으며, 이후 무열계가 8왕 130년을 지배하다가, 여기에 도전한 원성계와의 싸움으로 몰락하고, 원성계 내에서 인겸계와 예영계의 싸움에서 예영계의 승리로 이어져갔다고 볼 수 있다.
신라는 왕조국가이기 때문에 왕권의 정확한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면 전체 신라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따른다. (재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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