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불기 2554년 부처님 오신 날이다.
여러 사찰에서는 봉축 법요식을 갖고 이 날을 기린다.
문득 얼마 전에 입적하신 법정 스님이 생각나
‘홀로 사는 즐거움’ 중 ‘행복은 어디 있는가’를
작년 일본에서 오신 이모님을 모시고 갔던
관음사 사진과 함께 올린다.
♧ 행복은 어디 있는가 - 법정 스님
여기저기서 꽃이 피었다가 지더니 이제는 온 산천이 신록으로 눈이 부시다. 나무마다 달리 제 빛깔을 풀어 펼쳐내는 그 여린 속 얼굴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신록은 그대로가 꽃이다.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 찬란한 화원이다.
내 오두막 둘레는 아직 꽃 소식이 없다. 얼마 전까지도 눈이 내려 응달에는 아직 잔설이 있다. 5월 초순쯤에야 벼랑 위에 진달래가 피어날 것이다. 얼음 풀린 개울물 소리에 귀가 시리다.
최근 한 잡지사에서 ‘행복의 기준은 무엇인가?’ 라는 주제로 대담을 해 달라는 청이 있었다. 산과 들에 새잎이 눈부신 이 생명의 계절에 행복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도 그 조화에 한몫을 거드는 일이 될 것이다.
행복의 기준이라니, 행복에 어떤 기준이 있단 말인가. 만약 행복에 어떤 기준이 있다면 그건 진짜 행복일 수 없다. 수많은 사람이 저마다 다른 환경과 상황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어떤 기준(틀)으로 행복을 잴 수 없다는 말이다.
내 식으로 표현한다면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로 물어야 한다. 행복은 문을 두드리며 밖에서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서 꽃향기처럼 들려오는 것을 행복이라고 한다면, 멀리 밖으로 찾아 나설 것 없이 자신의 일상생활에서 그것을 느끼면서 누릴 줄 알아야 한다.
철이 바뀔 때마다 꽃과 잎과 열매를, 바람이 숲을 스치고 지나가듯이 무심히 바라보고 있으면 내 안에서도 어느새 꽃이 피고 잎이 펼쳐지고 열매가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안과 밖이 떨어져 있지 않고 하나가 되면 모든 현상은 곧 우리 내면의 그림자다.
아침 일과를 마치고 나면 두 개의 화분 곁으로 다가가서 ‘잘 잤는가.’라고 문안 인사를 건넨다. 지난 입춘날(2월 14일) 밖에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꽃시장에 들려 바이올렛 화분을 하나 사왔다. 단돈 천5백 원에. 그때는 정갈하게 핀 세 송이 꽃이 눈을 끌었다. 화분 중에서도 가장 작은 화분이었다.
4월 초에 다시 그 꽃시장에 들러 같은 화분을 하나 더 사왔다. 나야 성미가 괴팍해서 전부터 홀로 떨어져 살기를 좋아하지만 화분은 달랑 혼자서 지니는 것이 외롭고 적적할 것 같아 친구를 하나 데려온 것이다. 가지런히 놓아둔 화분에서는 서로가 겨루듯 활기차게 스무 송이도 더 넘는 꽃들을 저마다 피워내고 있다.
가끔 물 비료 원액에 물을 타서 주고 잎에는 분무기로 물을 뿜어준다. 처음에는 모르고 잎에도 물 비료를 뿌려주었는데 얼룩이 생기는 걸로 보아 식성이 다른 것 같았다. 이 두 개의 화초를 가까이서 보살펴주고 있으면 가슴이 따뜻해진다. 살아있는 것을 가까이 두고 마음을 기울이면 가슴이 따뜻하게 차오른다. 이런 걸 행복이라 하는지 모르겠다. 따뜻한 가슴은 이렇게 밖에 있지 않고 내 안에서 밀물처럼 차오른다.
한밤중에 종종 겪는 일인데, 엊그제도 자다가 기침이 나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낮 동안 미루어 두었던 방 안 일들을 주섬주섬 정리하는 사이에 기침은 멎는다. 정신이 아주 맑고 투명해진다.
촛불을 끄고 벽에 기댄 채 얼음 풀린 개울물 소리에 귀를 맡기고 있으면 아, 맑고 투명한 이 자리가 바로 정토(淨土)요, 별천지(別天地)이다. 이 밖에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가슴이 따뜻해진다.
‘좋고 좋구나.’ 소리 없는 소리가 들린다. 이것을 일러서 행복이라 하는가. 나는 잘 모르겠다.
이래서 한밤중에 나를 깨워준 그 기침에게 때로는 고마움을 느낀다. 옛 어른들이 병고로써 약을 삼으라는 그 가르침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또 얼마 전에 내 오두막에서 일어난 일이다. 내가 천식 때문에 한밤중에 기침을 많이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아는 신도분이 푹신한 의자를 하나 보내주었다. 이 의자의 구조는 앉는 기능뿐 아니라 바른쪽에 달린 나무 손잡이를 조작하면 발을 뻗고 누울 수 있는 그런 특이한 의자다.
몇 차례 써보면서 내 분수를 헤아리게 되었다. 우선 푹신해서 누우면 이내 잠이 들었다. 아주 친절하고 편리한 의자였다. 그런데 날이 가면서 이토록 편리한 의자기 점점 부담스러워졌다. 무엇보다도 오두막 분위기에 커다란 그 덩치가 낯설게 여겨졌다. 그리고 그토록 편리한 의자가 수행자의 분수에 맞지 않았다.
모처럼 산골까지 나를 찾아온 의자한테는 미안하고 미안했다. 의자의 천 갈이까지 새로 해준 호의를 어떤 식으로 사양할까를 두고 이리저리 고심했다. 바로 엊그제 새벽 예불 끝에 내 입선 죽비 소리를 듣고 문득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 떠올라 결단을 내렸다.
그 의자를 왔던 곳으로 돌려보내고 나니 아주아주 홀가분했다. 그 빈자리에서 어떤 충만감을 보았다. 부담스러운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빈자리가 홀가분함으로 채워졌다.
옛날 어떤 스님이 값비싼 향나무 침상을 쓰다가 온 몸에 부스럼 병이 났다. 고생고생 끝에 참회를 하고 겨우 나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자비도량 참법’은 여기에서 유래된 참회의식이다.
육중한 의자가 나를 깨우쳐주기 위해 이 궁벽한 산골에까지 찾아 왔구나 생각하니 그 ‘의자 보살’에게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행복에 어떤 조건이 따른다면 어디에도 얽매이거나 가리낌이 없는 이 홀가분함이 전제 되어야 할 것 같다.
우리가 불행한 것은 외부적인 여건보다도 묵은 틀에 갇혀 헤어날 줄 모르는 데에 그 요인이 있을 것이다. 마음에 걸린 것이 있어 본마음인 그 따뜻함을 잃으면 불행해진다. 마음을 따뜻하게 가져야 거기에 행복의 두 날개인 고마움과 잔잔한 기쁨이 펼쳐진다.
당신은 행복한 쪽인가, 아니면 불행한 쪽인가. 한 생각 크게 돌이켜 다 같이 행복의 쪽에 서기를 비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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