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4일 모처럼 멀리 여행을 하기로 했다.
강원도 최북단에 위치한 양구에 가보기로 했다. 양구는 6.25의 격전지로 너무나 유명한 곳이다. 지금까지 6.25의 흔적이 남아 있을 턱은 없지만 격전지의 지형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올 해 들어 가장 날씨가 추웠으나, 바람이 없어서 날씨는 화창했고, 완벽한 방한 복으로 무장했기에 별로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따뜻했고 아늑하기까지 했다. 승객이 많지 않아서 큰 관광버스를 대절한 기분이었다. 양구행 길은 참으로 쾌적하여 오히려 즐거운 마음이 솟구쳤다.
홍천을 거쳐 양구 인제 속초로 이어지는 동해안행 국도는 최근 크게 보수되어, 강남고속버스터미널 동해안고속도로 강릉 속초로 어어지는 고속도로보다 오히려 더 쾌적하고 가깝다.
찬란한 겨울 햇살을 정면으로 받으며 동으로 달리는 탓일까, 아니면 가끔 한강 줄기를 오른편으로 끼고 달리는 탓일까, 큰 뻐스의 차체는 아침을 뚫고 솟아오른 햇살을 받아, 무슨 발광체처럼 찬란한 햇살의 반사광을 발했다.
나는 잠이 들었다.
2시간 40분쯤 달려 양구에 닿았다. 양지바른 곳이라 양구라 했던가, 험준한 산간에 파묻힌 소읍에는 겨울 햇살이 가득했다.
춘천과 양구 사이를 소양강이 가로막고 있어서 교통이 아주 불편했으나, 최근에 소양강교가 건설되어 시간이 많이도 단축되었다.
소양호의 겨울 풍경이 쓸쓸하기도 하지만, 한결 고즈넉하고 시적이었다. 인적 끊어진 겨울호수의 정치가 우리를 맞아주었다.
소양교를 지나 20분쯤 달려서 양구읍내에 닿았다.
한국사람은 누구나, 특히 우리 세대는 적어도 희미하게나마 6.25의 기억을 가지고 있기에, 적어도 이 민족적 최고 비극인 6.25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여기 양구의 지형과 산세를 조금은 이해해 두는 것이 옳은 일일 것이다.
양구의 서북쪽으로는 백석산이 있으며 철원과 이어져 있고, 서남쪽으로는 파로호를 사이에 두고 화천과 이어져 있다. 파로호는 중공군 3만명을 수장시킨 6.25의 격전지인데, 사실은 일군이 대륙침략을 준비하기 위해 만든 인공호수였었다.
얼어붙은 강의 수면위로는 가교가 설치되어 있었고 여기서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파로호의 이름을 지은 사람은 이승만이었는데, 파로호 서편 기슭에는 이승만 별장터가 있다. 포로를 삼만명이나 격파했다는 뜻이라고 했다.
동북쪽으로는 북으로부터 가칠봉, 펀치볼, 제4땅굴, 대우산, 도솔산, 대암산 등 해발 1000미터 이상의 험준한 산들이 남쪽을 향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들 산의 연봉들 아래, 6.25 최고 격전지인 펀치볼과 피의 능선과 저격 능선이 펼쳐져 있고, 이어서 양구 읍내가 흩어져 있다.
양구 동편은 인제이고, 남쪽은 소양강을 사이에 두고 춘천이다.
민물 매운탕으로 점심을 들고 안내를 받으며, 양구 출신인 만고의 화가 박수근 기념 미술관으로 향했다. 가장 한국적인 그림을 그렸기에 사후에 가장 늦게 진가를 인정받았던 화가, 박수근의 작품은 지금은 완전히 국제화하여, 그림 한점이 40억원을 호가한다.
어떤 미술학교도 다닌 적이 없으며, 무슨 대학의 미술교수 한번 해본적이 없는 박수근이지만 그의 한국적인 화풍은 해방 후 최고의 화가로 추앙받고 있다. 그의 깊은 예술 정신에 가슴을 파고드는 감동을 느겼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영원한 본능이 존재하는한 위대한 창조의 정신을 가진 예술인은 절대로 외롭지 않을 것이다.
기념관은 읍 단위의 소읍 규모를 가늠한다면 초호화롭게 조성되어 있었다. 우리 일행은 그의 동상 앞에서 촬영하였다. 기념관 뒷면 산록에 화가의 부부 묘소가 있다고 했으나 방문은 생략하였다.
우리는 곧장 차를 돌려, 동북쪽 20킬로 지점에 펼쳐져 있는 펀치볼과 4땅굴을 향했다.
펀치볼은 한국에서는 적어도 가장 큰 분지로 치부된다고 한다. 무슨 거대한 사발처럼 옴폭하게 패어진 지형이라 하여 미군들이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펀치라는 말은 화채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펀치볼이 바로 곧장 북쪽으로 제4땅굴로 이어져 있었다. 땅굴 바로 위에 가장 가깝게 북의 현 진지를 살필 수 있다는 을지전망대가 있는데, 가칠봉 연봉이다.
우리나라에는 북한군이 판 네 개의 땅굴이 있다.
제일 땅굴(고량포-서울)
제2땅굴(의정부-포천-서울)
제3땅굴(문산-서울)
그리고 제4땅굴이 있다.(양구-원주-서울)
그러니 4땅굴은 서울의 우회 포위를 위한 군 투입용 땅굴이었다. 이것은 6.25 때 북괴군이 채용한 전술을 답습한 것이다.
1, 2, 3 땅굴은 70년대 발견되었으나, 4 땅굴은 90년대에 발견되었다.
땅굴은 근 2 킬로가 되었으며, 1 킬로 정도는 왕복할 수 있는 십여명 용 전동차가 가동 중이었다.
땅굴 견학을 하고 나오니, 너무나 질펀한 펀치볼이 펼쳐져 있어서 감회가 가슴을 쓸어갔다. 양구는 지금도 6.25의 후유증에 시달릴 정도로 전쟁의 폐해가 극심했던 곳이다. 펀치볼 서편으로는 도솔산이 짙은 음영을 드리우고 있었다.
도솔산 전투는, 미 최강부대 미해병 1사단이 참패를 당하고 포기한 지역을 김대식 대령이 이끄는 한국군 해병 제 1여단이 적 최강 방호산 휘하의 제5군단 소속 인민군 최정예부대 12사단과 32사단을 궤멸시킨 한국전 사상 전설적인 지역이다.
인천 상륙작전 직전 인민군에 의해 감행된 낙동강 전선의 다부동 전투를 제외한다면 아마도 여기 펀치볼 전투가 가장 격전이었을 것이다.
이 미해병 1사단이 바로 비극의 부전강 전투에서 참패하여 흥남 철수를 강행당했던 부대이다.
그러나 미 해병 1사단은 바로 인천상륙작전의 주공인 미 10군단의 주력부대였다.
맥아더의 실착은 여러군데서 보인다.
맥아더는 미 10군단에서 2군단을 빼내 원산상륙작전을 감행한 것이다. 2군단 사령관은 인천상륙작전의 총 사령관 아몬드 소장이었다. 그러나그것은 큰 패착이었다. 원산은 이미 한국군 3사단과 수도사단에 의해 점령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지나간 일이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전의 영웅 맥아더는 사실 전쟁의 천재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한국전을 전담한 미8군에서 맥아더는 미2군단을 독립시켜 아몬드 소장으로 하여금 전담시켜 한반도 동쪽을 맡겼다. 태백산맥이 국토를 산맥을 따라 양분하고 있어서 서부전선의 워커장군에게 지휘를 전폭적으로 맡길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당시 전황을 잘 알고 있는 노병들의 증언에 의하면, 맥아더는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시킴으로써 자신의 명예를 한껏 드높여준 아몬드를 총애하고 총신을 워커에서 독립시켜주고자 했다는 것이다.(백선엽 증언록)
그래서 사실 북진 시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이 따로 놀았다. 부전강 전투에서 미군 최강 해병 1사단이 절반 정도 괘멸된 것은 물론 중공군의 개입이라는 절대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이런 전술의 양분에서도 기인하고 있다고 후세의 전술가들은 이야기하고 있다.
그 탓으로 청진까지 올라갔던 한국군 3사단의 일부 대대가 후퇴의 기회를 노치고 고립되어 적군에게 포위되어 참살 당하는 비극을 났기도 했다.
사진 한장 찍을 시간도 없이 도솔산 전투 기념비앞을 지나쳤으니 이 부실한 후손을 산악의 원혼들은 얼마나 슬퍼하실까.
땅굴 견학을 하고 나오니 해가 벌써 서쪽으로 기우러져, 나그네의 발길을 재촉했다. 60대 중반기의 나그네의 발걸음은 빨라지기만 했다.
귀로에 보니 펀치볼의 거대하고 아늑한 모습이 가슴을 아프게 파고 들었다. 아 여기에 고히 잠드신 원혼들이여 조국을 위해, 못난 후손을 위해 고이 잠드소서. 좋은 나라를 만들어 그대들의 원혼을 위로하겠나이다.
한국전 초기 한국군과 미군의 전선 배치는 대략 다음과 같다.
서부전선에 미 1군단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예하부대로는 미 25사단, 한국군 1사단, 터키 여단
의정부 전선에 미 9군단이 맡고 있었는데, 예하 부대로는 미 2사단과 한국군 6사단이 있었다.
춘천 전선에 국군 3군단이 비치되어 있었는데, 한국군 2사단 5사단 8사단이 예하 부대였다.
동해안 전선에는 수도사단과 3사단이 배치되어 있었다.
한국군 및 미군 유엔군의 전선 배치는 맥아더의 해임 이후 크게 달라진다.
펀치볼 전투는 한국군 3군단(이형근 소장)과 인민군 5군단(방호산 중장)과의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승부였다.
방호산이라는 자는 과거 국공 내전 때 팔로군의 주요 지휘관으로서 모택동의 신임을 받던 자였다고 한다. 한국전 때 인민군 6사단장, 이후 5군단장으로서 김일성의 신임을 독차지 했다. 특히 그는 후퇴시 김무정과는 달리, 일사불란한 지휘체계를 유지한 채 태백산맥을 이용하였기에 인민군의 희생을 최소화 할 수 있었으며, 그는 그래서 전공으로서 이중 영웅칭호를 받았다.
6.25 때만 하더라도 김일성의 독제 체제가 완전하지 못했다. 그래서 연안파와 친러파와의 공존이 필요했다. 그러나 전후, 김일성은 먼저 자신의 지위를 위협하던 연안파의 박일우를 제거하면서 박과 가장 가까웠던 같은 연안파 방호산과 무정을 제거했다.
지략과 모사가 뛰어난 박일우는 모택동 측근으로 조선 내 모택동 세력의 대변자 구실을 하던 자였다. 그는 6.25가 한창이던 52년 10월까지만 하더라도 내무상을 유지하였으며, 중공군과 인민군의 소위 연합사령부에서 총 사령관 팽덕회에 이어 부사령관으로 활약했다.
그의 권력은 김일성에 비견할만 했다. 그러나 김일성의 노련함에 몰려 갑작스레 내무상에서 체신상으로 좌천됨으로써 그의 전성기가 갔고, 이어 반당분자로 몰려 처형되었다.
이형근은 군번 1번으로 우리 고향 사람이다. 김천 사람으로 6.25 중 참모총장에 올랐던 분으로 한국의 나폴레옹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 육사를 한국인 최초로 졸업한 분으로 건군의 영웅이다. 전후 주영 대사를 10년 이상 지낸 분이다.
4시 50분에 양구로 돌아와 춘천행 뻐스에 몸을 실었다.
춘천에 도착하니 근 6시가 되어 있었다.
드높은 성가를 가지고 있는 춘천 막국수를 현지에서 먹어보니 별미였다. 서울에서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춘천 막걸리를 곁드리니 하루의 피로가 완전히 풀리는 것 같았다.
남춘천 역에서 청량리 행 비둘기호를 탔더니, 텅 텅 빈 자리였으나 케이 티 엑스 못지 않은 깨끗한 좌석에 난방이 좋아 아주 쾌적하였다. 우리가 생각하는 지난 간 세월 속의 비둘기 호가 아니었다. 9시에 어둠과 한기로 채워진 춘천을 떠나 23시에 청량리에 도착하였다. 6.25의 총성이 머리 속에서 계속 반추되는 듯했다.
나는 눈이 나빠 군에 가지 못했으나(네번 무종 끝에 다섯번째 병종 판정을 받았다), 6.25 관련 장편 소설을 두 편이나 썼다. <두 아내)(상,하)<도서출판 찬섬 간>와 (바람의 여인)<실천문학사 간>이 그것이다. 다시 한편을 더쓰고 싶다. 그래서 이번 여행을 한 것인가.
'文學산책 마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복이라는 나무 (0) | 2009.01.18 |
---|---|
바다여 당신은/ 이해인 (0) | 2009.01.18 |
용서의 계절/ 이해인 (0) | 2009.01.18 |
겨울 노래 (0) | 2009.01.17 |
[스크랩] 그 여자네 집 / 김 용택 (0) | 2009.0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