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10월 26일은 1909년 안중근(安重根·1879~1910) 의사가 중국 하얼빈(哈爾濱)역에서 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지 99주년이 되는 날이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발사된 그의 총탄은 역사의 흐름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의거 100주년을 1년 앞둔 지금, 그 의미를 새롭게 재조명하는 작업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열강 제국주의의 힘이 절정으로 치닫던 1차 대전 직전의 세계사에서, "그의 총탄이 절규하고 있었던 것은 다름아닌 '동양의 평화'였다"는 것이다.
"안중근을 '한국 독립운동의 영웅'으로만 본다면 많은 것을 놓치게 된다." 중국 하얼빈시의 안중근 전문가인 재중동포 서명훈(전 하얼빈시 민족종교사무국 부국장)씨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식민지 피압박 민족을 대표했으며, 동양평화의 교란자를 처단함으로써 아시아의 평화에 이바지한 '세계사적인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 ▲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체포된 뒤 의연한 표정으로 사진기를 응시하고 있는 안중근 의사. 조선일보 DB
'한국독립운동사 사전'(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의 '안중근 의거' 항목을 집필한 장석흥 국민대 교수도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포살은 한국침략의 원흉 및 동양평화의 파괴자에 대항하여 인간의 자유를 지키려는 정의의 응징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1909년 10월 26일의 그 '저격'은 단순한 '암살'이 아니라 침략에 항거하는 '평화'의 메시지였음이 다시 주목 받고 있다.
◆"일제 침략 저지 위한 하얼빈 대첩"
안중근·하얼빈학회(공동회장 이태진·조동성)와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김용덕)이 최근 열었던 국제학술회의 '동북아 평화와 안중근 의거 재조명'은 "안중근 의거가 단지 한국인의 항일운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북아의 평화정착을 위한 대 선언이었다"는 취지로 안중근의 사상을 재조명했다.
이태진 서울대 교수는 기조발표 '안중근의 하얼빈 대첩과 평화주의'를 통해, 안중근이 옥중에서 썼으나 미완성으로 남겨진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에 주목했다. 여기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로 대표되는 일본의 소위 '동양평화론'은 사실상 일본이 내세운 침략의 구실에 불과한 것이라고 통박했다. 동양은 러시아의 위협 아래 놓여 있으며, 그에 대한 대책은 "일본이 나서서 한국을 보호국화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중국과의 공조 협력을 통해서 달성할 일"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안중근의 국제적 인식은 무척 거시적이었다. 그는 세계사가 서구 열강과 이를 모방한 일본에 의해 약육강식의 형태로 전개되는 것에 대해 강렬한 비판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도덕주의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동양의 나라들이 스스로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 침략정책을 기획한 이토를 반드시 처단해야 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로 치부하는 인식은 한국 근대사 자체를 훼손하는 위험한 발상이다. 한 개인의 의거가 아닌 '의병부대 조직의 지휘관'으로서 행동한 것이기 때문에 '하얼빈 대첩'으로 불러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공용화폐 쓰는 평화도시를"
"안중근은 이미 100년 전에 21세기에나 가능한 동북아 평화체제를 구상한 사상가이자 그 구체적인 실천방략까지 고민한 실천가였다." 이 회의에서 '안중근의 국제정세 인식과 동양평화론'을 발표한 서영희 한국산업기술대 교수는 "안중근은 또한 문명개화를 통해 실력을 닦는 것이 한국 독립의 전제조건이라고 생각한 문명개화론자이면서, 일본의 보호정치가 한국의 문명개화가 아닌 국권침탈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바로 무장투쟁의 선두에 나선 행동가"라고 평가했다.
동양평화를 위한 안중근의 구체적 구상은 지금의 관점으로서도 대단히 새로운 것이었다. 우선 일본이 뤼순(旅順)을 청나라에 돌려준 뒤 한·중·일 3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군항으로 만들어 세 나라에서 대표를 파견하고 평화회의를 조직한다는 것이다. 그곳에는 3국 청년으로 구성된 군단을 편성하고 이들에게 2개국 이상의 언어를 배우게 하며, 은행을 설립하고 공용 화폐를 만들자는 주장이었다. 21세기 유럽연합을 연상케 하는 개념이 이미 안중근의 사상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