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저녁 서늘한 바람이
높은 하늘에서 가을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미풍에 찰랑이는 풍경소리를 들으며 산문山門을 나서려는데 댓돌을 내려서며 합장하는 비구의 모습에 눈물이 납니다. 바래서 더욱 정갈하고 단아해 보이는 잿빛 승복의 아름다움! 고독을 승화시킨 수도승의 삶이 아니고는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이 내 영혼 깊은 곳을 흔듭니다. 이 순간 앙드레 프로사르의 말이 떠오릅니다. “사제란 타인이 고독하지 않도록 자기 스스로 홀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사제들께 고독을 요구하신 하느님의 뜻을 신부님은 알고 계십니다. 오직 앞만 보고 걸어야 하는 고독의 깊이, 그 깊이만큼 소외된 우리들이 위로받는다는 사실도 알고 계십니다. 로만 칼라의 정결한 고독을 바라볼 때마다 우리가 눈물 없이는 감당할 수 없는 예수님의 사랑을 확인케 된다는 사실도 신부님은 알고 계십니다. 사제의 고독이 아니고는 우리가 갈 수 없는 평화의 나라! 사제의 고독이 아니고는 우리가 꿈꿀 수 없는 구원의 나라! 이런 말로는 사제들의 고독이 우리게 주는 위로를 표현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이 고결한 고독은 예수님의 고독이며 예수님께서 사제들의 고독을 통해 나날이 당신 현존의 기적을 드러내 보여주신다는 사실 또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수단은 선택받은 자의 은총을 상징하며 로만 칼라는 예수님의 고독을 상징합니다. 성당 뜰에서,횡단보도에서 신부님을 뵌 적을 헤아려 봅니다. 신부님께서 로만 칼라 셔츠를 입으신 모습을 뵐 수가 없었지요. 제 당돌했던 그날의 질문을 지금도 기억하고 계신지요? “신부님, 왜 로만 칼라 셔츠를 입지 않으세요?” “로만 칼라? 그건 신부들 목에 걸린 칼이지 …” 독백처럼 들렸던 여운의 창백함이 너무 깊어 대화는 거기서 끝났었지요. 언제 어디서나 로만 칼라의 고독을 원함은 사려 깊지 못함이겠지요? 끊임없이 로만 칼라의 부자유를 요구함은 우리들의 이기심이겠지요?
그러나 신부님, 스산한 가을 저녁 텅 빈 간이역 대합실에서 로만 칼라 셔츠를 입은 낮선 신부님을 바라볼 때의 설렘! 그 단아한 정결을 바라봄으로써 위로받고자 하는
우리의 고독에 대해 신부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로만 칼라를 바라보는 일만으로도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총에 감사하며 위로를 얻는 우리의 소박함을 신부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바라보는 순간, 허리에 전대도 차지 않고 여벌옷도 없이 길을 떠난 열두 제자의 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신부님께서는 그 순간 우리들 가슴에 차오르는 감동이 하찮은 감상주의라 웃어넘길 수 있으신지요? 왜 신부가 되었느냐 묻자 시리에다 마사유끼 신부가 답했습니다. “…… 신부가 독신이라는 것은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하느님께서는 신부가 철저히 고독하기를 바라셨지요. 철저히 고독한 후에야 비로소 다른 사람의 고독을 찾아내는 눈과 그것을 부드럽게 감싸 안을 수 있는 마음이 길러지는 것이니까요.” 마사유끼 신부님의 답을 음미하며 신부님들께서 철저히 고독하실 수 있도록 평신도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시대에 맞춰 교리도 달라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 목소리로 로만 칼라의 정결을 요구함은 이율배반적이라는 사실도 압니다. 그러나 신부님! 이는 물신주의物神主義가 만연한 길 위에서 인간적인 품위를 잃지 않으려는 우리들의 마지막 절규입니다. 시대의 요구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낡은 제도를 뛰어넘어야 하지만 때로는 옛 것을 되찾는 일에도 주저하지 말아야겠지요. 신부님! 황량한 거리에서 정결로 고결한 로만 칼라의 고독을 바라보며 위로받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렵니다. ― 수필집 <행복한 자기사랑> 중에서 Notti senza Amore(한 없는 사랑) - Kate St Joh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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