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장태욱 기자]제주섬의 모습은 서남단 끝에서 남쪽으로 돌출되어 있는데, 그 돌출부의 동쪽 해안에 '상모리'라는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행정구역상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로 되어있다.
최근에는 송악산과 산방산 일대의 자연절경이 외부에 알려지면서 두 산을 연결하는 해안벨트는 전국에서도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다. 이 와중에 상모리 산이수동 마을과 그 동쪽 사계리를 잇는 도로는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로 중 하나로 꼽히게 되었고, 이런 유명세를 배경으로 이 해안도로 주변에는 펜션과 음식점들이 줄을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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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이 정착하기 까지
이 유적지에서는 구멍무늬토기·돌아가리토기·붉은간토기 등과 더불어 가락바퀴·어망추·뼈바늘 등이 출토되었다. 상모리 일대에서 출토된 이들 유물들은 한반도에서 출토된 6세기 청동기 시대 유적들과 일치한다. 따라서 아직까지 제주도 유적에서 청동이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전문가들은 이 유적을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분류한다.
이 유적지에서는 또, 원통형의 돌도끼·대팻날·끌·숫돌 등이 발견되기도 했는데, 이는 이 시기에 이곳에 정착했던 사람들은 주거지를 만들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다. 6세기경 사람들은 이 주변의 평야와 해안을 터전삼아, 이곳에 주거지를 만들어 정착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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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슬포리는 처음에 서쪽에서부터 제1모슬포리?제2모슬포리?제3모슬포리로 분류하였다가, 이들이 상·중·하 모슬리로 개칭 되었고, 그 뒤 1749년경 중모슬리는 폐지되었다. '상모리'라는 이름은 일제시대에 상모슬리에서 '슬(瑟)' 자가 떨어져 만들어진 이름이다.
상모리는 현재 이교동과 산이수동을 포함하는 1리와, 대동과 서상동을 포함하는 2리와, 중하동과 서하동을 포함하는 3리로 나눠져 있다. 2007년말 기준으로, 상모1리에 316가구 844명이, 2리에 721가구 1983명이, 3리에 415가구 1089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상모리 마을 남쪽에는 '알뜨르'라고 불리는 너른 평야지대가 있다. '알'은 아래를 의미하고, '뜨르'는 마을 혹은 동네를 의미한다. 주민들은 알뜨르 평지에서 마늘?감자?보리 등을 재배하며 생활을 영위한다. 이 농작물중에서도 특히 대정지역에서 생산되는 난지형 마늘은 연간 생산량이 5000톤에 이르러 전국 생산량의 10%를 차지할 정도로 그 비중이 높고, 그 품질 또한 우수하다고 평이 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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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뜨르 군데군데에는 원통모양의 구조물이 눈에 보인다. 2차 대전 말기인 1943년에 일본군이 만든 비행기 격납고다. 이 격납고는 공군 비행기를 점검 혹은 수리하거나 보관하는 장소로 쓰였다. 당시 일본군은 이 일대에 격납고 20동을 지었는데, 그중 현재 19동이 남아있다.
비행기격납고가 있는 곳에서 해안에 가까이 이르면 넓은 초지가 펼쳐진다. 경작을 포기해서 방치된 농지로 보이는데, 가까이 가보면 일제시대 만들어진 알뜨르비행장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이 비행장은 1930년대 중반에 일본군이 해군비행기지로 활용했던 것으로, 지금은 대한민국 공군 소속으로 되어 있지만,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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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군경당국은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예비검속자들을 색출했다. 당시 당국은 모슬포 경찰서 관할지역에서 색출된 예비검속자들을 모슬포 절간고구마 창고와 한림지서 관할 어업조합 창고에 수감했다. 그리고 이들을 1950년 7월16일 새벽에 20명을, 8월 20일에 새벽 2시경에 한림수감자 60여명을, 같은 날 새벽 5시에 모슬포 수감자 130여명을 송악산 '섣알오름'에서 총살하고, 그 시신을 현장에 집단 암매장했다.
1956년에 이르러서야 유가족들은 시신을 수습하여, 한림에 수감되었던 자들의 시신은 금악리 '만벵디 공동묘지'에, 모슬포에 수감되었던 자들의 시신은 섣알오름 근처에 있는 상모리 586-1번지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址)에 안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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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알오름에 서서 당시 참극이 일어난 현장을 보고 있노라니, 어디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당시 일어난 일들을 연상하기 때문에 환청이 들린 것으로 생각했는데, 가만 들어보니 진짜 총소리다. 알뜨르비행장 인근 사격장에서 군인들이 사격연습을 하는 소리였다. 1950년 그날 들었던 총소리를 생각해도 소름이 끼칠만한데, 주민들은 이후에도 수십 년 동안 저 총소리를 참고 들으며 살아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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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가 장난친 아름다운 곳, 송악산
알뜨르를 지나 백호 임제가 일찍이 '참으로 조화가 장난친 곳'이라고 감탄한 바 있는 송악산을 올랐다. 모슬포의 동쪽 해안선은 남쪽으로 길게 뻗어 곶을 이루고 있는데, 송악산은 그 곶 위에는 솟아 있다. 마치 상모리의 평야가 남쪽으로 내닫다가 바다에 다다를 즈음에 언덕을 넘은 후, 땅이 끊겨 바위 절벽을 이루는 형세를 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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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모리를 방문한 참에 전국농민회 제주도연맹 허창옥 위원장을 만났다. 허위원장은 상모리1리에 속한 이교동에 살면서, 밭농사를 1만평 정도 짓고 있다. 전에는 대정농협의 감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허 위원장과 오래전부터 농민운동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마을을 방문하고서야 만남이 성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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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위원장에게는 부인과 더불어 1남 2녀 가족을 거느린 40대 가장이다. 생활비도 적잖이 들 것으로 생각되는데, 농사를 짓는 입장에서 경제적 형편이 어떤지 궁금했다. 이 궁금증에 대한 그의 대답이다.
"10년 전에는 20kg들이 요소비료 한 포 가격이 5000원 정도였는데, 지금은 2만원이 넘습니다. 영농비가 4배 정도 상승한 셈입니다. 그런데 농산물 가격은 10년 전과 같거나 그보다 못한 형편입니다. 저도 작년까지는 농사를 2만평정도 짓다가 최근에는 영농비를 감당할 수 없어서 규모를 줄였습니다."
농가부채가 농촌의 심각한 사회문제이기에, 미안함을 무릅쓰고 허위원장 개인이 지고 있는 농가부채가 어느 정도인지 물었다.
"연말이 되면 그해 수입과 지출을 비교해보는데, 한 번도 수지를 맞출 수가 없었습니다. 작년에도 지출이 소득을 크게 앞질렀습니다. 이러다보니 21년 농사 끝에 빛만 2억이 남았습니다. 제가 가진 농지 3000여 평과 집을 팔고 부채를 갚으면, 총 자산이 제로가 될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농지를 다 팔아도 부채를 갚을 수 없는 농민들이 제 주변에 너무나 많다는 점입니다."
갈수록 부채가 불어나는 상황에서도 농사를 지어야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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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과 농촌을 지켜야하는 일이 사회에 꼭 필요한 일이라고 하지만 농민들이 수지를 맞추지도 못해 빛에 허덕이는 상황에서는 이웃들에게 농사를 짓자고 권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런 과제에 대해 허위원장은 친환경농업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농약?비료의 가격이 하루가 다르게 폭등하고, 이 비료와 농약에 의해 땅과 농민이 모두 병들어가는 상황입니다. 그간 농사를 지어 터득한 결론은 친환경이 아니면 다함께 몰락한다는 사실입니다."
허위원장은 아직 국내 농산물 시장에서 제대로 된 유통구조도 마련되지 있지 않고, 친환경농산물 시장도 너무 작아 아직 가야할 길이 멀다고 말했다.
"농산물 총 수요에서 친환경농산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전체의 5%이하입니다. 그런데다가 친환경농산물 유통을 담당하는 업자들이 모두다 규모가 영세합니다. 그러다보니 우리가 생산한 친환경농산물을 처리 난을 겪는 실정입니다. 만약 친환경농산물을 가락동 농수산물도매시장에 상장하면, 헐값에 낙찰되고 맙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자체가 적극적으로 나서야합니다."
친환경농산물유통을 기존의 유통시장에만 맞길 수는 없다는 얘기다. 음식점이나 학교 급식에서는 재료비를 아끼기 위해 값싼 농산물만을 선호하다보니, 친환경농산물의 수요가 늘어나지 않고 유통구조도 제대로 서지 않는다며, 이에 대한 지자체의 역할을 강조했다.
"지자체가 청정 환경과 자영농을 모두 지키겠다는 책임감을 가지고 전향적으로 나서야합니다. 조례로 각 농가에 친환경농산물을 비율을 할당하고, 학교 급식?호텔?골프장?대형음식점에서 이를 의무적으로 사용하게 해야 합니다. 제가 조사해보니 뉴질랜드에서는 이미 이런 제도를 시행하고 있었습니다. 시일이 아주 오래 걸릴지도 모르지만, 농업이 살 길은 대부분 농가가 친환경농산물을 생산하고, 대다수 국민이 친환경농산물을 먹는 데에 있습니다."
이 일대는 사람이 살기 힘들어 '못살포'라 부르던 곳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이 이 일대를 군사 기지화 하면서 주민들을 수탈했고, 4.3의 광풍과 한국전쟁을 겪는 동안 국가 공권력이 주민들을 학살했다.
이제 비료?농약 값이 폭등하고 물가가 폭등해서 영농수지를 맞추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WTO체제가 출범했고, 거기에 이어질 수많은 FTA가 농민들을 다시 고통의 구렁텅이로 내던지기 위해 벼르고 있다. 한 번도 터널을 빠져나와보지 못한 이 곳 농민들에게도 고난의 끝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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