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대한민국 探訪

일제 수탈의 상처 딛고 녹색 쉼터 자라다

鶴山 徐 仁 2008. 10. 13. 17:03


전라북도 군산은 장수에서 출발, 전북 북부와 충남 남부를 굽이굽이 흘러 천리길을 달려온 금강이 서해바다와 뒤엉키는 한 모퉁이에 자리하고 있는 도시다. 한반도 제일의 곡창지대인 호남평야를 끼고 있는 항구라는 이유로 일제 강점기 때 가혹한 수탈로 인한 극심한 궁핍 속에서 고단한 삶을 이어가야 했던 도시이기도 하다.

당시 민초들의 삶은 채만식의 소설 ‘탁류’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지금도 시내 곳곳에는 일제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당시의 아픈 상처를 되새겨주고 있다. 군산 북부 내항을 따라 동서로 길게 누워있는 월명공원도 그 중 하나다.

1899년 군산 개항 이후 일본인들이 1906년 각국공원이라는 이름으로 공원을 조성, 그 위에 서서 침탈의 포만감을 만끽하던 공원은 이제 군산을 상징하는 도심의 숲이자 가장 사랑받는 산책로가 됐다. 그리고 공원 옆구리를 파고든 해망동은 흘러간 시간을 되돌아보는데 어울리는 사색의 공간이다.
 

월명공원은 월명산(101m)을 비롯해 장계산(110m)·점방산(138m)·석치산(98m)·설림산(116m) 등 다섯개의 작은 산과 산 위의 인공호인 월명호수 등으로 구성돼 있다. 동쪽 끝 해망령 전망대에서 수시탑·채만식문학기념비·조각공원 등이 산책로를 따라 이어져 느린 걸음으로도 두 시간 정도면 문학과 생태환경을 다양하게 경험하게 된다.

공원 산책은 주로 서초등학교 앞 흥천사 주차장에서 시작된다. 서초등학교는 배우 한서규가 시한부 삶을 사는 사진관 주인으로 출연한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의 배경이 됐던 곳이다. 흥천사는 일제 때 일본인이 안국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던 일본식 사찰이다. 이후 광복과 함께 군산시 소유가 됐다가 1964년 흥천사라는 이름으로 개창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흥천사 옆으로 난 계단을 따라 오르는 것으로 산책은 시작된다. 계단을 끝에서 오른쪽으로 잠시 발걸음을 옮기면 2층으로 된 콘크리트 전망대를 만난다. 해망령 전망대다. 전망대에 서면 금강의 물줄기가 서해바다와 뒤엉키는 모습과 더불어 그 너머로 서천군이 손에 잡힐 듯 들어온다. 공원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 이곳을 중심지로 만든 이유를 알 수 있다.

발길을 반대로 돌려 비둘기 광장을 지나면 불길이 타오르는 듯한 형상으로 우뚝 서 있는 탑을 만난다. 군산시의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세워진, 수시탑이란 이름의 탑이다. 40여년 전 기술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정교하면서도 웅장한 모습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수시탑을 비켜가는 길은 곰솔·소나무 외에 물오리나무·참나무·아카시아·왕벚나무·은사시나무·동백 등이 하늘을 가리는 원시림 사이로 이어진다. 콘크리트로 포장된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굵은 나무 사이로 보이는 바다의 향연을 감상하다 보면 사색을 겸한 산책을 즐기기에는 큰 부담이 없다.
 
서초등학교와 흥천사 사이의 길에는 해망굴이라는 작은 터널이 있다. 26년 구 시청 앞 도로와 당시 수산업의 중심지였던 해망동을 연결하기 위해 해망령 전망대 아래를 관통해 만든 터널로 길이 131m, 높이 4.5m 규모다. 바닷가와 연결된 터널인 까닭에 입구에 서면 비릿한 갯내음이 코를 간지른다.


차량 통행을 금지한 보행로로 이용되는 터널을 건너면 해망동이다. 군산 내항 선창과 월명공원 사이 비탈에 들어선 해망동은 우리나라 근대화 시기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공간이다. 사시사철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해망동과 관련된 우스갯소리도 만들었다. 푹푹 찌는 여름이면 시원한 바닷바람 덕분에 해망동 주민들은 어디 사느냐는 외지인의 질문을 받을 때면 큰 소리로 “해망동 삽니다”라고 답하는 반면 겨울에는 차가운 바람 때문에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해망동이에요”라고 했다 한다.

한국전행 후 피난민들이 하나 둘 집을 짓기 시작하면서 만들어진 해망동은 비탈을 따라 미로처럼 뻗어나간 좁은 골목길을 따라 다닥다닥 집들이 들어서 있는데, 그 지붕이 하늘과 맞닿을 듯 이어진다. 정말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비탈의 집들을 모조리 훑어야만 산을 넘을 수 있을 듯했다.

바다가 바라보인다 해서 이름붙여진 해망동은 80년대 중반까지 수산업과 합판산업의 활황에 힘입어 군산에서 가장 돈이 많았던 동네였다. 그러나 두 산업의 쇠퇴와 함께 마을의 활기도 점차 사라졌고, 1만 명이 넘던 인구도 3000여 명에 불과할 만큼 줄어들었다.

낡고 쇠락한 공간으로 빈집이 적지않게 눈에 띄지만 구불구불 이어지는 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면 지난 시간과 함께 걷는 듯한 묘한 기분에 빠지고 만다.


군산은 월명공원·해망동 외에 지난 시간의 흔적을 꽤 간직하고 있다. 군산경찰서 인근 경암동 철길마을도 그 중 하나다. 페이퍼코리아에서 군산 내항 사이에 화물을 실어나르기 위해 만든 선로인데 그중 약 500m 구간이 이 마을 뒤뜰을 가로질러 이어진다. 철로에서 집까지 간격은 불과 1m 남짓. 뒤뜰이라고는 하지만 대문이나 출입구가 철로를 향하는 집이 적지 않다.

화물열차가 지나는 시간이면 꼼짝없이 집 안에 갇혀있어야 했던 사람이 적지 않았다는 뜻이다. 철도가 놓여진 이후 집들이 하나 둘 들어서면서 오늘의 모습을 보이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 선로도 흔적만 남았을 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철로에는 녹이 두텁께 끼었고, 마을 주민들은 철로에 세간살이를 말리고 있다. 지난 7월부터 화물열차 운행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군산시는 이 지역을 관광상품화하기 위해 철도 소유주인 코레일과 협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군산=글·사진 박상언 기자 [separ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