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精神修養 마당

[스크랩] 신앙에 대한 명상

鶴山 徐 仁 2008. 6. 25. 18:25

반포 성당이니, 서초성당이니 하는 말은 들어보았으나, 반포 4동 성당이라는 말은 처음 들었다.

성당은 구역제가 되어서 더욱 세분되어 성당이 들어선 모양이었다.

반포성당이나 서초성당은 신자들이 만명이 넘지만, 반포 4동 성당은 6,7천명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반포 4동 성당은, 그 유명한 삼풍백화점이 있던 인근에 자리를 잡았고, 그곳이 강남 최고의 아파트 단지로 개발 되는 통에 그야말로 부촌의 성당이 된 것이다.

가까이 있는 한전 아트 센타에서 이 성당의 본당설정 10주년 기념 여름 나기 음악제가 열렸다.

유아부, 청년부, 청장년부,장년부, 노년부 다들 세대따라 성가대가 구성되어 있었고, 각기 다들 남녀부토 나뉘어져 있었다. 그래서 저녁 8시에 시작한 음악회가 밤 10시 반이 넘어서야 끝이 났다.

장중하고도 경건하며, 영혼을 맑게 하는 선율들이 끝없이 울려 퍼졌다. 과연 강남 최고의 지역에서 사는 사람들의 신앙심과 음악애호의 정신을 이해하고도 남을만 했다.

나를 이 음악회에 초대한 광윤은 나의 생각으로는 아마도 선교의 뜻도 있었으리라. 나는 무교의 신앙이다. 그러니 신앙인이 아니다. 그런 나에게 그리스도에의 신앙을 선보이려 초대했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이 여러 성가대의 성스러운 음악을 들으면서 과연 종교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끝없이 했다.

나는 별 성과도 없는 문학인이다.

그러나 나는 신념과 절대적인 신앙을 가지고 문학에의 집념으로 살아가고 있다.

문학인이란 무릇 인간의 옹호자이고 창조자이며 그리고 지상의 존엄자이다. 그는 자신에게 부여된 인간만의 기능인 상상력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는 존재이다. 이것이 문학이라면, 절대자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존재의 창조자라고 절대적으로 믿는 그리스도교와는 배치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문학은 인간이 최고 절대의 가치를 가진 존재임을 인간의 상상력을 통해 증언하는 자이다.

하기야 베르나노스같은 소설가는 신앙의 문제로서 문학을 한 사람이고 그의 업적도 대단하다. 그의 <어느 시골사제의 일기>는 신앙소설로 성공작이다. 그러나 문학사 속에서는 분명히 신앙의 작가들은 별종으로 특별취급을 한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신의 입장에서 인간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러니 끝없이 하느님과 예수를 찬양하는 이 음악제가 나의 영혼 깊은 곳으로 파고들 리는 없다. 다만 장중하고 영혼을 울리는 선율에 감동할 뿐이었다.

종교는 과연 인간의 삶의 향상에 기여한 것일까, 아닐까 하는 근원적인 생각부터 해보았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한참 주제넘는 것이다. 이 거대한 성당의 조직과 역사를 내가 무슨 힘으로 왈가왈부할 수 있는가.

그러나 나에게는 상상력이란 것이 있고 그야말로 문학인이다. 나름대로의 생각은 없을 수 없다.

16세기 초반 <95개 항의 질문>이란 것을 자신이 다니는 교회의 정문에 내걸고 교회의 세속화에 반기를 든 사람이 마틴 루터이다. 그는 그 성당의 주임사제이자, 그 도시에 위치한 대학의 신학담당 교수였다. 그는 자신이 다니고 있는 성당의 교리에 회의감을 들어낸 것이다. 스위스의 츠빙글러와 프랑스의 칼벵이 루터와는 조금 의견을 달리했지만 교회의 지독한 세속화 정치화에 반기를 들었다. 그들이 한곁같이 지적한 것이 면죄부의 판매였다. 면죄부를 사면 죄인도 죄를 사면받고 천당에 갈 수 있다는 것이 면죄부이다.

영국의 헨리 8세는 교리보다가는 정치적 세력 다툼으로 교황에 저항했다. 자신의 이혼을 허락해주지 않는 교황과 결별하고 성공회를 만들어 새로운 교회를 창설한 것이다.

개신교가 카톨릭교를 대신하여 신자들을 모았다.

그러나 개신교를 이단 자 취급하여 가혹한 종교재판이라는 이름의 잔혹행위가 가해졌다.원래 종교재판이란 이 시기에 유행하던 연금술사나 마법사들을 응징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그리스도 정통 교리에 반기를 드는 소위 말하는 이단자들도 무수히 많이 나타났다.

카톨릭교세가 강한 스페인에서 특히 종교재판이 심했고 선고가 극형이 허다하였다. 종교재판으로 사형을 받은 자가 2000명을 넘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이탈리아와 프랑스 남부 지방에서도 종교재판이 그런대로 집행되었다. 처음에는 사형집행은 세속재판소로 넘겼으나, 차츰 극형을 선고했고, 판사임명권도  교회에서 장악했다.

프랑스를 영국의 발톱에서 구하고, 한 국가의 왕이었으나 왕다운 왕 노릇을 못하고 침략자 영국군에 몰려 르와르 강 이남으로 쫓겨가 있던 샤를르 7세에게 정식으로 프랑스의 왕관을 렝스의 대성당에서 씌워준 사람이 16세의 잔 다크였다. 그러나 그녀는 종교재판의 일종이라 할 수 있는 마녀재판에서 화형 선고를 받고 형장의 한줌의 재로 사라졌다.

마녀 재판이 극성을 부리던 1590년부터 1690년 사이 약 십만명의 마녀 아닌 마녀들이 화형을 당하였다.

종교란 이만큼 무서운 것이다.

내가 여기 서울 시내 한 성당의 10년 설정 기념 음악회에서 느낀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이 정도의 수준과 배경으로 음악회를 열려면 그 조직은 상당한 힘의 비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엄청난의 힘의 축적을 암시한다. 나는 그 점이 놀라웠다. 이제 이 조직 모임은 인간의 신앙의 차원을 넘어 하나의 현대인들의 도시생활의 조직으로서의 그 본질의 변모였다. 거기에 끼어들지 않으면 소외감을 느끼고 서울생활에 불편을 느끼게끔 되어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교회는 서울 시민들의 사교장의 새로운 장소로서의 기능을 조직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 가고, 골프장 가는 것이 성공한 서울 시민들의 새로운 삶의 패턴인 것만 같다.

사랑과 자기 희생으로 성인으로 추앙되는 사람을 믿고 사랑하는 것을 누가 반대하겠는가.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르는 사이, 그 신앙은 여러가지 형태로 변질되게 마련이다. 인간이 하는 짓이니 여러가지 조직이 팽배하였고, 여러가지 교리가 난무하였다.

나는 교회에 가면 하느님과 예수에게 기도하고, 절에 가면 부처에게 보시하고 백번 절을 올린다. 그러니 나는 신앙인 다운 신앙인이 아니다.

요사이 서울 사람들은, 특히 나이가 조금 든 여성들은 교회에서 살거나 골프장에서 산다고들 한다. 어느덧 교회와 골프장이 사교의 중심장소가 되고 말았다. 그것을 좋다 나쁘다는 견지에서 말할 이유는 없다. 그런 경향이 있을 따름이다.

이 분들은 교회와 골프장에서 많은 사교모임을 가짐으로써 사교의 범위는 넓어졌을지 모르지만, 영혼은 역시 불안하다.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게 마련인 상상력을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수동적인 삶의 현장이 교회와 골프장이다. 인간은 독서하고 자신의 상상력을 활용하여 창조하고 실천에 옮기는 삶을 살지 않으면 근원적인 불안은 해소되지 않는다.

밖으로만 내달리지 말고 안으로 조용히 침잠하여 상상력에게 생명의 물을 주어야 한다.

이것만이 인간의 삶의 불안을 불식시키는 방법이다. 교회나 골프는 수동적인 삶의 방식이다.

나는 경건하고 돈독한 남의 신앙을 폄훼할 하등의 의사는 없다.

20세기를 휩쓴 실존주의자들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있다.

 까뮤의 <페스트>라는 소설을 보면, 당시로는 불치병이던 페스트가 오랑이라는 도시를 휩쓸자 정부는 다른 지방으로의 전염을 방지하기 위해 철조망으로 여러겹 도시를 동결해 버린다. 5만의 그 도시인들은 이제 다 죽게 된 것이다. 그러자 도시인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던 판느루 신부는 이것은 신의 노여움이라고 말하면서 무한정 기도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신의 노여움을 풀자고 제의하였다. 그의 말을 듣고 사람들은 죽어라 회개하고 기도하였다. 그러나 하루에도 수백명씩 죽어나가는 역질의 전파를 막을 수는 없었다. 어떤 신도 그들을 구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실존주의자 류는 결국 실험실에서 식음을 전폐한 연구결과 이 역질을 이길 수 있는 혈청을 발견해내는 것이다. 인간이 신을 이긴 것이다. 이것이 실존주의이다. 인간은 자신의 문제를 자신의 의지와 노력 그리고 창의성으로 극복해나가야 한다. 그들의 의미없이 던져진 그 자신의 존재 자체에 깃든 부조리성도.

요즈음 프랑스에 가보면 이상할 정도로 교회가 텅 비어가고 있다. 거대한 석조건물의 교당에 신자가 별로 없는 것을 보게 된다. 신자가 넘쳐나는 한국과는 아주 다른 현상이다.프랑스가 정통 카톨릭국가로서 얼마나 피 흘리며 교권의 유지를 위해 노력하였는가는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보다못한 앙리 4세가 종교의 자유를 선언하지 않았는가(1598). 

그러나 나같은 신앙인의 유형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왜 한 사람의 성인만을 믿어야 하나. 내가 그 때와 장소에 따라 믿고 싶은 성인을 믿어도 되는 그런 신앙은 없는 것일까. 나는 웬지 예수님도 위대하고 부처님도 위대한 것 같다. 나를 선교목적으로 초청해준 광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나는 이런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아직도 그 장엄하고 청정하며 이 속세에

찌들린 죄많은 인간을 위무하는 그 성가대의 노랫 소리가 내 가슴의 바닥을 흔드는  듯하다. 그러나 풍경소리 그윽한 법당에서 울려퍼져 나오는 그 목탁소리는 또 어떤가.

저기 무대 위에서 경건한 찬송가를 부르는 성도들은 이런 말을 하는 내가 야만인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이 좋은 예수를 믿지 않느냐고. 나는 예수의 훌륭함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믿음으로 무장하지 못했을 뿐이다. 중국에서는 주변의 나라들이 얼마나 문명국이냐를 보기 위해서는, 그 나라가 그 나라의 왕을 위히여 백성들이 얼마나 왕화(王化)되었는가를 가지고 판단한다고 한다. 나는 얼마나 문명인가를 판가름 하기 위해서는 웬지 내가 얼마나 그리스도화 되었가를 가지고 따져야 할 것만 같다.

그러나 숭배는 하지만 나는 웬지 그리스도화되지는 않은 것 같다. 내 나이가 더 깊어지면 아마도 나도 그리스도화되지 않을까,아니면 부처화될지도 모르겠다. 

큰 눈으로 불교와 예수교를 비교해 본다면, 철학적이고 명상적이며 초월적인 특징을 가진 것이 불교이고, 현실적이며 인간적이며 세속적인 교리를 가진 것이 예수교이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윤회라든가, 인간이 지켜야 할 각종 계라든가 하는 것이 발달되어 있으며, 그리스도교에서는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도둑질 하지 마라, 거짓말 하지 마라, 이웃집 여자를 건드리지 마라 등의 교리를 요구하고 있다.

인간의 존재론을 보더라도, 불교에서는 그 많은 600개 이상의 경전 어디에도 이 세상의 존재물이 어떻게 누구에 의해 창조되었는지 언급하는 데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시피, 그리스도교에서는 너무나 당연히 세상의 모든 존재물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단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두 종교는 대척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완적인 관계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나같은 절대신앙을 가지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런 유형의 신앙이 허락될 수 있는 여지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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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대사대 부중고1215회 재경동기회
글쓴이 : 정소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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