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응모 전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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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hoto 유창우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 1930년 12월 24일 황해도 벽성 출생
1953년 순경, 철도순찰대(전남 장성군 신흥역)
1968년 주베트남 한국대사관 주재관
1972년 서울 마포경찰서장
1972년 서울 중부경찰서장
1980년 치안감, 해양경찰대장
1982년 치안총감, 치안본부장
1983년 청와대 정무 제2수석 비서관
1984년 충청남도지사
1987년 조달청장
1988년 국가안전기획부 제2차장
1988년 국가안전기획부 제1차장
1990년 내무부 장관 취임
1991년 내무부 장관 퇴임
현 단국대 동창회장
경찰의 말단인 순경에서 시작해 치안본부장, 청와대 정무 수석 비서관, 조달청장, 내무부 장관까지 지낸 안응모(78)씨. 그의 파란만장한 공직기를 담은 ‘순경에서 장관까지’가 출간됐다.
공직자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강조해온 안씨는 현재 단국대 동창회, 황해도민회, 순응안씨 종친회, 자유 시민연대, 안중근 의사 숭모회, 도산 안창호 선생 기념사업회, 국가정체성 회복 국민회의 등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며 지내고 있다.
지난 4월 14일 서울 광화문 코리아나호텔 커피숍에서 만난 그는 “현재 공직에 있거나 공직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과연 공직자의 참된 경쟁력은 무엇이며 올바른 공직자의 자세는 무엇인지 알려주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밝혔다.
안씨는 4·19, 5·16, 10·26, 5·18 등 한국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을 겪으면서도 특유의 공직관과 소신으로 장관직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특히 정권 교체기의 불안정한 상황에서 오직 시험을 통해 총경에까지 승진할 수 있었습니다. 모두 7개의 차관급 이상 국가 또는 지방기관의 보직을 맡아 공정하고 깨끗한 공직사회 구현을 위해 헌신했죠. 때로는 한직으로 밀려 고생도 하고 모함을 받아 고난을 당하기도 했지만 특정 정권에 편향되지 않은 공직관을 지켜왔어요. 제 공직관의 핵심은 사심을 버린 가운데 공정성과 투명성을 겸비한 공직자가 되자는 것이었죠. 이 같은 공직관을 어떤 땐 제 상표처럼, 때론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고자 했던 이유는 공직자가 작은 정부라는 생각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힘없는 사람이 억울함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스스로의 굳은 다짐이 담겨 있었던 때문이죠.”
그는 공정한 인사를 위해 시대를 앞서 순환보직 제도를 시행했고 ‘촌지’나 ‘떡값’을 일절 받지 않았다고 한다. 40년 가까운 공직생활 중 정확히 30년을 경찰로 보낸 안씨는 경찰의 오랜 숙원 사업 중 경찰 조직의 독립, 경찰 독립청사 건립을 해결하기도 했다.
벌목꾼 생활하다 1953년 경찰에 입문
1930년 12월 24일 황해도 벽성에서 태어난 안씨가 처음부터 경찰과 공직자의 길을 걸었던 것은 아니다. 남한으로 내려와서는 교사 생활을 잠시 했고, 6·25 이후 병역을 마치고 생계를 잇기 위해 속리산에서 벌목꾼 생활도 했다. 하지만 벌목상한테 나무를 강탈당했고 결국 산에서 나오게 됐다. “당시는 너무 속상했지만 그런 사건이 없었다면 산속에서 조용히 살았을 겁니다. 그랬다면 지금의 저도 없었을 것이고요.”
그는 1953년 철도경찰 시험에 합격했다. 이후 단국대 법학과를 졸업한 안씨는 1966년에 총경이 됐고 2년 뒤에는 주베트남 한국대사관에 한국인 교민 치안을 담당하는 주재관으로 파견됐다. “베트남이 주권을 양보하면서 저에게 한국 범법자들에 대해 알아서 하라고 했습니다. 그때 대사관에 있는 유일한 경찰이었던 제가 주베트남 한국인 범법자 처리 규정을 만들었죠.”
- 한국에 돌아와서는 마포경찰서장, 중부경찰서장 등을 지냈고 1980년 치안감, 1982년 치안본부장이 됐다. 그는 치안본부장 재임 시절 인성·적성 검사를 도입하기도 했다. 경남 의령에서 한 순경이 20여명을 총으로 쏴 죽인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당시 내무장관이 이에 책임을 지고 옷을 벗었다. “사람은 명예를 좋아하는 부류와 실리를 추구하는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공직에는 실리를 추구하는 부류가 안 맞아요. 인성 검사 때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많이 해서 선별해냅니다.”
이후 안씨는 청와대 정무 수석비서관과 충남도지사를 지냈고, 1987년 조달청장이 됐다. “경제에 대해서는 잘 몰랐습니다. 그래도 ‘왜 굳이 나를 이곳에 보냈을까’에 대해 한참 생각해봤죠. 조달청이라는 곳이 정부에서 필요로 하는 주요 물자를 미리 구입하여 비축하거나 정부가 발주하는 토목 건설 공사 등의 입찰을 담당하는 곳이잖아요.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담당 공직자의 올바른 자세가 더한층 요구되겠죠. 그래서 저를 뽑았나 싶었습니다.”
그가 조달청장에 취임하자 건설업계 사장들은 예외 없이 봉투를 내밀었다. 그러나 안씨는 “마음만 받은 것으로 하겠다. 받건 안 받건 공정하게 일 처리를 하겠으니 안심하라”며 정중히 거절했다. 이후 조달청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그는 정부 발주 건설공사에 대한 입찰 처리가 이틀 이상 걸리던 것을 두세 시간 만에 현장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만들었다.
범죄근절 최선은 예방… ‘순찰 강화’가 중요
여러 영역을 넘나들다 안씨는 1988년 안기부(현 국정원) 차장이 됐다. “부임해서 3개월 동안은 브리핑 중에 코멘트를 하나도 하지 않았어요. 제가 잘 모르는 일에 토를 달기 싫었죠. 대신 매주 주말에 출근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업무를 완전히 파악하고 나서야 말문을 열었어요. 정확한 질문과 지시가 이어지자 직원들이 제 말을 잘 듣더라고요. 또 인사 부문에서는 제 원칙대로 공정하게 했죠. 인사청탁을 받아도 ‘공정성과 투명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1990년대 초 한국의 치안 상황이 매우 나빴다. 불법 시위가 기승을 부렸고 봉고차로 부녀자를 인신매매했다는 얘기도 심심치 않게 들리던 때였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이 상황을 헤쳐나갈 수 있는 내무부의 수장이 누구일지 고민했고 안씨가 거론됐다. 서동권 안기부장도 그를 추천했다. 청와대·충남도지사·조달청·안기부 등 다양한 곳을 거쳤고 도덕성, 업무추진력 등을 봤을 때 적임자라고 생각한 것이다. “제 소명이라 생각하고 ‘범죄와의 전쟁’을 이끌었습니다. 당시 경찰을 우습게 보던 범죄조직과도 정면으로 대결해서 많은 조직 범죄를 없앴어요.”